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험군 산모의 우여곡절 출산기
잠들 무렵이면 아이는 점점 발작하듯 떼를 썼다. 옆에 누워 “엄마 옆에 있어. 괜찮아.”라며 등을 쓸어주고 품에 안아 토닥여도 소용이 없었다.
무엇이 너를 이토록 힘들게 하니. 잠드는 게 무서운 걸까, 아빠가 오지 않아서 불안한 걸까, 엄마마저 없어질까 봐 무서운 걸까. 아니면 이유를 알 수 없는 불편함이 너를 괴롭히는 걸까.
수많은 물음표는 아이의 진땀과 울음 속으로 속절없이 사라졌다.
남편이 떠난 후에도 남겨진 이들의 일상은, 적어도 겉보기에는 아무 일 없는 듯 흘러갔다.
나는 아침이면 같은 시간에 일어나 출근을 서두르고,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낸 뒤 온라인 게임으로 향했다. 퇴근 후에는 다시 육아와 집안일의 굴레로 뛰어들었다. 톱니바퀴처럼 맞물린 하루는 어떻게든 굴러가고 있는 듯 보였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그랬다.
하지만 아이의 본능은 아빠의 빈자리를 누구보다 예민하게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평소 아빠를 곧잘 따르던 아이는 이상하리만치 길게 이어지는 부재에도 아빠를 찾지 않았다. 그런 태연함이 나는 오히려 위태로워 보였다. 언제부턴가 찾지 않는 걸 넘어 간간이 걸려오는 영상 통화조차 짜증 섞인 태도로 거부했다. 아직 어려서 괜찮은 건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조용히 숨을 죽이던 불안은 꾹꾹 눌려 있다가, 어김없이 밤이 되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잠들 무렵이면 아이는 점점 발작하듯 떼를 썼다. 옆에 누워 "엄마 옆에 있어, 괜찮아."라며 등을 쓸어주고 품에 안아 도닥여도 소용이 없었다. 무엇이 너를 이토록 힘들게 하니. 잠드는 게 무서운 걸까, 아빠가 오지 않아서 불안한 걸까, 엄마마저 없어질까 봐 무서운 걸까. 아니면 이유를 알 수 없는 불편함이 너를 괴롭히는 걸까. 수많은 물음표는 아이의 진땀과 울음 속으로 속절없이 사라졌다.
성인들이라면 속시원히 대화라도 나누면 나았겠지만, 아직 어린아이에게 이 복잡한 감정을 말로 풀어내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거의 만삭이 된 몸으로 울며 자지러지는 아이를 진정시키다 보면 나 역시 감정적 한계점에 다다르기 일쑤였다. 마음이 힘든 아이를 온전히 품어주지 못하고 있다는 괴로움과, 이런 우리를 두고 혼자 가버린 남편에 대한 원망이 치밀어 올랐다. 쉽게 잠을 이룰 수 없는 피로한 밤들이 겹겹이 쌓여만 갔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큰아이의 첫 번째 어린이집 수료식이 다가왔다.
생후 15개월, 복직을 위해 처음 아이를 맡기던 날의 걱정과 미안함이 무색할 만큼 아이는 1년을 훌륭히 버텨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날만큼은 함께 참석해 축하를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북적이는 인파와 소음이 낯가림 심한 아이를 자극했는지, 아이는 겁먹은 눈으로 이리저리 둘러보다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큰일이다.' 싶어 얼른 달래기 시작했지만 눈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결국 나는 아이를 안은 채 인적이 드문 행사장 맨 뒷벽에 기대어 섰다.
그때였다. 아랫배에 뻐근하고 날카로운, 설명하기 어려운 낯선 통증이 불현듯 치고 올라왔다.
