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의 모스크바 반년 표류기
몇 시간 후면 그는 홀로 세레메티예보(SVO)행 비행기에 올라 한국을 떠날 것이다. 집에는 7개월 차 태아를 품은 나와 이제 갓 두 돌 된 아이, 단둘만 남겨졌다. 출국 날 아침, 겨울 날씨 탓에 해가 들지 않는 집 안 공기는 유난히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남편은 미안함 때문인지 별다른 말 없이 홀로 부산스럽게 캐리어와 가방을 옮겼다. 힐끗 벽시계를 확인한 그가 굳은 표정으로 현관문을 등지고 섰다. 몇 번이나 어색하게 입을 달싹이다 작은 목소리로 겨우 한마디를 뱉었다.
“여보... 이제 갈게.”
“응, 그만 가.”
건조하고 간결한 작별 인사였다. 함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복도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집에는 아이가 자고 있기도 했지만, 솔직히 말해 나는 1층 공용 현관까지 같이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몸은 아직 남편의 부재를 인정할 준비가 되지 않았던 탓이다.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너머로 작게 손을 흔들던 남편이 사라지자, 이제 조금씩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홀로 돌아온 집 안에는 먹물을 끼얹은 듯한 적막이 찾아왔다.
바닥과 소파 위에 흩어진 옷가지를 정리하려 몸을 움직이다 갑자기 눈물이 차올랐다. 이성은 담담하라 재촉했지만, 생리적 반응은 더 빠르고 솔직했다. 결국 아무것도 정리하지 못한 채 안방의 온기가 남은 이불속으로 몸을 웅크려 넣었다. 아이는 양팔을 위로 올린 채 규칙적인 숨을 내쉬며 곤히 자고 있었다. 혹여나 아이가 깰까 봐 애써 숨을 죽인 채 흐느끼면서도, 내 손은 본능적으로 아이의 가슴 위를 토닥이고 있었다.
이 막막한 슬픔과는 별개로, 익숙하게 아이를 어르는 순간마다 마음 한구석이 먹먹해져 왔다. 그것은 앞으로 내게 닥칠 일상의 예고편과도 같았다.
나는 소위 말하는 ‘불안 계열’의 사람이다. 아직도 슬롯생활을 할 때는 애써 어떤 사안 앞에서 담담하려고 하지만, 스스로 알고 있다. 변화와 함께 찾아오는 예상치 못한 위기가 두려워 늘 플랜 B를 세우고 스스로를 볶아 대며 대비바카라을 세우려 남몰래 끙끙대기 일쑤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거대한 명제 앞에서 공들인 계획은 수시로 휴지 조각이 되곤 했다.
돌이켜 보면, 우리가 이 시기에 모스크바라는 도시와 인연을 맺게 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쯤 되면 ‘인생 계획’이란 내게 무용한 단어에 가까웠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어떻게 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저 ‘서로의 곁에 있어야 한다’는 단 하나의 결심에 모든 것을 걸었을 뿐이다. 이런 막무가내 베팅이라니.
갑작스러운 남편의 발령, 반복된 나의 입퇴원, 힘겨운 상황 속에서 태어난 둘째, 그리고 아빠의 부재 속에서 나날이 예민해지던 첫째 아이까지. 우리가 미리 알고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은 거의 없었다. 그저 의도치 않은 변수가 불쑥 튀어나올 때마다 온 힘을 다해 그 자리를 버텨 냈을 뿐이다.
막상 모스크바에 건너가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런데도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랬느냐고 묻는다면 지금도 잘 모르겠다. 가끔은 어떤 합리적인 논리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 있지 않은가.
그렇게 결심한 뒤, 우리는 다시 한자리에 모이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네 식구가 모스크바에서 함께 살기까지 거쳐야 했던 과정은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았다. 지나고 보니 차라리 초반에 짐을 싸는 일은 양반이었다 싶다.
비행기에서 10시간 넘게 두 아이와 씨름하는 동안, 나는 낯선 땅을 밟아 보기도 전에 이 결정이 과연 옳았는지 몇 번이고 회의가 들었다. 넋이 나간 채 겨우 게이트를 빠져나와 남편과 감격스럽게 재회했을 때만 해도, 드디어 가장 큰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완전한 착각이었다. 날것 그대로의 모스크바 살이는 바로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따라라라 따~
그렇게 도착한 숙소. 집 문을 여는 순간 익숙하게 맴도는 한 예능 프로그램의 삽입곡을 자연스럽게 흥얼거렸다. 나름 깔끔한 외관과 기본 세팅된 가구들을 보고 안심이 되어 남편에게 고마움을 느끼려는 찰나였다. 하지만 뒤이어 나를 반긴 건 바닥을 너울너울 굴러다니는 먹구름을 닮은 거대한 먼지 덩어리들이었다. 둘째를 메고 있는 아기띠를 풀어놓을 장소조차 마땅치 않아 난감했다. 몇 시간 동안 착용한 아기띠에 허리가 끊어질 듯한 통증을 느끼며 나는 되뇌었다.
‘괜찮다. 아무것도 안 보인다. 무사히 도착했으면 됐다.’
'그래, 일단 우리가 다시 만났다. 그거면 된 거다.' 일단 앞으로의 일은 내려놓기로 했다.
내일은 모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다음 한 발자국만 내딛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응바카라이었다.
누군가는 묻는다. 왜 그 고생을 자처하며 아이들을 데리고 낯선 땅으로 향했느냐고. 경제적인 손익만 따져보아도 남편을 기다리며 한국에 남는 게 훨씬 이득이었을지도 모른다. 며칠 동안 아이가 아파서 걱정되거나, TV에서 심상치 않은 뉴스를 접하며 초조하게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던 날에는 불현듯 ‘여긴 한국이 아니지’라는 서늘한 실감이 등줄기를 스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단 하나의 명확한 기준이 있었다.
완벽은커녕 허점투성이인 여정이었지만, 우리는 매일 한집에서 밥을 먹고 서로의 온기를 확인하며 그 시간을 함께 건너왔다. 누가 시작했는지도 모를 별것 아닌 장난에도 한참을 키득거리며 웃고, 힘껏 엄마 아빠를 부르며 환하게 달려와 안기는 아이들의 포옹을 매일 누릴 수 있었다. 옹알이를 하던 아이가 조금씩 목을 가누고 눈을 맞춰 오던 순간도 함께 기억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 자라나는 매 순간을 함께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돌이켜 보면 여한 없이 고마운 시간이었다.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비록 그 시도가 좌충우돌과 후회로 점철될지라도, 그 모든 순간은 우리 ‘가족’을 단단하게 하나로 묶는 힘이 되어 주었다.
이제 그 반년 남짓한 모스크바 살이의 기록을 꺼내 보려 한다.
정갈하게 정리된 ‘육아 인플루언서’들의 세련된 기록은 아닐지라도,
어설퍼서 더 웃음이 나고 진솔해서 더 소중한 우리 가족만의 이야기를 이제 시작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