그녀는 나이기도 했다

영화 〈오만과 편견〉을 보고

by푸른 꽃

그 아이와 친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번호부터 달랐다. 나는 앞 번호, 그 아이는 중간 번호였다. 그때는 비슷한 번호끼리 주로 가깝게 지냈다.

그 아이에게는 내게 없는 분위기가 있었다. 약간은 반항적이면서도 뭔가 깊어 보였다. 나는 얌전한 편이었기에 그 아이를 나와 다른 부류라고 생각했다.


영화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도 다아시를 처음 만난 날부터 좋은 인상을 받지 못한다. 무도회장의 다아시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엘리자베스는 자신을 두고 한 그의 무례한 말까지 듣게 된다. 그는 오만한 남자였다. 그 뒤 위컴에게서 다아시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이미 자신이 본 다아시와 잘 맞아떨어지는 이야기였으니까.


그러던 중 그 아이와 짝이 되었다. 가까이서 본 친구는 말이 없었고 나 역시 선뜻 말을 걸지 못했다. 어느 날 옆자리가 며칠 비었는데 나는 그 아이의 소식조차 몰랐다. 다시 학교에 나온 날 메모를 써서 건넸다.

‘나는 너 죽은 줄 알았어.’


그때부터 우리는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서로의 바카라상 서랍이나 가방에 편지를 넣어두곤 했다. 그 애는 편지에서 나를 ‘나의 아씨’라고 불렀다. 얼굴을 마주하면 말도 제대로 못 하면서 편지 속에서는 제법 다정했다.

그 무렵 우리는 춘천에 갔다. 그날은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그 애는 어땠는지 몰라도 나는 먹는 모습을 보여주기가 부끄러웠다. 먹는 일이 너무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편지로 마음속 이야기를 하면서도 밥은 먹지 못했다.


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편지는 이어졌다. 자주 만나지 못하던 시절, 그 애는 편지에 ‘보고 싶다’고 썼다. 내가 뭐라고 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애는 나를 채송화에 빗대기도 했다. 손가락으로 살짝만 문질러도 상하고 고운 색이 손끝에 묻어나는 꽃. 그러면서 내가 다치기 쉽지만 견고하기도 하다고 했다. ‘섬세하고 세밀하게 쌓아 올린 성벽처럼.’


〈오만과 편견〉에서 두 사람이 가장 격렬하게 맞서는 장면은 다아시의 첫 번째 청혼이다. 다아시는 사랑을 고백하면서도 엘리자베스의 집안과 신분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걸림돌이었는지를 숨기지 않는다. 엘리자베스 역시 자신이 알고 있는 다아시의 잘못을 꺼내며 청혼을 거절한다. 둘 다 상대를 너무 잘 안다고 믿었다.


다음 날 다아시는 엘리자베스에게 편지를 건넨다. 거기에는 위컴의 거짓말과 제인과 빙리의 관계에 개입한 이유가 적혀 있다. 엘리자베스는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며 처음으로 자신의 판단을 의심한다. 내가 저 사람을 잘못 본 것은 아닐까.


몇 년 전, 그 애가 나에 관한 짧은 글을 써서 보내왔다. 그중 한 문장이 오래 남았다.


‘그녀는 나이기도 하다.’


요 며칠 그 애가 내 온라인카지노에 들어와 글을 읽고 있다. 한두 편이 아니다. 하나씩 읽어 내려가는지 연달아 라이킷이 찍힌다.


오래전에는 그 애가 써준 편지를 내가 읽었다. 이제는 내가 쓴 글을 그 애가 읽는다.


내일이면 우리는 또 만난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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