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오아시스, 안탈리아#3

우리가 발견한 그 바다 앞에서

by봄날의 곰

하룻밤 사이 생겨난 난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고, 우리는 기분 좋게 시내 구경에 나섰다.


택시 기사의 쾌활한 인사를 시작으로, 오랜만에 회색빛 먹구름과 눈보라에서 벗어난 온화한 기후 안에 있으니 뭐든 다 좋았다. 따뜻한 햇살 아래 창문을 열고 달리는 기분이 상쾌했다. 적당히 따뜻한 공기, 살짝 열린 창문 너머로 불어오는 솔솔바람, 맑게 갠 하늘을 한없이 보고 있자니 자꾸만 실실 웃음이 나왔다. 역시 날씨는 사람의 기분을 좌우하는 데 지대한 지분이 있다. 앞 좌석에 앉은 남편이 셀카로 담아낸 네모난 프레임 속 편안하게 웃고 있는 표정들은, 그날의 따뜻하고 느긋한 분위기를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다.



평일 오후라 다행히 길은 혼잡하지 않았다. 호텔을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경이 탁 트인 마리나 항구 근처 공화국 광장 앞에 도착했다. 간혹 불어오는 바람이 한 번씩 머리카락을 자유자재로 흩뜨렸지만, 따스한 햇살 덕에 걷기에는 더없이 좋았다. 겨울 비수기였음에도 이어지는 시장통로와 길거리는 제법 많은 관광객들로 활기를 띠고 있었다. 역시 휴가지에서는 앞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기념품과 옷가지를 소개하며 흥정을 유도하는 상인들은 물론 그 앞에서 기꺼이 지갑을 여는 이들의 표정도 모두 밝았다.


안탈리아 공화국 광장과 그 주위에 군밤을 간식거리로 파는 상인들이 보였다.




오랜만에 별다른 목적지도, 서두를 이유도 없이 천천히 걸었다. 그래, 이 여유가 그리웠나 보다. 두리번거리며 걷다 보니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가 군데군데에서 군밤을 파는 상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관심을 보이자 상인들은 맛을 보라며 갓 구운 따뜻한 군밤 몇 알을 아이 손바닥 위에 올려주었다. 이미 호텔에서 조식과 간식을 잔뜩 먹고 나왔지만, 조금 걷다 보니 마침 출출해지던 참이었다. 칼집을 내어 벌어진 껍질 사이로 노르스름하게 봉긋 솟은 밤의 속살이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첫째는 연신 맛있다며 입가에 검은 부스러기를 묻힌 채 입을 오물거렸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 아이는 얼른 검지 손가락을 세우며 “또 주떼요!” 하고 외쳤다. 결국 한 봉지를 더 사서 세 사람이 느긋하게 나눠 먹으며 길을 걸었다. 알맞게 익은 통통한 밤이 입안에서 부서지며 퍼지는 구수한 향이 참 좋았다. 언젠가 한국의 어느 사찰 앞 주차장에서 사 먹었던 군밤 맛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이 낯선 길 위에서 왜 자꾸 한국이 떠오르는지 스스로도 의문이었다. 의아한 마음과 별개로 새로운 풍경 앞에서 옛 기억이 자꾸만 겹쳐졌다.


로마 하드리안 황제의 안탈리아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서기 130년에 만들어졌다.


지중해의 따스한 햇살 아래 유모차를 슬슬 밀며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몸의 긴장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광장에서 조금 더 걸어가자 옛 로마 황제의 방문을 기념해 세워졌다는 하드리아누스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현대의 도심과 고대 구시가지를 가르는 경계처럼 서 있는 이 유적지 앞은 이미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2000년의 시간 속에서도 위용을 잃지 않고 우뚝 솟아있는 존재감만으로도 안탈리아가 얼마나 역사적 의미를 갖는 도시인지 알 수 있었다.



