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의 식탁에서 양저우(揚州)의 차오판, 그리고 오늘의 한 끼까지
조금 있으면 추석이다.
작년부터 우리 집에서는 차례를 지내지 않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예전처럼 명절이 다가오면 장을 보고, 전을 부치고, 나물을 무치며 분주하게 음식을 준비하던 풍경도 사라졌다. 명절 아침이면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차례를 지내고 음식을 나누던 모습도 이제는 오래된 추억이 되었다.
처음에는 텅 빈 듯 허전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진 명절의 모습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제 우리 집의 추석은 예전보다 한가롭고 소박해졌지만, 명절을 맞는 마음까지 달라진 것은 아니다.
예전에는 명절이 지나고 나면 냉장고에 음식이 꽤 많이 남았다. 나물도 남고, 전도 남고, 생선과 고기도 남았다. 그렇다고 남은 음식을 그대로 다시 차려 먹지는 않았다. 조금씩 남은 음식들을 꺼내 따뜻한 밥에 고추장을 듬뿍 넣고 비벼 먹기도 하고, 참기름을 두르고 달달 볶아 먹기도 했다. 서로 다른 음식들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또 다른 맛의 한 끼가 되었다. 그렇게 만든 비빔밥이나 볶음밥을 식탁 가운데 놓으면 흩어져 있던 가족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명절을 위해 정성껏 준비했던 음식은 그렇게 연휴가 지나고도 가족의 든든한 한 끼를 채워주었다.
지금은 차례를 지내지 않으니 명절 음식이 예전처럼 많이 남을 일도 없다. 대신 평소처럼 냉장고를 열어 남아 있는 자투리 채소를 꺼내고, 달걀과 밥을 넣어 소박한 볶음밥을 만든다. 생각해 보면 재료의 가짓수나 화려함은 달라졌을지언정, 남은 재료들을 모아 밥 한 공기를 뚝딱 맛있는 한 끼로 만들어 먹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다.
그런데 볶음밥을 만들 때면 오래전 명절의 식탁 외에도, 문득 떠오르는 풍경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중국 난징(南京)에서 주재원으로 생활하던 시절, 아내와 함께 맛보았던 차오판(炒飯)이다.
당시 주말이면 아내와 함께 난징 주변에 있는 황산(黃山), 항저우(杭州), 쑤저우(蘇州), 양저우(揚州) 등 여러 지역을 여행하곤 했다. 고즈넉한 정원을 거닐고, 넓은 무대에서 펼쳐지는 공연을 구경하는 것도 우리 부부에게는 큰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눈과 귀가 즐거운 여행 속에서도 식사 시간만큼은 늘 쉽지 않았다. 중국 음식 특유의 낯선 향신료 때문에 현지 식당에서 고심 끝에 음식을 주문해도 입맛에 맞지 않아 난감할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 부부가 자연스럽게 찾게 되는 음식이 있었다. 바로 볶음밥, 차오판(炒飯)이었다. 특히 양저우(揚州)에서 먹었던 차오판은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다. 눈에 띄게 값비싼 재료가 들어간 것도 아니었고, 채소가 화려하게 색을 내는 것도 아니어서 겉보기에는 그저 평범하고 소박해 보였다. 그런데 한 숟가락 푹 떠서 먹어보니 담백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생각보다 좋았다. 늘 함께 다니던 운전기사까지 셋이서 배불리 먹고도 한참이나 남을 만큼 푸짐한 양도 인상적이었다.
그 뒤로 우리는 낯선 도시의 식당에 들어가면 차오판을 하나씩 주문하는 버릇이 생겼다. 향이 강한 현지 음식들 사이에서 차오판은 실패할 걱정 없이 마음 편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그렇게 차오판은 중국에서 만난 수많은 음식 가운데 지금까지도 내 기억에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는 음식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차오판을 그토록 친숙하게 느꼈던 것은, 달걀과 채소를 밥과 함께 볶아낸다는 점에서 한국의 중식당이나 집에서 먹던 볶음밥과 무척 닮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낯선 음식과 향신료가 가득한 타지에서 익숙한 맛을 만난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위안이었다. 그래서 차오판을 마주할 때면 음식에 대한 긴장도 한결 누그러지고, 편안한 마음으로 숟가락을 들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냉장고를 뒤져 볶음밥을 만든다. 냉장고 속에 남아 있는 자투리 채소와 달걀, 그리고 찬밥만 있으면 한 끼를 만들 수 있다. 오늘은 오래전 중국에서 먹었던 차오판의 담백하고 고소했던 맛을 떠올리며, 나만의 ‘황금 볶음밥’을 만들어 보았다.
이 볶음밥의 핵심은 찬밥에 달걀노른자를 미리 골고루 입히는 것이다. 볼에 찬밥과 달걀노른자를 넣고 밥알이 뭉치지 않도록 잘 섞어준다. 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노른자로 코팅한 밥을 올린 뒤, 젓가락 3~4개를 움켜쥐고 타닥타닥 소리가 나도록 쉬지 않고 저어가며 볶는다. 밥알 하나하나가 고슬고슬하게 풀어지면 잘게 썬 채소를 넣고, 진간장을 살짝 둘러 빠르게 볶아낸다.
# 재료
찬밥(혹은 즉석밥 1개) 200g, 달걀노른자 2개, 대파/양파/당근/셀러리/크래미 각각 한 줌(냉장고 속 재료 활용), 진간장 1작은술, 식용유 2큰술, 참기름 1/2큰술, 깨소금 약간
* 즉석밥은 전자레인지에 30 ~ 40초 돌려서 준비하세요
# 요리 과정
찬밥을 준비한다
달걀노른자를 풀어 찬밥에 골고루 입혀지도록 잘 섞는다
채소는 밥알과 잘 어우러지도록 잘게 썰어 준비한다
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노른자를 입힌 밥을 센 불에서 볶는다. 젓가락 3~4개로 밥알을 계속 풀어주면서 볶아 수분을 날린다
재료와 진간장을 넣고 빠르게 볶아 마무리한다
고슬고슬하게 볶아낸 황금 볶음밥
가까이에서 들여다본 볶음밥
완성된 볶음밥을 한 입 먹어보니 밥알이 뭉치지 않고 고슬고슬하게 흩어진다. 달걀노른자의 고소함에 채소의 은은한 단맛과 진간장의 감칠맛이 더해져 담백하면서도 심심하지 않다. 특별한 재료를 넣지 않았는데도 냉장고 속 남은 채소 몇 가지와 밥 한 공기로 만든 한 접시가 생각보다 든든하고 맛있다. 소박한 재료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한 끼가 되었다.
이번 추석에는 예전처럼 기름 냄새 풍기며 명절 음식을 차려놓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냉장고 문을 열면 볶음밥을 만들 소박한 재료들은 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달걀을 풀고, 밥을 볶고, 남은 채소를 썰어 넣다 보면 오래전 명절의 식탁과 양저우에서 아내와 마주 앉아 안도하며 푹푹 떠먹던 차오판이 문득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음식은 그렇게 잠들어 있던 기억을 데리고 온다. 오늘 볶아 먹는 평범한 밥 한 그릇에도 지나온 시간과 그때 함께했던 사람들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명절의 모습도, 우리가 먹는 음식도 조금씩 달라졌지만, 밥 한 끼를 나누며 함께했던 시간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P.S 다음주에는 글을 잠시 쉬어갑니다.
가족과 함께 편안하고 풍성한 한가위 보내시고,
연휴가 지나고 다시 맛있는 음식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즐거운 추석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