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당시 나는 대학병원에서 정기 검진을 받는 고위험군 산모였다.
동시에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세 살배기 아들을 둔 워킹맘이기도 했다. 아이는 밤이 되면 그 시기에 겪을 수 있는 ‘소아 야경증’까지 앓고 있어, 나 역시 꽤 오랜 기간 제대로 된 수면을 취하지 못했다. 소아과 진료 때마다 상담했지만 담당 의사 선생님은 ‘시간이 약’이라는 말로 나를 위로할 뿐이었다. 몸과 마음의 에너지는 이미 바닥난 지 오래였다. 방전 직전, 깜빡이는 배터리 한 칸으로 간신히 하루를 버티는 기분이었다.
출산 전 넘어야 하는 여러 검사 결과도 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임신성 당뇨는 재검 끝에 겨우 통과했지만, 후반기로 갈수록 고혈압과 부종은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담당 교수의 차분한 경고가 이어질수록 마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밤마다 퉁퉁 부은 다리를 부여잡고 끙끙대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조산에 대한 불안과 아이에 대한 죄바카라감은 수시로 고개를 들었다. 경산(經産)이었지만 여유는 없었다. 몸도 마음도 끝없는 일과 육아의 굴레 속에서 이미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이제 와 고백하건대, 첫 복직 직후 찾아온 둘째 소식은 분명 축복이었지만 그만큼 막막함도 컸다. 갓 돌 지난 아이를 기관에 맡기고 온라인 게임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양쪽 다 서툰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제 막 어린이집 단체 생활을 시작한 아이는 수시로 아팠고, 연차 사용을 고민하는 1순위는 늘 엄마인 나였다. 일도 육아도 어느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는 자괴감에 위축되기 일쑤였다. 그 와중에 다시 육아휴직을 말해야 한다는 사실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남편은 “죄지은 것도 아닌데 당당하라”며 응원했지만, 당시 그 말은 썩 위로가 되지 않았다. 정작 본인은 바쁜 회사 사정으로 여름휴가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는 처지였다. 온라인 게임에는 충성도 높은 성실한 직원이지만 가정 내 육아 현장에서 그의 존재감은 정말이지… 희미했다.
그 무렵의 나는 영혼이 어디론가 가출한 채, 몸만 기계처럼 움직이고 있는 기분이었다.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아이 반찬을 만들고, 잠에 취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아이를 억지로 깨워야 하는 일은 늘 고역이었다. 안쓰럽고 미안했다. 아이가 남긴 토스트 조각과 뭉개진 과일들을 치우다 말고 싱크대 앞에 서서 성급히 입에 밀어 넣었다. 촉박하게 쫓기는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시간이 미끄러지듯 내 앞에서만 저만치 도망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전쟁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등원을 거부하며 바닥에 납작 엎드린 아이를 보쌈하듯 둘러메고 대로를 달렸다. 간절한 몸짓으로 택시를 잡아 타고 어린이집에 도착하면, 떨어지지 않으려 우는 아이와 제대로 인사할 틈도 없이 선생님께 계주 바통을 넘기듯 아이를 보냈다. 그리곤 쉬지 않고 달려 땀에 젖은 몰골로 지하철 문틈 사이를 다이빙하듯 저돌적으로 비집고 겨우 탑승에 성공했다. 이 상황에서 가방에 달린 분홍색 임산부 배지가 유난히 이질적으로 느껴져 머쓱하기도 했다.
퇴근 후에도 10분 이상의 휴식은 사치였다. 집 앞에서 사 온 김밥 한 줄이 그날의 마지막 식사였다. 앉을 틈도 없이 씻고,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며 식탁 앞에 서서 종이 포장만 벗긴 김밥을 입 안으로 욱여넣었다. 밤늦게까지 엄마를 기다리며 오히려 더 활기를 얻는 아이를 겨우 진정시켜 재우고 나서야 비로소 잠깐의 평화가 찾아왔다. 남편은 대부분 야근이나 회식으로 이미 상황이 종료된 후 귀가하여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과부하된 몸을 이끌고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홀로 걷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날아온 남편의 해외 발령 소식…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했을까.
