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거짓말

by산너머 작은집

고요한 새벽녘, 오늘따라 유난히 짹짹 거리는 새소리가 소란스럽다.

산속에 있는 온갖 새들이 목청껏 지저귀는 소리에 잠이 깼다.

오늘이 새들의 잔치 날인가?

산으로 둥그렇게 둘러싸인 우리 마을이 퐁당 새들의 마을 속으로 빠져버린 것 같다.


밖으로 나오니 청량한 새벽 공기가 온몸을 감싼다.

천천히 음미하 듯 꽃밭에 핀 꽃과 하나씩 눈 맞춤을 한다.

활짝 핀 빨간 나리, 노란 나리 꽃송이가 서로 제 빛깔을 뽐내고 있다.

“우열을 가릴 수가 없이 둘 다 예뻐”

애정을 듬뿍 담아 부드러운 눈짓으로 말해주곤 발걸음을 옮겼다.


“어머!! 이거 어떻게 된 거야? 어쩌면 좋아!! 방울이가 부러졌잖아.”


내 하이톤의 목소리에 데크에서 졸고 있던 강아지 호박이가 깜짝 놀라, 얼떨결에 꼬리를 마구 흔든다.

어제까지만 해도 제법 굵은 줄기로 싱싱하게 잘 자라던 방울이였는데,

어찌 된 일인지 줄기 가운데가 뚝 부러져 흙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바닥에는 [윤수`s 방울이] 란 초록 이름표만 덩그러니 꽂혀 있다.


얼마 전 딸 집에 가보니, 키만 길쭉하고 빼빼 마른 방울토마토가 작은 화분에서 가쁜 숨을 쉬고 있었다.

웬 방울토마토냐고 물으니 초등학교 3학년 손자가 학교에서 기르던 방울토마토라고 한다.

집에 가져가서 잘 키우라는 선생님 말씀에, 방울토마토 화분을 소중히 안고 학원 순례를 마치고

집으로 가져왔단다.


“할머니 이거 내가 심었는데 이렇게 싹이 났어. 그래서 내가 방울이라고 이름 지어줬어.”

손자는 어깨를 으스대며 자랑스럽게 화분을 들고 내게 왔다.


시골 텃밭에서 싱싱하게 잘 크고 있는 작물들을 생각하니, 제대로 크지 못하고 비틀어진 방울이가가 안쓰러워 시골집으로 가져가서 땅에 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휴~ 가엾어라. 방울이가 너무 햇볕을 못 봐서 다 죽어가고 있네. 할머니가 시골에 가져가서 잘 키워줄게.”

“안돼! 내 방울이야~ 내가 우리 집에서 잘 키우고 싶단 말이야.”

뺏기기라도 할까 봐 손자가 두 손으로 화분을 감싸 안으며 말했다.

“여기 아파트는 환기도 잘 안되고 햇볕도 적어서 방울이가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아. 흙에다 심어놓으면 방울이가 더 좋아하고 잘 자랄 거야.”


방울이가 더 좋아할 거라는 말에 손자는 잠시 망설이더니 화분을 내게 내밀었다.

"할머니, 잘 키워줘야 해."

방울이를 위해 순순히 화분을 내어준 손자의 예쁜 마음이 돋보여 잘 키워주겠다고 약속했다.


시외버스를 타고 오면서 행여 방울이가 다칠세라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시골집에 가져왔다.

오자마자 제일 눈에 띄는 곳에 심어놓았다. 방울이라는 이름표도 꽂아 놓고 오며 가며 수시로 돌봐주었다.

워낙 빈약한 방울이는 며칠 동안 위태롭게 버티더니 차차 회복되어 줄기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

다행히 며칠간의 몸살을 끝내더니, 완벽히 새 환경에 적응하여 예쁘게 자라고 있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방울이를 보니 남편의 부주의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보나 마나 남편이 그랬을 거야. 며칠 후면 윤수가 올 텐데 어떡해...'

아직 자고 있는 남편을 깨워 어떻게 된 거냐고 닦달하였다. 그러나 남편은 자기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딱 잡아떼었다.

지금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다. 시간이 없다.

당장 이번 주에 오는 손자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손자가 얼마나 실망할지 생각하니 앞이 캄캄하다.

데크 난간에 기대어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주변을 둘러보니, 작년에 심은 방울토마토 씨앗이 떨어져 저절로 난 방울토마토가 여러 개 보인다.

그중 가장 방울이와 닮은 것을 캐서 방울이 자리에 감쪽같이 심어 놓았다. 새로운 방울이는 얼마쯤 몸살을 하다가 손자가 올 때쯤 되면 싱싱하게 자리를 잘 잡을 것이다.


새로운 방울이를 심어놓고 나니 진짜 방울이를 부러뜨린 범인이 궁금했다.

남편과 단 둘이 사는 집에 다른 범인이 있을 수 있을까? 백 프로 남편이 범인이라 생각하며 남편을 추궁했다. 남편은 자신은 아니라며 결백을 주장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전날 남편이 방울이 주변에 있는 큰 널빤지를 옮기던 모습이 생각났다.

“당신이 어제 거기서 널빤지 옮기고 그랬잖아! 그때 당신이 부러뜨렸구먼!!”

“무슨 소리야? 내가 그걸 왜 부러뜨려? 그럴리가 없어...”

자기 주장이 강한 남편은 자기가 그런 게 아니라고 우기면서도 약간 꼬리를 내리는 듯했다.

나는 기세 등등 하게 밀어붙였다.

“그럼 CCTV 돌려본다!”

남편은 상황상 자신의 실수라는 것이 느껴졌는지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피식 웃는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하는 손자에게서 또 전화가 왔다.

“할머니, 나 이번 주말에 갈 거야. 방울이 보고 싶다.”

“윤수야, 할머니가 더 보고 싶어? 방울이가 더 보고 싶어?”

“에이~ 할머니, 당연히 할머니가 더 보고 싶지.”

“그래, 그래~ 우리 애기 주말에 오너라.”


'윤수야~ 할머니가 거짓말해서 미안해. 제대로 돌봐주지 못한 방울이한테는 더 미안하고.'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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