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를 보고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가슴이 철렁하던 때가 있었다.
당시 다니던 회사의 사장에게 돈을 빌려준 적이 있다. 내가 가진 돈으로는 부족해 대출까지 받아 건넸다. 금방 돌려준다는 말을 믿었다. 그 일로 오랫동안 마음을 졸이게 될 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약속한 돈은 돌아오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도 갚아야 할 몫은 고스란히 내게 남았다. 집으로 독촉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전화벨이 울리면 혹시 부모님이 먼저 받을까 심장부터 뛰었다. 급기야 검은 양복을 입은 낯선 남자들이 집 앞에서 어슬렁거리곤 했다.
그들보다 무서운 건 부모님이 그 사실을 알게 되는 거였다.
돈을 갚지 않은 사람은 따로 있는데 잘못은 내가 한 것 같았다. 집 앞에 낯선 사람이 보이기만 해도 가슴이 내려앉았다.
한참 뒤, 드라마를 보다가 한 장면에서 멈칫했다.
20점짜리 시험지.
〈나의 해방일지〉의 염미정은 전 남자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고 돌려받지 못한다. 독촉장이 부모님 집으로 갈까 봐 주소까지 바꾼 그녀는 어린 시절 20점을 받은 시험지를 떠올린다. 부모님 사인을 받아야 하지만 차마 보여드리지 못하고 가방 속에 넣어두었던 시험지였다.
돈을 빌려준 자신이 20점인지, 갚지 않는 사람이 20점인지, 아니면 그냥 자신이 20점짜리인지 모르겠다고.
주소까지 바꾼 미정의 마음을 알 것 같아서 오히려 불편했다.
오래전 그 일이 내게도 20점짜리 시험지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나는 왜 남의 사정을 내 사정으로 만들었을까. 이미 벌어진 일이니 어떻게든 수습해야 했다.
돈을 빌려간 사람보다 빌려준 내가 더 불안했다. 그러면서도 정작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늘 커다란 돌덩이를 안고 사는 기분이었다.
미정의 20점짜리 시험지가 마음에 남았던 것도 그래서였는지 모른다. 점수가 낮다는 사실보다 시험지를 누군가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것. 사인을 받아야 한다는 것. 가방 속에 감춰둔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꺼내놓을 수는 없는 마음.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이런 말부터 튀어나온다.
어휴, 나는 왜 그랬을까.
돌이켜봐도 그때의 선택은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오래 전의 나를 붙잡고 언제까지고 같은 질문을 할 수도 없는 일이다.
가끔은 미정의 시험지가 생각난다.
오래 숨겨두었던 시험지를 이제 와 다시 채점한다고 점수가 달라질 리는 없다. 그날의 선택도 없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
이제는 안다.
그 시험지 한 장이 나라는 사람의 성적표 전부는 아니었다는 것을.
그걸 아는 데 꽤 오래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