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다스비다니야~모스크바

전격 귀국, 이건 007 영화가 아니잖아!

by봄날의 곰


'철컥' 열쇠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남편이 현관으로 들어서는 기척이 들렸다. 그의 어깨 위에 내려앉은 촘촘한 눈송이를 보니, 오후 내내 내리던 눈은 아직도 그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남편은 코트를 벗어 현관 옆 옷걸이에 걸고, 한 손으로 머리 위에 내려앉은 물기를 가볍게 털어냈다. 그러고는 곧장 손에 든 가방을 뒤적이더니 인쇄된 종이 한 장을 꺼내 내게 건넸다.


"오늘 비행기 날짜가 나왔어."


내 앞에 내밀어진 종이 위에는 귀국 일정과 비행기 예약 정보가 적혀 있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전혀 가늠할 수 없다더니, 오늘이었구나. 그간의 대화를 미루어 볼 때 내가 귀국일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제법 서두른 기색이었다. 손에 들린 종이에서 바깥의 차가운 기운이 그대로 묻어나는 듯 서늘했다.


"어… 나왔네. 다행이다."


혼자 중얼거리듯 말하면서도 나는 차마 웃지 못했다. 그저 프린트된 날짜를 한참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 진짜 가네....'


그저 그런 생각만 들었다. 어떤 감정이 들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듯 잠시 혼란스러웠다. 귀국 날짜를 받아 들면 내심 엄청 기뻐할 줄 알았는데 남편은 나의 미적지근한 반응이 오히려 의아한 듯 조심스레 눈치를 살폈다. 좋은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한.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다. 그토록 기다려온 귀국인데 왜 이리 마음이 숭숭하고 산란해지는지. 그토록 돌아가고 싶어 했는데…. 문득 날짜를 헤아려보니 이곳으로 떠나온 지도 어느덧 반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있었다.






모스크바에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자 하루가 멀다 하고 눈이 내렸다.

그토록 엄청난 눈이 퍼부어도 눈발이 잦아들기 무섭게 거리가 깨끗해지는 모습은 매번 신기했다. 다른 행정 처리는 차치하더라도, 제설 작업만큼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신속하고 철저했다.



첫째 아이를 데리러 유치원에 갈 때만 해도 길가에 소복이 쌓여 있던 눈이, 아이의 손을 잡고 나오는 그 짧은 사이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곤 했다. 바닥을 물들인 짙은 물자국이 아니었다면, 방금 내가 헛것을 본 게 아닌가 싶었다.

정면에서 바라본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 모스크바


아이들과 지하철역으로 향하며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 앞을 막 지나던 참이었다. 정교회 건물 앞 넓은 인도 위에는 아침부터 내린 눈을 치우기 위해 거대한 제설차가 위용을 뽐내며 서 있었다. 잠시 쉬는 중인지 멈춰 서 있는 제설차와 장비들을 보며 첫째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연신 “우와~ 멋져!! 진짜 크다!”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마침 운전석에 타고 있던 작업자 세 명이 우리를 발견하더니 반갑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나와 아이도 놀이동산 퍼레이드 행렬을 향해 환호하듯 덩달아 손을 흔들었다. 밑에 서 있는 우리가 보였는지, 그중 한 명이 창문을 아래로 바짝 내리며 큰 소리로 말을 건네왔다.


“니하오!!~ 재팬?”


엥? 중국이면 중국이고 일본이면 일본이지, 이건 짜장도 짬뽕도 아닌 무슨 해괴한 조합이란 말인가. 반갑게 손을 흔들던 마음이 순간 김 빠지게 식어버렸다. 별일 아닌 듯 넘길 수도 있었지만, 서로 다른 나라를 한데 묶어 짐작하듯 던져보는 그 태도에 괜히 욱하는 마음이 치밀었다. 평소에는 훨씬 더한 불의도 허허실실 넘기며 사는데, 이상하게 그날은 그냥 지나쳐지지 않았다. 타국에서는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던 옛말이 틀리지 않았다.


나는 표정을 굳히고 단호한 목소리로 외쳤다.


“녯! 코레아!” (아니요! 한국인이에요!)

“아~ 아, 코레아~!” (아~ 아~ 한국인!)


