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제철을 한 냄비에 담았다

옥수수·감자·고구마·단호박으로 지은 여름 냄비밥

by굳데이

온라인 게임 생활을 하던 시절, 여름이 오면 어김없이 반가운 택배 상자들이 집으로 배달되곤 했다. 강원도에서 농장을 하는 지인이 해마다 보내온 옥수수와 감자가 도착하면, 상자를 여는 순간 짙은 흙냄새가 훅 끼쳐왔다. 그와 함께 강원도의 여름도 우리 집 부엌으로 성큼 들어섰다. 하지만 넉넉한 계절의 선물은 때로는 작은 고민도 함께 안겨주었다. 우리 가족이 다 먹기에는 감자의 양이 너무 많아 처음 몇 해는 썩혀 버리는 시행착오도 겪었다. 그 뒤로는 이웃들과 나누며 여름의 맛을 함께 즐겼지만, 감자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아이들과 달리 집사람이 좋아하는 옥수수는 늘 아쉬울 만큼 금세 바닥을 드러내곤 했다.


가을이 가까워질 무렵이면 청주 공장 텃밭에서 수확한 고구마도 작은 상자에 담겨 집으로 배달되곤 했다. 퇴근 후 상자를 열면 흙이 묻은 고구마가 정겹게 모습을 드러냈고, 무더운 날씨에도 땀 흘리며 고구마를 심고 가꾸고 수확했을 사람들의 모습이 먼저 떠올랐다. 그 수고를 생각하면 고구마 하나도 허투루 먹을 수 없었다. 집사람과 마주 앉아 며칠 동안 고구마를 쪄 먹으며 고마운 마음을 나누던 기억은 지금도 따뜻하게 남아있다.


그 시절의 옥수수와 감자, 고구마를 그저 쪄 먹기만 했던 것이 못내 아쉬워진 것은 얼마 전 요리 수업을 들으면서부터였다. 요리 연구가 쿡미애쌤이 시연한 메뉴는 '여름 건강 냄비밥'이었다. 불린 쌀 위에 옥수수와 고구마, 단호박을 듬뿍 올려 지어낸 냄비밥은 단순하지만 무척 매력적이었다. '그때 그 식재료들을 이렇게 냄비밥으로 지어먹었더라면 훨씬 다채롭게 즐길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뒤늦은 깨달음이 밀려왔다.


수강생 대부분이 여성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시식 시간이 되자 접시에 따로 담아 둔 옥수수가 가장 먼저 동이 났다. 그 모습을 보니 동네 마트에서 찐 옥수수를 파는 날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집사람이 떠올랐다. 미처 사 오지 못한 날에는 "하나 사 올 걸 그랬네." 하며 아쉬워하던 얼굴까지 자연스레 겹쳐졌다. 제철 식재료 몇 가지가 평범한 밥 한 끼를 얼마나 풍성하게 만드는지 눈으로 확인한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이번에는 집에서도 꼭 한번 무쇠 냄비를 꺼내어 제대로 지어봐야겠다'라고 다짐했다.


며칠 뒤, 마트에서 옥수수와 단호박을 사고 집에 있던 고구마와 감자를 꺼내니 여름 제철이 한 냄비 안으로 모여들었다. 요리 과정은 무척 단순하다. 쌀을 깨끗이 씻어 충분히 불린 뒤 무쇠 냄비에 안치고, 그 위에 손질한 제철 식재료를 가지런히 올렸다. 뚜껑을 덮고 센 불에서 끓이다가 김이 오르기 시작하면 약한 불로 줄여 천천히 익히고, 마지막으로 뜸을 충분히 들였다. 밥이 완성되면 재료는 조심스럽게 건져 따로 접시에 담고, 냄비에 남은 밥은 주걱으로 가볍게 뒤섞어 그릇에 담아냈다.






# 재료


불린 쌀 2컵, 옥수수 1개, 고구마 1개, 단호박 1개, 감자 1개, 양념장 (진간장 3큰술, 물 1큰술, 대파 3큰술, 청양고추 1개, 홍고추 1/2개, 다진마늘 1/2 큰술, 참기름 1큰술. 통깨 1큰술)



# 요리 과정


쌀은 깨끗이 씻어 30분 정도 물에 불려 준비한다


옥수수는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다. 수염과 속껍질은 버리지 말고 한데 모아 묶어 준비한다.


고구마는 껍질째 깨끗이 씻어 먹기 좋은 크기로 큼직하게 썬다


단호박은 씨를 제거한 뒤 껍질째 먹기 좋은 크기로 큼직하게 썬다


감자는 껍질째 깨끗이 씻어 먹기 좋은 크기로 큼직하게 썬다


냄비에 물 2컵을 넣는다


옥수수 등 재료를 쌀 위에 가지런히 놓는다


뚜껑을 덮고 끓이다가 김이 오르기 시작하면 약한 불에서 10분간 익힌 후, 불을 끄고 5분간 뜸을 들인다


완성한 냄비밥


가까이에서 들여다본 냄비밥


양념장을 준비한다


옥수수 등 재료를 건져서 접시에 담아 식힌다


냄비밥과 양념장






뜸을 충분히 들인 뒤 뚜껑을 여는 순간, 달큼한 옥수수와 단호박 향이 부엌 가득 퍼졌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밥을 한 숟갈 떠 입에 넣으니 제철 식재료가 품은 자연스러운 단맛이 밥알 사이사이에 스며들어 깊고 편안한 풍미를 전했다. 옥수수는 씹을수록 고소한 단맛과 톡톡 터지는 식감을 더했고, 감자는 포슬포슬한 식감으로, 고구마와 단호박은 은은한 단맛으로 밥맛을 한층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다. 함께 익힌 재료들은 따로 담아 간식으로 먹기에도 더없이 좋았다.


대파를 듬뿍 썰어 넣은 간장 양념장을 곁들이니 담백했던 냄비밥에 감칠맛이 더해졌다. 여기에 열무김치나 오이지 하나만 있어도 충분했다. 은은한 단맛을 더해 준 단호박 덕분에 냄비밥은 한층 부드럽고 풍성한 맛을 냈다. 거창한 반찬이 없어도 제철 식재료 몇 가지만으로 식탁이 풍성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꼈다.


냄비밥 한 그릇을 비워내며 음식은 계절을 담아내는 그릇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란 옥수수와 감자는 강원도의 여름을, 고구마는 청주에서 바쁘게 보냈던 시간을, 단호박은 아내와 함께하는 오늘의 식탁을 더욱 풍성하게 채워 주었다.


젊은 시절에는 특별하고 화려한 음식만을 찾아다녔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제철 재료를 툭툭 썰어 올려 지은 따뜻한 냄비밥 한 그릇이 주는 위로와 행복이 훨씬 크고 깊게 다가온다.


푹푹 찌는 무더위에 지쳐 입맛을 잃기 쉬운 요즘이다. 올여름은 냄비 하나에 계절을 담아보면 어떨까. 갓 지은 밥 한 그릇 속에서 제철 식재료의 소박한 맛은 물론, 마음 한구석에 묻어두었던 따뜻한 추억까지 함께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