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부스 유리벽 사이 아찔한 밤

평온한 일상을 할퀸 그날의 사고

by봄날의 곰


"어떤 영화를 좋아하세요?"

요즘은 이런 걸 묻고 답하는 일이 없지만, 예전에는 소개팅이라든가 혹은 친분이 없는 누군가와 만난 자리에서 공통 관심사를 찾고 어색함을 탈피하기 위해 종종 이 질문이 등장하곤 했다.


답은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주저 없이 유행하는 압도적 스케일의 블록버스터 영화부터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스릴러 영화 제목을 줄줄 읊었다.

2000년대 초 당시 극장에 걸렸던 액션이나 스릴러 장르 영화는 거의 한 번씩 다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시도 시선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그 쫄깃함은 봐도 봐도 질리지 않았다.



대학 새내기 시절, 뒤늦게 찾아온 사춘기처럼 미래에 대한 온갖 고민으로 한참을 방황했다. 남들은 ‘빛나는 청춘’이라는데, 나 혼자만 회색지대를 맴도는 것 같았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막막함과 좌절감에 잠식되어 가던 날들이었다. 스스로를 한없이 몰아붙이다 못난 우울감이 밀려올 때면, 도피하듯 혼자 영화관을 찾았다. 거대한 스크린 앞에서 짜릿한 이야기 속으로 정신없이 빠져드는 순간이 좋았다. 나와는 상관없는 남의 삶이라는 사실이 주는, 그 안전한 스릴을 대리 체험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몇 년 후 우여곡절 끝에 슬롯생활을 시작하고,

이후 결혼을 해 아이들을 키우며 신기하게 영화를 선택하는 취향도 점점 달라졌음을 느낀다. 싫어하지는 않지만 그다지 끌리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이제는 그저 평이하게 흘러가면서도 잔잔하고 소소한 웃음 포인트가 있는 영화가 좋았다.


아마 더 이상 스크린 위의 극강의 몰입감과 긴장감을 오롯이 견디고 싶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들 둘을 키우다 보니 하루에도 몇 번씩 움찔할 해프닝부터 소소하면서도 스펙터클한 사고까지 연달아 줄을 이었다.

'앗, 깜짝이야!', '아이고...'를 반복하는 일상.

이미 내 삶이 스릴러인데, 왜 영화를 보면서까지 초조하게 손에 땀을 쥐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난 이제 더 이상 놀라는 게 싫다.



그렇지만 어쩌겠나. 이제야 궤도에 올랐나 싶어 순항을 기대하며 한숨 돌릴라치면, 보이지 않던 암초에 쿵 부딪혀 혼비백산하고 마는 것. 어쩌면 그것 역시 피할 수 없는 삶의 한 법칙인지도 모르겠다. 우리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잔잔했던 일상을 흔드는 공포는 가장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왔다.






10월의 어느 비 내리던 밤.

이미 어두컴컴해진 창밖에는 연신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창문의 걸쇠를 하나씩 확인하며 커튼을 치다 말고,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양 '쏴아아' 시원하게 쏟아져 내리는 빗소리에 놀랐다.

한국의 여름 장마를 연상시킬 만큼 거센 물줄기였다.


"와... 생각보다 비가 많이 오네."

"그러게 말이야. 내일 당신이랑 애들 유치원 갈 때 괜찮을까 모르겠어."


내 시선을 따라 같이 밖을 보던 남편도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이어 창밖에 내리치는 번쩍번쩍한 천둥번개에 우리는 한 번씩 움찔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날 이어 나눈 대화는 소소하고 평범한 것들이었다.


아이들과 모스크바 생활을 시작한 지 이제 한 달이 지났다.

도착하자마자 며칠 상간으로 시차에 적응하고, 주변 지리를 익혔다.

아이들을 데리고 그날 해야 할 루틴을 설정하며 한동안 정신없어 별다른 감상에 빠질 여유가 없었다.


한 번씩 일어나는 의외의 상황이 버겁기도 했지만, 새로운 것을 만나 배워나간다는 기쁨도 있었다.

저녁 식탁 앞은 그날의 생활형 무용담을 나누는 목소리로 가득 찼다.

이따금 유치원 선생님이 개인 메시지로 보내주시는 사진 속 아이의 표정도 다양하고 즐거워 보였다.

아직은 등원할 때마다 목놓아 울곤 하니, 실제 생활 모습도 여과 없이 보여주려 하신 것 같았다.

'다행이다, 잘 적응해 주고 있구나.'