건성건성 귀찮다는 듯 손을 바깥으로 내저으며 알겠단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오답을 내놓고도 미안해하는 기색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그저 자기들끼리 낄낄거리며 무어라 두런두런 말을 주고받을 뿐이었다. 지적을 받고 곧바로 정정하기는 했지만, 특유의 껄렁한 말투와 우리를 눈앞에 두고도 아랑곳없이 시시덕거리는 태도를 보고 있자니, 대놓고 사람을 세워둔 채 놀리는 것 같아 썩 유쾌하지 않았다.



나는 몸을 홱 돌려 입을 꾹 다문 채 아이의 손을 단단히 잡아끌며 서둘러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제설차 구경에 여념이 없던 아이는 종종걸음으로 내 보폭을 따라오며 “엄마, 왜 그래? 왜?” 하고 몇 번이나 물었다. 무어라 해야 하나. 나는 아이에게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못했다. 뒤따라오듯 따라붙던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정말 그 순간 내가 느낀 것이 인종차별이었나. 스스로도 내 마음을 온전히 가늠하기 어려웠다. 왜 이토록 답답하고 불편한 감정이 치미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 이런 순간에야 불쑥 깨닫게 되는 걸까. 우리가 이 땅에서는 그저 누군가에게 함부로 대해질 수도 있는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자주는 아니었지만 한 번씩 이런 황당한 일을 겪고 나면, 어서 빨리 내 나라로 돌아가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떠날 날을 떠올리면, 모스크바에서 차곡차곡 쌓아 올린 시간과 길 위의 추억들, 정들었던 이들에게 기약 없는 작별을 고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멈칫하곤 했다. 한국이 그리우면서도 이곳을 떠나는 게 아쉬웠고, 돌아갈 날을 기다리면서도 두고 떠날 것들이 마음에 걸려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이렇게 갈팡질팡 흔들리던 마음은 그래도 귀국 날짜가 확정되자 신기하게도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다. 손에 쥔 프린트물에 찍혀 있는 숫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귀국일까지 남은 시간은 단 3주. 이제 정말 돌아가는 것이었다.



날짜가 또렷하게 찍힌 비행기 티켓을 들고 서 있으면서도, 지금 드는 이 감정이 돌아간다는 기쁨인지, 아니면 남겨둘 것들에 대한 섭섭함인지 스스로도 가늠하기 어려웠다. 원래 있던 삶의 궤도로 돌아간다는 안도감도 잠시, 돌아가자마자 마주해야 할 현실의 체크리스트가 머릿속에서 두서없이 떠다녔다. 복직을 앞두고 온라인 게임에 날짜 확인을 위한 연락 해야 했고, 무엇보다 두 아이의 어린이집 등록부터 다시 알아봐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은 이내 분주해졌다.



먼저 모스크바에서 함께했던 육아 동지들에게 조심스럽게 귀국 소식을 전하고, 한국으로 가져가지 못할 살림살이와 물건들을 하나둘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후 며칠간은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한 날들이 이어졌다. 생각보다 유치원과의 이별은 조금 더 이르게 찾아왔다. 귀국을 불과 2주 앞두고는 큰아이의 재등록 시기와 맞물려 예상치 못한 차질까지 생겼다. 결국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지 못하고 온전히 집에서 돌봐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담임선생님께 왓츠앱으로 대략적인 사정을 설명하며 양해를 구했고, 남편 회사의 현지 직원을 통해 유치원 측에 우리의 상황과 의사를 한 번 더 전달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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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마지막 등원 날, 하원 시간을 앞두고 나는 인근의 작은 한인마트에서 미리 사 온 한국 과자와 사탕 등을 손바닥만 한 헝겊 주머니에 담기 시작했다. 반 아이들 수보다 조금 넉넉하게 나누어 담는 손길이 분주하다가도 한 번씩 멈칫거렸다. 손재주가 조금만 더 좋았더라면 색색의 리본이라도 달아 한결 근사하게 포장해 주었을 텐데, 자타공인 ‘똥손’인 나로서는 이것이 최선이었다.