입구 아래쪽에 서서 생각보다 큰 규모에 고개를 뒤로 꺾어 "오~"하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수십 세기를 그 자리에서 버텨온 돌문이 뿜어내는 묵직한 기운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 옛날 사람과 거대한 수레들이 한데 엉켜 혼잡하게 오갔을, 오랜 세월에 닳아 움푹 파인 돌바닥 위에 가만히 발을 맞대고 서 있었다. 그러고 있으니 지금 이 도시가 수천 년 동안 차곡차곡 쌓아 올린 시간의 층위에 나도 함께 서 있는 것만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문득 '우리가 머무는 이 시간은 훗날 어떤 기록으로 남을까.’ 그런 생각이 스쳐갔다. 문명의 기술도 없던 시절, 이 거대한 건축물을 올리기 위해 셀 수없이 많은 이들의 노고와 희생을 기억하는 이들은 이미 세상에 없다. 돌바닥 위에 깊게 남은 자국과 기록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으로 이 자리에 서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전쟁을 거치며 파괴와 재건의 역사를 몇 번이나 견뎌냈을까.



흉터처럼 깊게 새겨진 바닥면을 따르는 홈 자국과 살짝 울퉁불퉁해진 표면이 저마다 사연 있는 고난의 시간을 말해주는 듯했다. 땅을 딛고 굳건하게 서 있는 저 돌기둥 하나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밟고 올라섰을 계단 위에도 수천 년의 시간과 이름 모를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칼레이치 골목 안을 달리는 첫째 아이의 뒷모습


칼레이치의 골목은 지중해의 태양빛과 오래된 건축물들이 어우러져 그림 같은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시간이 늦어질수록 자연이 내뿜는 빛과 건물에 드리운 그림자가 좁은 골목 곳곳에 짙은 음영을 만들어냈다.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듯한 착각이 들 만큼 고즈넉하고 오래된 멋이 있었다. 골목 곳곳에는 전통 소품들을 파는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즐비했다. 과연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을까 궁금해지는 오래된 외관을 지닌 카페들도 눈에 띄었다.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시간의 길 위로 수많은 사람들이 오갔을 좁은 골목을, 첫째 아이는 신이 난 듯 앞장서 뛰어갔다. 남편과 나는 그런 아이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언젠가는 아이들이,
저렇게... 내 앞을 앞질러 멀어져 가겠지.


한껏 신이 나 가벼운 몸짓으로 우다다 앞으로 뛰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그런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고 있는 내가 오히려 놀라웠다. 다행히 그렇게 그려지는 미래가 아쉽다기보다는, 지금 숨을 내쉬고 걷는 것처럼 아주 당연하게 느껴졌다. 원래부터 잠시 내 곁에 머물다가, 때가 되면 그렇게 떠나기로 예정된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처럼. 그때, 마음에 맺혔던 그 잔상은 한동안 참 묘한 여운으로 남았다.





나는 어려서부터 줄곧 사람에게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심리학이 늘 궁금했다. 상담심리를 전공하기로 결심한 이후로는 사람의 마음과 행동을 이해하고 돕는 영역에 발을 내딛고 있었다. 엄청난 부나 명예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취미가 생업이 되면 더 이상 그것을 사랑할 수 없게 된다'던 누군가의 말은 거진 틀리지 않았다.



막상 대학원을 졸업하고 필드에 나와 맞닥뜨린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이 길을 놓지 못했던 이유는 분명했다. 이 지식과 경험이 언젠가 내 삶을 지탱하는 든든한 주춧돌이 되어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고 인생에서 또 다른 역할들을 맡게 될 때, 세상을 조금 더 균형 있게 바라볼 수 있는 나만의 시선과 기준이 되어주리라 믿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름대로 지켜왔던 신념과 전문 지식은 막상 내 아이를 키우는 현실 앞에서 이따금 무력해지곤 했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말처럼, 대상이 너무 가까워지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법이었다.



철석같이 믿었던 이론들은 점차 불확실한 질문으로 변해갔고,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순식간에 모르는 영역으로 넘어가 버렸다. 예상치 못한 시행착오 속에서 피어오르는 두려움은 그나마 남아 있던 자존감마저 뒤흔들었다.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채 오롯이 혼자 견뎌야 했던 자괴감은 어느덧 천천히 나를 잠식해 갔다.