숙소와 남편 사무실 거리가 도보로 10분 남짓이라 유사시에도 믿을 구석이 있는 사람처럼 마음도 든든했다. 남편은 바쁘면 퇴근 후 집에 왔다가 식사를 하고 다시 사무실에 돌아가 잔여 업무를 처리하기도 했지만 가능하면 저녁 시간은 잠시라도 집에 들러 아이들과 함께하려 했다.



나름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애쓰며 조금씩 균형을 잡아갔다.

‘이만하면 우리, 잘 해내고 있는 것 같아.’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날이면, 나 자신이 기특해 쇄골 위를 가만가만 토닥이기도 했다.


큰아이는 진작 나와 이른 저녁을 먹고도 아빠 곁을 맴돌며 괜히 식탁 위의 반찬을 입에 넣어 달라고 했다. 이제 그만 씻고 자자는 엄마의 말에는 좀 이따 샤워는 꼭 아빠랑 하겠단다. 씻는 것도,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것도 싫으니 어떻게든 최대한 미뤄 보려는 심산인가 보다. 뻔히 속내가 들여다보이지만, 어린 아들의 어리광 섞인 고집에 아빠는 오늘도 기꺼이 져주었다.


"히히 아빠! 간지러워~!"

"꺅~아빠, 샤워기 또 해줘! 또 해줘!"


욕실 안에서는 무슨 장난이 오가는지 두 사람의 들뜬 웃음소리가 간간이 새어 나왔다.


'저렇게 좋을까...'

정신없이 어질러진 장난감을 정리하며 문 앞을 지나치다 무심결에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피식 웃음이 났다.


큰 아이는 한국에 우리끼리만 있을 때와는 다르게 신기할 정도로 표정이 밝아졌다. 몸이 자라는 속도만큼 장난기도 부쩍 늘어 가끔 내 뒷목을 잡게 만들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아이가 아빠와 소소한 일상을 나누며 하루의 피로를 씻어내는 모습만 보면, 여기까지 애써 날아온 보람이 차올랐다. 한 번씩 이곳으로 오던 날, 비행기 안에서의 기억이 떠올라 혼자 부르르 몸서리를 치곤 했지만. (자세한 상황은 '6화 온 마을이 필요했던, 출국 날'을 참고해 주시길 바란다.)



작은아이도 취침 전 분유 한 병을 단번에 비우고 거하게 트림을 내지르며 건강한 소화력을 알렸다.

엄마의 오른쪽 어깨에 턱을 올리고 안겨 있다가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박자에 맞추어 곧 평화롭게 꿈나라로 진입했다. 어두운 창밖 분위기와 빗줄기 소리가 백색소음으로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아~! 잔다. 잠들었어……!'



나는 속으로 삼키듯 환호했다.

육아에서 가장 짜릿하게 도파민이 터지는 쾌감이 바로 이런 순간이 아닐까.


'그래! 오늘은 조기 퇴근이야!'


빠른 '육퇴(육아 퇴근)' 기념으로 아껴놓은 발티카(대중적인 러시아 맥주 브랜드) 한 캔과 낮에 사 온 감자칩을 곁들이면 그야말로 완벽한 하루의 마무리가 될 터였다.


흥얼흥얼~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서둘러 거실과 방을 정리하고, 침대 위에 넓게 펼친 방수패드 위에 아이가 입을 내복을 준비해 두었다.

"엄마 다 했어요! 나 나가요!"


욕실 안에서 아이의 만족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서둘러 커다란 배스 타월을 준비해 욕실 문을 열었다. 아이가 드르륵 샤워부스의 미닫이문을 열고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거리며 까불어댔다.

내가 "아주 신났네~"라고 중얼거리며 두 손 위로 수건을 크게 펼쳐 아이를 받으려던 바로 그때였다.



"쾅-!!!!!!!"


순식간에 투명에 가깝던 부스 유리벽에 수천 개의 거미줄이 쳐졌다. 무수히 많은 실금이 이어지더니 이내 폭탄을 맞은 듯 허물어져 내렸다.


"펑-!!!!!!!!!!!"



불과 1~2초 사이.

어디선가 총알이라도 날아온 건가?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처럼,

정지된 화면 속에서 갈라진 유리 벽면이 갑자기 사방으로 가루가 되어 일제히 바닥으로 바스러졌다.

남편과 아이, 그리고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유리벽이 순식간에,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동시에 수십 개의 바늘이 훑고 지나간 듯 손 전체가 견딜 수 없이 따가워 반사적으로 나는 황급히 손을 털어냈다.