놀라 급히 배를 문지르며 몸을 뒤척여봤지만, 이내 수축되는 통증이 반복되자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너무 무리했나' 하는 후회가 불쑥 솟아올랐다. 잠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었지만, 다행히 행사 마무리 멘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금만 더 참자… 조금만 더…’를 되뇌며 간신히 허리를 세우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선생님들과 기념사진을 남기고 감사 인사를 건넨 뒤 서둘러 버스에 올랐다. 다음 날이 마지막 정기 검진일이니 그때까지만 버티자며, 올라오는 불안을 애써 눌러 담았다.
다음 날 아침, 밤새 간헐적인 통증을 견디며 간신히 대학병원 진료실 앞에 섰다. 전날부터 기분 나쁜 통증이 반복되어 예감이 좋지 않았다. 접수처 간호사는 파리한 내 안색을 보자마자 상태를 물었다. 몇 번이나 안정을 취하고 다시 측정해 보았지만, 그나마 낮게 나온 혈압이 165/110mmHg. 위험 수치였다. 굳은 표정으로 초음파와 차트를 번갈아 보던 교수님의 목소리가 진료실 안에 단호하게 울렸다.
“엄마, 오늘 집에 못 가요. 지금 당장 입원해.”
가장 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큰아이를 챙겨야 하니 잠시 집에 들러 짐이라도 싸 올 수 있게 해달라고 사정했지만, 교수님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 혈압으로는 집에 가는 길에 아이를 낳을 수도 있다는 말에 나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둘째가 일찍 세상에 나오는 일만은 막고 싶어 그토록 애를 썼건만, 이제는 아무것도 내 뜻대로 되돌릴 수 없었다.
일단 진료실을 나서자 문 앞에 있던 다른 간호사가 입원 수속 전에 가야 할 곳을 안내하며 프린트물을 건네주었다. 하지만 나는 종이를 받아 들고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 정작 어디부터 가야 할지 전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혼자였기에 수속부터 입원까지 모든 과정을 스스로 감당해야 했다.
인파로 붐비는 대낮, 병원 로비 한가운데서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서 있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막막함이 온몸을 덮쳐 오는데도 나는 우두커니 서서 발을 떼지 못했다.
얼마 동안이나 그러고 있었을까.
‘이건 현실이야. 네가 해야 해. 얼른.’
마음속에서 나를 꼬집듯 다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하나씩 해결해 가야 했다.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친정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상황을 설명하고, 큰아이를 며칠간 맡아 달라고 간곡히 부탁드렸다.
“걱정 말고 네 몸이랑 둘째만 생각해.”
덜덜 떨리는 내 목소리와 대비되는 엄마의 단호한 말에 진공 상태 같던 정신이 조금씩 돌아왔다. 온라인 게임에도 상황을 전하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양해를 구했다. 죄송하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참담했다. 마지막으로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담담하려 했지만 통화 연결음 끝에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 지금 입원해… 애가 나올 수도 있대… 아직 안 되는데, 어떡해….”
“여보, 미안해. 정말….”
남편은 다른 말은 잊은 듯 사과만 반복했다.
“이럴 때 옆에 없어서 미안해… 그래도 아무 일 없을 거야. 거기 선생님들이 한국에서 제일 전문가잖아.”
다행히 나보다 침착한 남편의 현실적인 위로는 아이러니하게도 마음을 다잡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제야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이 국내 최고의 의료진이 있는 병원이라는 사실이 상기되었다. 조금씩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래,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눈앞에 놓인 일들을 하나씩 해나가는 것뿐이었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병원 6층에 있는 산부인과 응급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입원 수속을 마치고 마침내 내 침대를 배정받았다.
그 후... 고위험 산모 병동에서의 일주일은 고독한 싸움이었다.
조기 진통을 감지하기 위한 장치를 배 위에 달고 24시간을 누워 있어야 했고, 화장실에 가는 것조차 간호사의 도움 없이는 어려웠다. 병실의 불 꺼진 밤이 되면, 이따금씩 들려오는 다른 산모들의 숨죽인 흐느낌이 마치 내 마음 같았다.