비록 몇 달밖에 되지 않은 짧은 시간이었고, 언어의 장벽과 숫기 없는 내 성격 탓에 아이들이나 다른 학부모들과 깊은 교류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이 또한 결코 쉽게 얻을 수 없는 소중한 인연이라 생각했다. 러시아에서 인연을 맺은 선생님과 친구들이 우리 아이를 아주 조금이라도 오래 기억해 주기를 바랐다. ‘아, 예전에 반 친구 중에 한국 아이가 있었지. 그 아이가 준 한국 과자가 참 맛있었지.’ 하고 말이다. 선생님들께 드릴 선물로는 러시아 사람들이 유독 좋아한다는 한국의 초코파이를 상자째 준비했다.



양손 가득 커다란 쇼핑백을 들고 낑낑거리며, 세월의 흔적을 품은 채 강변의 자갈처럼 맨질맨질해진 유치원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 오늘이 이곳을 찾는 마지막 날이라는 사실이 좀처럼 실감 나지 않았다.

유치원 복도로 이어지는 현관문 앞에서 괜히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천천히 내쉬어 보았다. 언제나처럼 리셉션 데스크를 지키고 있던 두 남자 직원과 나직하게 인사를 나누고 교실 쪽으로 다가갔다. 복도는 마침 하원 준비로 들떠 있는 아이들의 소란스러움으로 분주한 시간이었다.



마중 나와 준 안나 선생님에게 준비해 온 아이들의 간식 주머니와 초코파이를 건넸다. 초코파이는 꼭 선생님들이 다 같이 티타임에 드셨으면 좋겠다고 농담조로 가볍게 건넸다. 그녀는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한 채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선물이 든 쇼핑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맙다는 짧은 인사와 함께 가만히 받아 들었다.



선생님도 나도 평소처럼 담담하게 인사를 나누려 애썼지만, 얼핏 보아도 붉게 물든 그녀의 눈시울을 보자 덩달아 내 마음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도 내 마음이 왜 이리 울렁거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용하는 언어가 달랐던 우리였기에 더 조심스러웠다. 전하고자 하는 바가 있을 때는 오히려 최선을 다해 서로의 눈빛과 뉘앙스에 귀를 기울이곤 했었다. 그리고 이건 어쩌면 내가 안나 선생님에게 배운 것이기도 했다. 그녀는 나에게 언어보다 눈빛으로 그리고 잘 드러나지 않았던 세심함으로 나와 아이를 수개월동안 묵묵히 돌봐주고 있었다. 그랬던 그녀와 이제 작별해야 할 시간이라는 게 처음으로 실감이 났다.


여기서 누구라도 먼저 눈물을 터뜨리면 도무지 수습할 수 없을 것 같아, 서로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으며 말을 아꼈다. 때마침 마지막 인사를 나누기 위해 온라인 게임에서 뒤늦게 도착한 남편이 다가와 내 한쪽 어깨를 가볍게 감싸 안았다. 남편은 밝게 웃으며 지나가는 다른 선생님들과도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 덕분에 출렁거리듯 무겁게 가라앉았던 공기가 조금은 가볍게 환기되어 내심 다행이다 싶었다.



안나 선생님은 감정을 갈무리하며 서둘러 다른 주제를 꺼내왔다. 혹시 시간이 괜찮다면 영어로 진행되는 짧은 홍보용 인터뷰에 응해줄 수 있는지 물었다. 남편과 나는 생각지 못한 제안에 잠시 마주 보다 흔쾌히 그러겠노라 답했다. 우리 나름의 고마움의 표시였다. 우리가 유치원에 처음 온 날 통역을 맡아주었던 영어 과목 담당 제니 선생님이 캠코더가 미리 설치된 작은 방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녀는 선뜻 인터뷰에 응해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먼저 건넨 뒤, 지난 몇 달간의 유치원 생활이 어땠는지 물었다. 우리는 영아반 학생 수가 많지 않아 선생님들이 아이를 훨씬 세심하게 돌봐주셔서 정말 만족스러웠다고 솔직한 마음을 전했다. 합리적인 교육비와 더불어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아이가 다양한 활동을 경험할 수 있었던 점을 최고의 장점으로 꼽았다.



인터뷰 녹화를 마치고 안나 선생님은 아이가 사용하던 사물함에 빠진 물건이 없는지 다시 한번 살핀 후, 이례적으로 복도 밖 현관 앞까지 나와 우리를 배웅해 주셨다. 언제 받았는지 첫째 아이는 제 몸집의 반만 한 커다란 풍선을 세 개나 들고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선생님은 별다른 말을 보태지 않은 채 복도 밖으로 통하는 현관문을 붙잡고 서서, 아이 정수리에 시선을 둔 채 이따금 다른 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머뭇머뭇 쓰다듬었다.