아이들과 함께하며 기쁘고 충만했던 순간이 왜 없었겠는가.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첫아이를 낳은 이후 나는 그 기쁨의 크기보다 어쩌면 더 자주, 나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마주해야 했다. 겉으로는 들키지 않으려 애써 태연한 척 속으로만 동동거렸지만, 마음 한편 깊은 곳의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당당히 떼어내고 싶었던 이마 위의 ‘초보 엄마’라는 딱지를, 나는 좀처럼 떼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있는 줄도 몰랐던, 결코 마주하고 싶지 않은 내 밑바닥과 수시로 조우했다.


나는 이런 내가 부끄러웠다.



영감을 주는 엄마까지는 아니더라도, 원칙을 지키면서도 따뜻한 엄마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엄마가 되는 길은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좀처럼 닿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런 패잔병 같은 몰골을 하고도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렀다. 온몸이 쑤시고 아파도 하루 종일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을 꾸역꾸역 해내야 했다.



그렇게 버티다 한 번씩 남편과 아이가 무심코 던진 잔소리나 소소한 투정에 그동안의 노력이 우스울 정도로 부질없게 느껴지는 날도 있었다. 서운함이 켜켜이 쌓여 마음 한구석에 앙금으로 굳어질 때면, 나라는 존재가 한없이 무가치하게 느껴지곤 했다. 모든 걸 내려놓고 어디론가 훌쩍 사라져 버리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어디, "나" 없으면
너희가 단 하루라도 버티나 보자!!!

속으로 구시렁거리다가도, 결국 그 얼굴들을 가만히 바라보며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물론 나가고 싶어도 모스크바라는 거대한 도시 안에서 딱히 갈 데가 없었다는 건 안 비밀이다. 그렇게 나는 또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하고 그다음 날을 살아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날들을 '끙차' 소리를 내며 하나씩 넘어오다 보니, 어느새 그 수많은 시간도 과거의 한 장면으로 남아 있었다. 뜬금없지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남기고 있는 이 글도 언젠가 수백 년, 아니 수천 년 뒤 누군가에게 '21세기 초 어느 주부의 푸념 섞인 일상 기록'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질 수 있을까.

지나온 시간들을 가만가만 짚어보다가, 실없는 농담이라도 떠올린 사람처럼 피식 웃어버렸다.


“엄마, 빨리 와!”


저 앞에서 들려오는 아이의 재촉 소리에 어느덧 다시 현실로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의상과 전통공예품을 파는 오래된 상점과 빈티지 카페를 둘러보느라 자꾸만 멈춰 서는 내 발걸음을 재촉하듯, 아이는 어느새 저만치 앞서가 있었다. 앞서간 아이를 놓치지 않으려 차오르는 숨을 고르며 걸음을 옮겼다. 잠시 되돌려 놓았던 시곗바늘에서 빠져나온 시간 여행자가 되어, 그렇게 아이가 먼저 지나간 길을 따라 걸었다.




튀르키예 안탈리아의 칼레이치 구시가지 항구(Kaleiçi Yat Limanı / Old City Marina)


나뭇줄기처럼 길게 뻗은 좁은 골목 끝에 다다르자, 거짓말처럼 탁 트인 칼레이치 마리나 항구가 펼쳐졌다. 절벽 아래 옹기종기 어우러진 주황빛 지붕과 정박한 요트 너머로 푸른 바다가 아득히 넘실거렸다. 과거와 현재, 자연과 사람의 숨결이 다정하게 얽혀 살아가는 풍경이었다.



남편과 나는 약속이라도 한 듯 말을 잊은 채 나란히 서서 그 정경을 눈에 담았다. 불어오는 온화한 바닷바람은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고 내 어깨와 목덜미를 다독여 주었다. 그저 그렇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같은 곳을 바라보며 이 자리에 함께 서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 순간이 더없이 특별하고 귀한 선물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흔히들 우주나 바다 한가운데 서면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깨닫게 된다고 한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 그 앞에 서니 그랬다. 여행길에서 마주한 광활한 풍경 앞에서는 그동안 끌어안고 있던 고민들이 한없이 작아졌다.


‘나는 오늘 좋은 엄마였을까.’

‘아이가 보내는 작은 신호를 놓치진 않았을까.’

‘내 성급한 마음에 아이에게 상처를 준 건 아닐까.’