서로에게 함부로 위로를 건네지도, 바라지도 못하는 마음.
다만 처한 상황은 달라도 태아의 무사함을 바라는 마음만큼은 모두 같았으리라. 아침이 되어 보호자들이 산모의 식사를 챙기는 동안, 나는 홀로 링거대를 끌고 나와 식판을 정리했다. 친정 부모님도 큰아이를 돌보느라 입원 첫날 필요한 물품을 전해 주러 잠시 들르셨을 뿐, 계속 곁에 계시기는 어려웠다.
며칠이 지나도록 남편 없이 홀로 누워 지내는 내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다른 산모들의 보호자들이 가끔 말없이 내 식판을 대신 치워 주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고마운 마음에 고개를 숙이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복잡한 감정이 일었다.
입원한 지 엿새 정도 지났을 무렵, 갑자기 퇴원 날짜가 잡혔다. 내 상태가 크게 호전된 것도 아니었지만, 아마도 쏟아지는 응급 산모들 때문이었으리라 짐작할 뿐 정확한 사정은 알지 못했다. 그저 깨끗이 씻고 싶었고, 큰아이를 볼 수 있다는 기쁨에 들떠 무작정 좋다고만 했다.
하지만 집에 돌아온 날 밤, 하혈을 확인하고 다급히 다시 응급실로 향했다. 이렇게 빨리 상태가 악화될 줄은 몰랐다. 병실 침대 옆으로 이름 모를 수액들이 잔뜩 걸리고 의료진이 분주하게 오가며 상태를 체크했다. 가만히 누워 있어도 온몸이 덜덜 떨려왔다.
“지금은 신생아 중환자실(NICU)에 자리가 없으니 아직 출산하면 안 돼요. 어떻게든 버텨야 해요.”
배에 연결된 선들을 하나하나 살피던 전공의 선생님이 의미심장한 말을 툭 던졌다. 그 말에 덜컥 겁이 났다. 그렇게 나는 또다시 병실에 누워 눈물바람으로 며칠을 숨죽여 지내야 했다.
어느새 36주를 넘겼다.
의료진의 말 한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듯한 날들 속에서도 아이는 엄마 뱃속에서 꿋꿋이 버텨주었다. 그래도 아직은 희망이 있었다. 불룩하게 솟은 배를 어루만지며 하루만 더. 딱 하루만 더. 그렇게 간절히 되뇌며 버텨온 날들이 어느새 여러 날로 쌓여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사무치게 고마웠다.
며칠 뒤 새벽 3시경, 잠결에 어디선가 ‘퍽’ 하는 소리에 눈이 번쩍 뜨였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양수가 터진 것이었다. 두 번째 출산은 초산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되었다. 산통은 무자비하고 거침없이 밀려왔다. 거대한 화물트럭이 배 위를 짓누르는 듯한 고통 속에서 수술실로 향했다. 두 번째여도 무섭기는 매한가지였다. 비명을 참으려 꾹 다문 입 사이로 자꾸만 신음이 새어 나왔다. 차가운 수술대 위, 제왕절개를 위한 하반신 마취 주사의 뻐근한 통증을 견디며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배 아래에서 힘겹게 무언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더니 잠시 후 힘찬 아기의 울음소리가 수술실을 가득 채웠다.
드디어… 나왔다...
“엄마, 고생했어요.”
그 한마디에 비로소 안도감이 밀려왔다.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려 시선을 위로 향하자, 수술 마스크 위로 웃고 있는 담당 교수님의 눈이 보였다. 간호사는 내가 아이의 얼굴을 볼 수 있도록 천에 싸인 작은 아이를 내 곁에 눕혀 주었다.
나는 옆에 누운 아이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너도 고생했어. 너무 고마워.”
비록 열 달을 다 채우지는 못했지만, 3.1kg의 건강한 둘째가 세상에 나왔다.
폭풍 같은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 견뎌낸, 길고도 짧았던 사투의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