그녀의 붉어진 코끝과 촉촉해진 눈시울을 바라보며, 그동안 우리가 함께 쌓아 올린 마음이 이런 거였구나 싶었다.


스쳐 간 시간이 고작 몇 달에 불과한데도, 수많은 아이 중 하나였을 우리 아들과의 이별을 이토록 서운해해 주는 그 마음씀씀이가 이루 말할 수 없이 고마웠다. 비록 언어가 완벽하게 통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이곳에서 함께 지낸 시간을 통해 ‘선생님’이라는 이름만이 줄 수 있는 온전한 사랑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나 역시 요동치는 감정을 애써 가라앉히느라 여간 애를 먹은 게 아니었다. 그렇게 또 한 번, 예상치 못한 이별의 문턱에서 기어이 마음을 푹 내어주고 말았다.


우리는 정말 오래도록 안나 선생님을 잊지 못할 것 같았다.


마지막 등원 날, 안나선생님과 함께



겨울철 새 둥지에 먹이를 넣어주고 있는 아들과 안나선생님

하지만 아무리 아쉬워도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모습으로 마지막을 기억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서둘러 휴지를 꺼내 선생님과 나누어 가진 뒤, 얼른 눈물 자국을 닦아내고 환하게 웃어 보였다. 오늘 다 같이 사진 한 장을 남기고 싶다는 내 부탁에 선생님은 흔쾌히 응해 주셨다. 남편이 앞에서 휴대전화 카메라를 준비하며 서 있는 동안, 우리는 렌즈를 바라보며 약속이라도 한 듯 활짝 웃었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안나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모스크바라는 도시가 이토록 따뜻한 기억으로 남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우리가 이곳에 마음을 붙일 수 있었던 수많은 이유 중 유치원과 선생님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크고 소중했는지, 이 마음이 꼭 전달되었기를 바랐다. 선생님은 언젠가 다시 모스크바에 오게 된다면 꼭 찾아오라며, 나와 아이들을 한참 동안 그 넉넉한 품에 깊이 안아 주셨다.




귀국을 앞둔 마지막 열흘 남짓은 매일 아이들이 잠든 새벽마다 일어나 홀로 짐을 정리해야 했다.

주말에라도 남편과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며 집을 정돈하고 싶었지만, 남편 역시 귀국 직전까지 처리해야 할 회사 업무가 만만치 않게 쌓여 있었다. 결국 집안 살림을 처분하고 짐을 분류하는 온갖 일들은 오롯이 내 몫으로 남겨졌다.



한국에서 원래 꾸리던 살림 규모에 비하면 그저 조금 긴 여행을 다녀오는 정도의 짐에 불과했지만, 막상 한쪽 방바닥에 쭉 펼쳐놓고 보니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아득하기만 했다. 며칠을 엄두가 나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며 눈치만 보다가, 결국 마음을 단단히 다잡고 하나씩 정리에 나섰다. 기준은 단순했다. 부피가 지나치게 크거나 무거워 한국으로 들고 가기 어려운 물건들부터 차례로 처분해 나가기로 했다.



정리 1순위는 단연 아기 침대였다. 마침 지인의 소개로 곧 출산을 앞둔 한국인 엄마에게 우리가 처음 샀던 가격보다 조금 더 저렴하게 넘길 수 있었다. 마침 둘째 아이가 이유식을 척척 잘 먹어주어 분유와 작별할 때가 되었던 터라, 쓰던 젖병 소독기까지 기꺼이 덤으로 얹어드렸다. 한국으로 들고 갈 수 없거나 몇 번 입어보지도 못하고 금세 작아져 버린 아이 옷, 좋아하던 아기 장난감들도 고마웠던 모스크바 육아 동지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었다. 타향살이 속에서 아끼고 아꼈던 한국에서 가져온 짜장, 카레 가루와 한국식 장류, 맛깔스러운 양념 소스들까지 미련 없이 그들의 손에 쥐여주며 그간 고마웠던 마음을 전했다.