그동안 자신을 끊임없이 재단하던 수많은 질문들이 드넓은 바다 앞에서 이내 힘을 잃고 조용히 사그라들었다. 파도는 저마다의 모양으로 아무 말 없이 밀려왔다 물러가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 무심함만으로도 "그거면 됐다"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내가 잘 해내고 있는지, 어느 길로 가고 있는지 물을 필요조차 없었다. 아득한 순간에도 시간은 그저 묵묵히 흘러간다.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면, 한때 나는 인간의 의지와 불굴의 노력이 삶의 최우선이라 믿었다. 그래서 스스로 선택하고 온 힘을 다해 쏟아부은 결과가 뜻대로 되지 않을 때면, 그 모든 것이 내 부족함 탓인 것만 같았다. 조금만 더 잘하라며 스스로를 가혹하게 몰아세우곤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아차' 싶었다. 세상의 모든 일이 오롯이 내 힘과 의지만으로 움직이지는 않는다는 것을. 때로는 거부할 수 없는 삶의 소용돌이 앞에서 그저 가만히 온몸을 맡겨야 하는 순간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힘을 완전히 빼버린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길이 비로소 열릴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 때로는 이토록 무력해져도 괜찮다는 담담한 위안이 바닷바람을 타고 가만히 귓가를 맴돌았다.





문득 모스크바로 향하던 첫 여정이 떠올랐다. 아이들이 그곳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타국에서 우리 가족의 마음이 어긋나면 어쩌나 노심초사하던 날들이었다. 훗날 뼈저리게 후회하는 나 자신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도 수시로 밀려왔다. 하지만 살다 보면 굳이 동전의 앞뒷면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우리는 각자의 갈림길을 지나 하나의 선택 앞에 섰다. 그렇게 도착한 낯선 도시에서 우리는 울고 웃으며, 때론 다투고 화해하며 치열한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정답을 알고 시작한 길이 아니었다. 그저 그 순간, 우리 가족이 원한다고 느꼈던 방향을 선택했을 뿐이다.

나는 파랑새를 쫓는 치르치르와 미치르처럼 형체조차 불분명한 정답을 손에 쥐려 애썼다. 아무리 눌러앉혀도 자꾸만 솟아오르는 불안을 잠재우려 늘 또 다른 대비바카라을 찾아 헤맸다. 특히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면 더 그랬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늘 알고 있어야 하고, 감정을 유연하게 조절하며, 어떤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는 원칙을 가져야 한다고 스스로를 채근했다.

그러다 보니 정작 아이의 눈을 온전히 바라보기보다, 자꾸만 내 안의 부족함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실은,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우리가 마주했던 바다 위 파도가 저마다 조금씩 다른 형태로 밀려오듯, 삶에도 저마다의 속도가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날은 성큼성큼 잘 걸어가다가도, 어떤 날은 제자리에서 한참을 머물곤 한다. 때로는 조금 돌아갈 수도 있고, 가만히 서서 쉬어갈 수도 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마음을 다하되, 흘러가는 삶을 억지로 거스르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닐까.


그저 우리가 함께 걸어가고 있다면, 그곳이 곧 우리의 길이 될 테니까.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 있었다. 가라앉을 채비를 마치고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에 괜히 눈이 부셨다. 핑 도는 감정에 코끝이 찡해졌다. 눈물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코를 '흡' 하고 들이쉬며, 옆에 선 남편과 아이들의 작은 손을 찾아 꼭 쥐었다.


"당신, 혼자서 뭐 해?"


혼자만의 감정에 푹 젖어 있는 내 모습이 어이없었는지, 남편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물어왔다.


아, 쫌! 그냥 모른 척 좀 해주지.


아이들이 훗날 이 시간을 어떻게 기억할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밀물에 지워지는 모래 위 발자국처럼 아득히 희미해질지도 모른다. 어쩌면 마치 없었던 일처럼 마음속에 남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우리는 정답을 찾으려 애쓴 것이 아니라, 그저 서로의 손을 잡고 의지하며 함께 걸어왔으니까.



그 바다 앞에 서서, 나는 처음으로 조금 천천히 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남들과 다른 속도여도 괜찮다고, 다른 방식으로 머물러도 아무 상관없다고.

파도가 제 속도로 밀려왔다 다시 돌아가듯, 우리 앞에도 오롯이 우리만의 바다가 펼쳐져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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