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을 다시 보게 되는 순간

영화 <페인티드 베일>을 보고

by푸른 꽃

한동안 국제결혼으로 한국에 온 여성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센터에는 나 말고도 몇 명의 교사가 있었다.


그중 한 선생님과는 오가며 인사를 나누는 정도였다. 서로의 수업 시간이 달라 오래 마주칠 일도 없었다. 그녀는 늘 웃고 싫은 소리 한마디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런 빈틈없는 모습이 조금 불편했다.

그러다 센터에서 바자회가 열렸다. 그녀는 이주 여성들이 차린 부스를 찾아다니며 물건을 함께 팔았다. 바쁜 곳이 생기면 어느새 그쪽에 가서 일손을 보탰다. 한참 지나고 보니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고, 옷도 후줄근해져 있었다.


그날 그녀가 새롭게 보였다.

그런 모습은 그날뿐이 아니었다. 외국인들을 위한 행사가 있는 날에는 사람들을 안내했고, 대절한 버스에서는 함께 온 가족들까지 챙겼다.


영화 〈페인티드 베일〉을 보다가 문득 그때의 그녀가 떠올랐다.


1920년대 런던. 사교모임과 파티를 좋아하는 키티는 세균학자 월터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월터는 키티에게 첫눈에 반했지만 키티가 결혼을 선택한 데에는 사랑보다 결혼을 재촉하는 어머니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결혼 후 두 사람은 중국으로 떠난다. 활달한 키티와 조용히 연구하고 바카라 읽기를 좋아하는 월터. 서로를 충분히 알지 못한 채 시작한 결혼생활은 삐걱거리기 시작하고, 결국 키티는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아내의 외도를 알게 된 월터는 콜레라가 퍼진 중국의 오지 마을로 자원하면서 키티를 데려간다. 두 사람은 한집에 살면서도 필요한 말만 건넨다. 중간중간 흐르는 에릭 사티의 ‘그노시엔느 1번’ 때문이었을까. 두 사람의 냉랭함이 화면 밖으로까지 번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서로에게서 가장 멀어진 그곳에서 비로소 상대를 보기 시작한다.

키티는 월터가 일하는 모습을 본다. 콜레라의 원인을 찾아 마을의 물을 조사하고 새로운 물길을 만든다. 환자들을 돌보고, 마을 사람들과 부딪치면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낸다. 런던에서는 보지 못했던 얼굴이었다.


월터의 눈에도 자신이 몰랐던 키티가 들어온다. 무료하게 보내던 키티는 수녀원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피아노를 친다. 아이들이 주위로 몰려들면 그들과 함께 웃는다.

월터는 그런 키티를 바라본다.


‘원래 그런 사람이야.’


월터에게 키티는 철없고 허영심 많은 여자였고,

키티에게 월터는 재미없고 답답한 남자였다.


틀린 모습은 아니었다. 다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조금씩 가까워진다.


그러나 콜레라에 걸린 사람들을 치료하던 월터는 결국 감염된다. 키티가 곁을 지키지만 끝내 세상을 떠난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그녀가 생각났다. 우리는 어느새 가까워져 있었다. 종종 연락을 주고받았고, 나중에는 아이의 국어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인연은 생각보다 오래 이어졌다.


그전에도 그녀에게 그런 모습은 있었을 것이다. 내가 미처 보지 못했을 뿐.


한 사람을 안다는 건, 다시 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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