차가 없었던 탓에 염치 불고하고 집 문 앞까지 와주기를 부탁했는데, 다들 우리의 분주한 사정을 너무나 잘 이해해 주며 흔쾌히 달려와 주었다. 이 과정에서 사족을 하나 덧붙이자면, 귀국 일정이 미묘하게 꼬이면서 우리는 바로 직전에 원래 지내던 곳에서 숙소를 한 번 옮겨야 했다. 새로 옮긴 숙소는 3층이었지만 층고가 워낙 높아서 체감상 5층 이상을 오르내리는 듯했다. 게다가 계단은 마치 영화 <해리 포터 시리즈>에 나오는 호그와트의 움직이는 계단처럼 사각형을 그리며 어지럽게 빙빙 돌아 올라가는 구조였다. 이전보다 위험 난이도가 한층 더 올라가 남편이 없으면 그 가파른 계단에 유모차를 대동하는 건 더 이상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건물 중앙을 차지하고 있던 커다랗고 노후된 엘리베이터는 대체 언제부터 작동을 멈춘 건지, 사면의 유리창이 불투명 유리처럼 온통 뿌옇고 지저분한 얼룩으로 뒤덮여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길가에 방치된 공중전화 부스를 떠올리게 했다. 재미있는 건 그 누구도 그 엘리베이터가 멈춰 있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으레 그런 것인 양 수리를 진행하는 것도 아니었고, 겉에 ‘점검 중’이나 ‘사용 금지’ 같은 경고문이 붙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불을 완전히 꺼두어 폐쇄한 상태도 아니었다. 건물 안 사람들은 원래 그런 것인 양 묵묵히 계단을 이용해 오르내릴 뿐이었다.



하긴, 어느 날 갑자기 작동한다고 해도 불안해서 선뜻 올라탈 마음은 없었을 것이다. 내 한 목숨도 아니고, 무엇보다 아이들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무서웠다. 결국 귀국하는 날까지 나는 그 엘리베이터를 단 한 번도 타보지 못했다.



그래서 누군가 물건을 가지러 오기로 한 날이면 미리 메신저 앱으로 약속을 정해 두고, “도착했다”는 메시지가 찍히는 즉시 살금살금 문을 나섰다. 혹여나 아이가 깰까 봐 문을 미처 꽉 닫지도 못한 채 전속력으로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 높은 계단을 숨이 턱에 차도록 오르내려야 했다. 매일 계단을 이용하면 살이 빠진다던데 왜 난 예외인가. 다만 갈수록 숨이 살짝 덜 차는 걸 보면 폐활량 하나는 제대로 늘어나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멈출 수는 없었다. 떠날 날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부지런히 발품을 파는 만큼 중고 물건들을 정리해 귀국 여비에 조금이나마 보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크고 작은 아기용품과 내가 편하게 입던 옷가지들은 집안 청소를 맡아주던 카티야가 한꺼번에 가져가 주기로 해서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물건들이 하나둘 빠져나가며 집 안은 점점 휑해졌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귀국 준비가 순조롭다는 신호 같아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겼다.





이렇게 모스크바에서 귀국 준비로 분주할 무렵, 한국에서는 초반 ‘우한 폐렴’이라 불리던 전염병이 점차 번져가고 있다는 뉴스가 속속 들려왔다. 훗날 온 세계를 수년간 공포와 고립 속으로 몰아넣었던,

지금은 누구나 아는 ‘코로나19’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이 낯선 바이러스가 얼마나 거대한 파장을 몰고 올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신혼여행을 막 다녀왔던 2015년 무렵, 한국을 휩쓸고 지나간 메르스처럼 한 일주일쯤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품기도 했다.

지금 지나고 보니 참 부질없이 낙관적이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전염병의 유행이 점점 확산되자, 모스크바에서도 동아시아인을 향한 이유 없는 경계심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남편의 온라인 게임 동료들 사이에서는 식당에 들어갔다가 단지 동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입장을 거부당하는 일도 벌어졌다. 관광객이 아니라 몇 년째 모스크바에 거주하고 있는 교민이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이 없었다고 했다. 나아지기는커녕 사태가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어 가자, 이곳에 계속 남아 살아가야 하는 모스크바의 한인 지인들 안부가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그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웠다.