“헐!!” 이구동성으로 터져 나온 온라인 게임 동료들의 짧은 반응이 그날의 상황을 정확히 요약했다. 세상이 나를 놀리려 짓궂은 몰래카메라라도 찍고 있는 것만 같았다.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상황이 갑자기 내 앞에 들이닥쳤다. 더구나 남편은 세상 누구보다 둘째를 원하던 사람이었다. 이미 육아와 일에 지쳐 있던 나를 꾸준히 설득해 온 것도 바로 그였다. 하지만 정작 육아 현장에서 그의 존재감은 난감하기만 했다. 입으로만 하는 육아는 어디서도 환영받기 어렵다. 그런 그가 이제는 모스크바로… 언제 돌아올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두 번째 육아 전쟁이 코앞인데, 가장 든든한 우군이라 믿었던 남편에게 세게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그래, 이건... 일종의 배신행위였다. 분노와 서운함이 하루 종일 널을 뛰었다. 며칠간 숙고와 팽팽한 부부의 대화가 이어졌지만, 초반에 난색을 보이던 남편은 온라인 게임 선후배들과 몇 번의 면담을 거치는 동안 이미 결심이 선 듯했다. 나도 이성적으로는 남편의 해외 근무 경험이 앞으로 그의 커리어에 도움이 될 거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 쪽도 단 한 번 남편의 존재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기였다. 머릿속으로는 인정해도 막막한 마음은 그렇지 못해 미련을 보인 것이다. 이제는 말을 아끼면서도 은근히 나를 설득하려는 그의 표정을 보며 어느 정도 감이 잡혔다. 이건 내가 돌이킬 수 있는 성질의 일이 아니었다.
고민 끝에 나는 최후통첩을 던졌다.
“가. 하지만 기러기 가족은 절대 안 돼. 갈 거면 우리 네 식구 다 같이 가.”
“응, 그러자. 알았어. 고마워.”
남편은 의외로 빠른 사과와 고마움을 표하며 순순히 수긍했다. 더 말을 보탰다가는 내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걸 알았을 거다. 아니면 그동안 내 마음이 바뀌기를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둘 다였을지도. 우리는 그렇게 잠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임시 휴전에 돌입했다. 며칠 만에 출국 준비를 마치고 거짓말처럼 남편은 먼저 모스크바로 떠났다. 남겨진 우리의 일상도 그리 순탄치 않았지만, 결국 받아들여야 했다.
그 후 둘째 아이 출산 전후 9개월 동안,
홀로 두 아이를 돌보는 일은 여러모로 한계에 부딪혔다. 다른 건 몰라도 동생에게 모유 수유만큼은 절대 허락할 수 없었던 첫째와, 본능적인 식사마저 방해받은 둘째의 팽팽한 대립이 밤 낮 없이 이어졌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아 번갈아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다 보면 감정적 한계치에 다다르기 일쑤였다. 막막함이 목구멍 끝까지 밀어 차오르는 날엔 나도 그 끝에서 아이처럼 엉엉 울어버렸다. 그렇게 셋이 번갈아 울다 보면 베란다 창밖에서 동이 터오기도 했다.
지독한 수면 부족과 번아웃이 나를 집어삼키는 것 같았다. 그 사이 첫째 아이는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고, 어쩌다 집 앞 산바카라길에서 아빠와 함께 있는 또래들을 마주치면 뜬금없이 날 선 태도를 보이곤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빠는 사라졌고, 엄마마저 몇 차례의 입원으로 자리를 비웠다 돌아오니 낯선 동생까지 생겨 있었다. 이 모든 급격한 변화를 어린 아들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길 바라는 건 애초에 무리였지 모른다. 하지만 내 마음이 갈팡질팡하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둘째가 비행기를 탈 수 있을 만큼 자라고 나도 몸을 좀 추스르면 바로 따라가겠노라 단언했지만, 어려도 너무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연고 없는 곳에서 어떻게 지내야 할지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남편은 남편대로 그곳에 적응하느라 분주해 보였다. ‘그래도 말이 통하는 내 나라가 아이들을 키우기에는 더 안전하고 편안한 곳이 아닐까’ 하는 마음도 스멀스멀 피어오르기도 했다.
하루는 이쪽으로 기울었다가, 다음 날이면 다시 주저앉게 되는 끝없는 교착 상태가 이어졌다. 하지만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그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아이들에게는 부모 모두가 곁에 있는 평범한 일상이 간절히 필요해 보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의 결심은 조금씩 더 확고해졌다.
이대로는 정말 안 되겠다고.
각자의 자리에서 간신히 버텨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방향도 기약도 없이 몰아치는 상황을 감내하는 것은 결국 서로에게 상처가 될 뿐이었다.
막막할수록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아이들에게 아빠를 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뒤에 어떤 현실이 기다리고 있을지,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그저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했다는 사실만이 선명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