잠시 숨 막히는 정적이 흐른 뒤, 소름이 돋을 만큼 서늘한 위기감이 감돌았다.

“으앙!!!!!!!!!”

이내 욕실 안은 아이의 자지러지는 비명과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

무심코 내려다본 욕실 바닥에는 유리 파편과 붉은 액체가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



피다. 진짜 피!



머릿속이 하얘졌다....





모스크바에서 작은 월셋집을 얻어 생활하기 시작하면서 생소하고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상황에 맞춰 적응하며 지내려 했다. 억지로 마음을 다잡았다기보다는, 그때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 계속 신경 쓰이는 건 바로 집 샤워부스의 미닫이 유리벽이었다. 문처럼 앞으로 밀어서 여는 것이 아니라 욕조 위에 달린 커다란 창문 같은 형태였다. 게다가 아무리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뿌연 해묵은 물때는 그간의 연식을 짐작하게 했다. 뻑뻑한 문을 힘을 주여 겨우 여닫을 때마다 들리는 기분 나쁜 삐걱거림. 낡은 사용감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그 유리벽이 늘 불안했다.

그렇다고 씻지 않을 수는 없으니 한 번씩 생각날 때마다 서로 조심하라며 주의를 줬다.



하지만 매일 쓰다 보니, 어느새 우리도 그 위험과 불편함에 무뎌져 가고 있었다.

그런데……



"여보, 현관 가서 내 슬리퍼 가져와! 얼른!!"



충격으로 잠시 얼이 빠져 있던 나를 현실로 번쩍 깨우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남편은 가져다준 신발을 신고 재빨리 아이를 허벅지 위로 안아 들고는, 나에게 아이를 단단히 잡으라고 했다.


그리고 샤워기 물을 강하게 틀어 몸에 튀었을지 모를 유리 잔해들을 씻어내기 시작했다.

아이는 불에 덴 듯 몸을 파닥거리며 악을 쓰고 울었다. 내 손등 위로도 어느새 파편이 튀었는지 듬성듬성 파인 상처 사이로 피가 배어 나왔다.


"손 씻고 옷 얼른 갈아입어. 파편이 붙어 위험해!!! 내 핸드폰도 가져와!"


남편 역시 목소리가 떨리고 당혹스러운 얼굴을 숨길 수 없었지만, 나보다 훨씬 침착했다.

그는 경황없는 와중에도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하나씩 일러주었다.


나는 최대한 얼굴에 옷이 닿지 않도록 목 주변을 넓게 벌려 티셔츠를 벗어던졌다. 뒤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깨끗한 수건을 찾아내 큰아이를 감싸 안고 소파 위에 내려놓았다.

온몸이 충격 때문인지 아프다기보다는 얼얼했다.


집 안에 울리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이명처럼 귓가에 달라붙었다.

손가락과 손등 위의 얕은 상처에서 피가 계속 흘러나와 내가 움직이는 동선마다 바닥에 점처럼 작은 붉은 원들이 수도 없이 생겨났다.


할 수 없이 손등 주변을 가제 수건으로 대강 둘둘 말아 끝부분을 안쪽으로 급히 쑤셔 넣으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남편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남편은 인근에 사는 온라인 게임 동료들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가 다쳤으니 지금 좀 와달라고 도움을 청했다.

설상가상 그쪽 숙소 역시 몇 시간째 내리는 폭우로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지만, 사람이 다쳤다는 말에 일단 서둘러 오시겠다고 했다.


남편은 통화를 마치고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다시 강한 물줄기로 몸을 씻어 잔해를 털어내고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아이는 공포 때문인지 통증 때문인지 소파에 앉아서도 팔다리를 쉼 없이 버둥거리며 계속 악을 쓰고 울었다. 아이의 손 주변에도 자잘하게 베인 상처들이 보였고 군데군데 핏자국이 선명했다. 손을 당겨와 더 자세히 살피려 하면 아이는 몸을 뒤틀며 더 크게 울었다. 할 수 없이 일단 겉옷을 입히고 병원을 가기 위해 여권부터 챙겼다.


폭우를 뚫고 회사 동료 두 분이 빠르게 도착해 주셨다. 다들 처참한 화장실 상황과 우리의 몰골을 번갈아 보고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같이 병원에 가 주시기로 해 서둘러 외투를 챙겨 입는데, 남편은 욕실을 정리해야 하고 잠든 둘째도 지켜야 하니 자신은 집에 남겠다고 했다.