우리도 한국으로 들어가는 입장에서 백신은커녕 마땅한 예방바카라조차 없던 시기였다. 사람들이 몰리는 공항과 기내에서 혹여 어린아이들이 바이러스에 감염이라도 될까 봐, 차라리 귀국일정을 조금 미루는 편이 낫지 않을까 홀로 깊은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무색하게 우리에겐 별다른 선택권은 없었다. 결국, 예정대로 남편의 회사 일정에 맞춰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공항에서도 한국으로 가져갈 짐이 워낙 많아 보안검색대를 통과하는 일부터가 큰 난관이었다. 셰레메티예보 공항은 외부에서 공항 안으로 들어올 때 한 번, 출국 수속을 밟으며 또 한 번, 총 두 차례의 보안 검색을 거쳐야 했다. 함께 귀국하는 온라인 게임 동료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유독 우리 짐이 많아 내심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아이들을 맡고 있는 사이 남편은 유모차를 비롯한 무거운 짐들을 하나씩 검색대에 올리느라 여간 애를 먹은 게 아니었다.



그렇게 고군분투한 끝에 가까스로 시간에 맞춰 모든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 탑승을 기다릴 수 있었다. 한숨을 돌리고 나니 문득 허기가 몰려왔다. 마지막으로 카티야가 몇 시간 전 따뜻하게 싸준 빵을 꺼내 아이들과 나누어 먹었다.



공항 대기실 창밖으로 펼쳐진 아득한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알 수 없는 헛헛한 감정이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왔다. 이곳에 처음 발을 내디뎠을 때가 그랬듯, 떠나는 이 순간까지도 쫓기듯 급작스럽게 진행되지 않은 일이 하나도 없었다.


역시, 계획 따윈 필요 없다.


출국심사 게이트를 완전히 빠져나가기 직전, 나는 마치 소중한 무언가를 두고 온 사람처럼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잊은 것은 없는데, 나는 무얼 찾고 있었나. 애써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하며 속으로 조용히 작별 인사를 건넸다.


“다 스비다니야, 모스크바.”
(안녕히 계세요, 모스크바.)


그렇게 우리가 떠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모스크바에서도 코로나19가 폭발적으로 확산되면서 셰레메티예보 공항이 전면 폐쇄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지나고 보니 그때 망설이지 않고 서둘러 귀국한 것이 우리 가족에게는 참으로 천운이었다. 온라인을 통해 모스크바에 남아 있던 교민들의 소식을 접하니 상황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마스크 수급과 착용조차 원활하지 않았고, 밖으로 나가려면 통행증과 같은 서류를 미리 발급받아야 하는 상황이라고 전해졌다. 마트나 병원, 약국 같은 필수 시설을 방문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외출이 엄격하게 제한되었다고 했다. 곧 끝날 것만 같았던 코로나19의 시기는 이후 몇 년 동안 이어지며, 많은 교민들의 삶에 크고 작은 상흔을 남겼다.





다행히 큰아이는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는 우려했던 것보다 훨씬 차분하게 행동했다. 답답해하는 아이에게 기내식을 먹는 순간을 제외하고 마스크를 계속 씌워두는 일이 조금 버겁긴 했지만, 처음 모스크바로 출국하던 날처럼 떼를 쓰거나 불에 덴 것처럼 울어대지는 않았다. 아빠 옆자리에 바짝 붙어 앉아 휴대폰으로 뽀로로 영화를 보며 기내식을 얌전히 받아먹는 모습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늘 아기 같았던 아이가 어느새 조금 자라 있었다.


귀국날, 아빠를 도와 짐을 옮기는 첫째 아들

문제는 의외로 다른 데서 터졌다. 모스크바에서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던 둘째의 시간이 돌아온 것이다. 아이는 단 한순간도 아기용 바시넷에 순순히 누워 있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꼬박 몇 시간 동안 아기띠를 둘러멘 채 비행기 안을 오가며 서성여야 했다. 정말이지 다시 하라고 한다면 절대 못 하겠다고 할 만큼, 고난의 시간이었다.


더구나 저녁 비행기였다. 어두운 기내에서 아이가 한 번씩 칭얼거리기라도 하면, 피곤한 시각 주변 승객들에게 밀려오는 미안한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아이를 달래 보려 그 긴 통로를 왔다 갔다 하며 서성이는 동안, 어깨와 허리에 견딜 수 없는 통증이 몰려왔다. 며칠간 잠을 자지 못했던 내 정신도 이미 가출해 버린 지 오래였다.


