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래기와 얼갈이를 한 솥에
음식은 때로 달력보다 먼저 계절의 변화를 알려준다. 한낮의 햇살은 여전히 여름의 끝자락을 쥐고 있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분다. 냉장고에서 꺼낸 시원한 음식만 찾던 날들, 얼음 동동 띄운 냉국과 새콤한 물김치가 식탁 한가운데를 차지하던 계절도 이제는 서서히 뒤로 물러나는 듯하다.
서늘해진 공기를 마주하면 으레 불 위에 묵직한 솥을 올리고 천천히 익어가는 음식을 기다리는 시간이 좋아진다. 뜨끈한 국물과 뭉근하게 익은 채소가 생각나는 요즈음. 오늘은 시래기와 얼갈이를 듬뿍 넣고 고기찜을 만들기로 했다.
시래기와 얼갈이는 같은 푸성귀이면서도 저마다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다. 푹 삶아낸 시래기가 거칠고 투박한 겉모습 속에 깊은 구수함을 감추고 있다면, 연한 얼갈이는 막 자라난 채소 특유의 싱그러움과 부드러움을 품고 있다. 하나는 거칠고 묵직하며, 다른 하나는 여리고 산뜻하다. 시래기만 넣으면 자칫 구수함만 앞서고 얼갈이만 넣으면 맛이 가벼워질 수 있지만, 서로 다른 식감을 가진 두 채소를 한 솥에 넣고 끓여 내면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며 한결 풍성한 조화를 만들어낸다.
특히 고기와 함께 뭉근하게 익혀낼 때 두 재료의 매력은 더욱 살아난다. 고기에서 배어 나오는 고소한 기름과 육수가 스며들어 채소만으로는 낼 수 없는 묵직하고 깊은 맛을 완성하기 때문이다. 두툼한 돼지고기를 솥바닥에 든든하게 깔고, 그 위에 시래기와 얼갈이를 이불처럼 넉넉히 덮었다.
오늘 음식의 중심을 잡아줄 양념은 된장이다. 시래기와 얼갈이는 된장으로 가볍게 무쳐두고, 돼지고기 역시 된장을 기본으로 갖은양념을 넉넉히 더해 깊은 맛이 배어들도록 밑간을 해두었다. 이렇게 밑간하여 차곡차곡 담은 솥에 다시마 육수를 부어 불을 올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끓어오르는 솥 안에서 구수한 냄새가 번지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솥 안에서 제각각 겉돌던 재료들도 국물이 끓어오르며 서서히 서로의 맛을 나누기 시작한다.
한소끔 크게 끓어오른 뒤 불을 낮추고 뚜껑을 덮었다. 이제부터는 오롯이 시간의 몫이다. 돼지고기에서 고소한 기름이 배어 나오면, 질기고 투박했던 시래기는 부드러워지고 연한 얼갈이는 된장 국물과 육수를 고스란히 머금는다.
센 불에서 재빨리 볶아내는 요리와 달리, 이 음식은 재료들이 충분히 어우러질 때까지 기다려야만 비로소 깊은 맛이 난다. 불을 낮춘 뒤에는 더 이상 서두를 일이 없다. 솥 안에서 일어나는 조용한 변화를 믿고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 재료
돼지고기(삼겹살) 600g, 불린 시래기 300g, 얼갈이 300g, 대파 1대, 청양고추 4개, 고기 양념 (고춧가루 3큰술, 국간장 2큰술, 멸치액젓 2큰술, 다진마늘 2큰술, 된장 3큰술, 고추장 2작은술, 청주 3큰술, 들기름 2큰술), 시래기와 얼갈이 양념(된장 2작은술), 다시마 육수 400ml
* 고기는 소고기나 돼지고기 모두 다 잘 어울린다
# 요리 과정
건시래기를 준비한다
건시래기는 따뜻한 물에 담가 하루 정도 충분히 불린다
불린 건시래기는 30분간 삶은 뒤 깨끗이 씻어 먹기 좋은 크기로 썬다
얼갈이는 살짝 데친 뒤 깨끗이 씻어 먹기 좋은 크기로 썬다
시래기와 얼갈이를 고루 섞은 뒤 된장으로 밑간한다
고기는 키친타월로 핏물을 제거한 뒤 먹기 좋은 크기로 큼직하게 썬다
고기에 넣을 양념장을 만든다
고기를 양념장에 넣고 골고루 버무려 재운다
대파와 고추는 잘게 썬다
다시마 육수를 준비한다
냄비에 양념한 고기를 넣고 그 위에 양념한 시래기. 얼갈이를 올린 뒤 다시마 육수를 붓는다
한소끔 크게 끓인 뒤 뚜껑을 덮고 중불에서 20분간 끓인다. 대파와 고추를 넣고 5분간 더 끓여 마무리한다
완성한 시래기. 얼갈이 고기찜
가까이에서 들여다본 시래기. 얼갈이 고기찜
마침내 뚜껑을 열자 된장의 깊고 구수한 향이 훅 올라온다. 부드럽게 익은 시래기는 고기의 고소함을 흠뻑 빨아들여 윤기가 흐르고, 얼갈이는 푹 익었음에도 특유의 달큼함을 잃지 않았다. 된장은 어떤 재료의 맛도 함부로 덮어버리지 않은 채 모두를 한데 어우러지게 품어 안았다.
돼지고기가 든든하게 중심을 잡아준 요리지만, 막상 식탁에 올리니 젓가락은 어느새 고기보다 시래기와 얼갈이로 먼저 향한다. 고소한 육즙을 한껏 머금은 채소는 더 이상 고기를 보조하는 조연이 아니다. 고기보다 더 맛있는 진짜 주인공의 탄생이다.
어쩌면 요리도 우리의 삶도 그런 것이 아닐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정성을 다해 준비를 마쳤다면, 때로는 조바심을 내려놓고 조용히 익어가는 시간을 믿고 기다려주는 것. 서둘러 볶아낸 맛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깊은 맛이 그 기다림 끝에 찾아온다.
서늘한 바람이 스치는 늦여름 저녁, 따뜻한 밥 한 그릇과 시래기 얼갈이 고기찜을 앞에 놓고 있으니 서로 스며들며 깊어지는 것들이 주는 넉넉함을 비로소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