“집에 가자, 집에…….”


아기띠 속에서 덩달아 울다 지쳐가는 아이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자장가를 읊조리듯 같은 말을 주문처럼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 말이 울먹이는 아이를 달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한계에 다다른 나 자신을 붙들어 두기 위한 간절한 주문인지조차 알지 못한 채, 돌림노래처럼 끝없이 되뇌었다.



하지만 아무리 고통스러운 터널이라 해도 끝은 반드시 있는 법이었다. 곧 착륙한다는 안내 방송과 함께 창밖으로 익숙한 인천의 육지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나도 모르게 참아왔던 숨이 길게 빠져나왔다. 11kg이 넘는 아이를 장시간 품에 안고 어르느라 내 얼굴은 이미 진땀과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 엉망이었다. 그래도 이 모든 고생을 단숨에 잊게 할 만큼, 무사히 착륙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벅차올랐다.


비행기에서 내리기 전, 근처에 앉아 계시던 승객들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비행 내내 아이가 칭얼거려서 정말 죄송했습니다…….”


분주히 짐을 챙기시던 50~60대 승객분들은 나를 돌아보더니, 무슨 별소리를 다 하느냐는 듯 손사래를 쳐 보이셨다.


“아이고, 아기 엄마가 너무 고생했어. 조심해서 잘 가요~”


오히려 나가는 길에 내 등을 다정하게 토닥여주시는 그 손길에, 미안함과 고마움, 그리고 알 수 없는 안도감이 한데 뒤섞여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어쨌든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왔다.



당시 전 세계를 집어삼키고 있던 코로나19의 공포는 공항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낯선 이들과 조금만 접촉이 생겨도 위협으로 느껴지던 서스펜스 같은 시국이었기에, 공항으로 마중 나올 가족들의 안전 역시 깊이 걱정되었다. 우리는 사람들과의 접촉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공항 내부가 아닌, 밖으로 한참을 걸어 나간 외곽 주차장에서 가족들과 만나기로 약속을 정했다.



마중 나온 가족들과 만나는 과정조차 007 첩보 작전을 방불케 했다. 널따란 공항 외곽 주차장에서 서로 길이라도 엇갈릴까 봐 아이들을 챙기며, 묵직한 무게 탓에 좀처럼 밀리지도 않는 짐 카트를 끌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차 문이 열리고 부모님이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모스크바로 떠날 때보다 훌쩍 자라 버린 아이들을 보시자마자 부모님은 “아이고, 얘들아!” 하며 달려오듯 다가오셨다. “그새 이렇게 컸어!” 하는 짧은 탄성과 함께 두 팔을 넓게 벌려 아이들과 나를 온 힘을 다해 꼭 안아주셨다.


한국을 떠날 때 시원한 스포츠머리로 짧게 손질했던 큰아이의 머리는, 어느새 귀밑과 뒷목을 까맣게 뒤덮을 만큼 수북하게 자라 있었다. 첫째의 달라진 모습을 가만히 살피던 오빠는, 어느새 수습할 길 없는 장발이 되어버린 조카를 보더니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의 ‘철이’ 같다며 놀려댔다. 반박할 수 없는 닮은 꼴이라는 말에, 철이가 누군지 모르는 아들만 빼고는 모두 한참 웃음을 터뜨렸다.


친정엄마는 그사이 훌쩍 자란 아이들의 모습에 짐짓 놀라시면서도, 장시간의 밤 비행으로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해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초췌해진 우리 가족의 몰골을 보며 연신 혀를 차셨다.


“에구, 가서 잘 지냈다더니, 먹는 게 얼마나 시원찮았으면 하나같이 이렇게 쏙 빠져서 말랐어…….”


돌아가는 차 안에서 엄마의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자니, 우습게도 어릴 때 듣던 잔소리가 떠올랐다. 걱정과 반가움이 뒤섞인 그 익숙한 지청구마저 ‘역시 우리 엄마, 하나도 안 변했네’ 싶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몇 달 동안 낯선 땅에서 온몸으로 버텨온 시간이 그제야 끝난 것 같았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여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한바탕 모험을 끝내고 돌아온 사람처럼, 마치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욕조에 지친 몸을 푹 담근 듯 아득한 안온함이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오는 길도 요란법석 대소동이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끝내 함께"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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