사실 유리 부스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남편이 제일 걱정이었다. 언뜻 봐도 남편의 왼쪽 어깨와 등 쪽은 무너지며 튄 유리 파편에 심하게 긁혀 사선으로 셀 수 없이 많은 찰과상이 보였다.


본인의 치료가 더 시급해 보였지만, 놀란 아이가 엄마만 붙잡고 늘어지니 나부터 먼저 보내려는 눈치였다. 우리 중 제일 많이 다친 사람은 남편이었건만, 가장 의연하기도 했다.

남편을 두고 가야 한다는 게 영 내키지 않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망설여졌다. 지금은 다들 패닉 상태라 무감각해도 더 다친 곳이 있을지도 몰랐다.


"비가 이렇게 오는데 자는 애까지 데려가면 더 고생해! 빨리 가! 안 그럼 택시도 가 버릴지 몰라!!"


꿈쩍도 하지 않겠다는 남편의 단호한 태도에 이내 마음을 굳혔다. 서둘러 아파트 아래로 달려 내려가 아이를 안고 택시에 올라탔다.


감사하게도 동료분들이 동행해 주셨다. 우리를 안심시키며 20분 거리의 응급실이 있는 대형 병원으로 향했다.


"엄마 아파~ 아파 아아악~~~~~~~!!!!"


아이는 병원에 도착해서도 내 셔츠 옷깃을 부여잡고 뒤로 넘어가며 악을 쓰며 울었다.

아이가 너무 울고 아파하니 미처 발견하지 못한 미세한 파편이 눈이나 두피에 박혔으면 어쩌나 불안했다.

같이 가 주신 분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접수를 마치고 대기실 의자에 앉아 기다리는 내내 걱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다행히 우리나라 응급실처럼 정신없이 환자가 밀려드는 상황은 아니었다. 바로 진료를 볼 수 있었다.


의사는 주의 깊게 사고 경위를 듣더니 X-ray를 찍고 특히 눈과 귀 쪽을 세심하게 살폈다.

난생처음 보는 차가운 대형 기계에 눕혀 X-ray를 찍으려니 겁을 먹은 아이가 온몸을 격하게 버둥대며 거부했다. 절대 움직이지 못하게 하라는 의료진 말에 나와 같이 가주신 동료분이 납 보호복을 입고 한쪽씩 아이를 결박하듯 꼭 누르고 겨우 촬영할 수 있었다.

아이는 무섭고 서러운지 한동안 계속 흐느껴 울었다.


다행히 검사 결과, 나와 아이 모두 큰 외상은 없었다.


'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절로 인사가 나왔다.

특히 아이는 사고 직후 남편이 재빨리 물로 씻어낸 것이 신의 한 수였다.

둘 다 손등과 손가락등을 몇 바늘 꿰매고 소독하는 것으로 긴박했던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그 와중에 재미있었던 건 러시아 병원의 미학이 가미된 치료 방식(?)이었다.

다친 내 손은 빨간색, 아들의 손은 파란색 붕대로 칭칭 감아준 것이다.

이런 색 붕대는 도대체 어디서 생산하는 걸까?

멀리서 보면 한 쌍의 화장실 표지판을 연상시키는 선명한 원색이었다.

아이는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는지 붕대가 두툼하게 감긴 오른손을 여기저기 돌려가며 신기하게 바라봤다.


"엄마!! 이거 봐! 슈퍼 주먹이야!"


아이는 주먹을 앞으로 내지르며 감격한 듯 외쳤다.

히어로 영화 속 주인공이라도 된 기분인가 보았다.

응?? 너 지금 게임 아이템 획득한 거니??

몇 시간 전 우리를 덮쳤던 지독한 공포 스릴러가, 선명한 원색 붕대를 감고 자랑스레 주먹을 휘두르는 아이 덕분에 아동용 히어로 영화로 장르가 바뀌었다.



"슈퍼 체인지 엑스!!!"


그날 이후 우리는 길거리와 집 안을 가리지 않고 기회가 생길 때마다 아이의 구호에 맞춰 수시로 변신해야 했다. 진지한 표정은 필수. 절도 있게 주먹을 힘껏 내밀어 함께 두 손을 X자로 교차해 줘야 했다. 그것도 박자를 제대로 못 맞추면 다시 하라며 잔소리를 들었다.


아…… 창피하다.


그나마 외국이라 다행이었다.

집 근처에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어서....

아들 육아는 참... 의외의 포인트에서 쉽지 않았다.






치료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욕조의 3분의 1을 가득 채웠던 유리 파편들이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남편이 쓰레받기와 두꺼운 종이봉투를 찾아내 필사적으로 치운 흔적이었다.

모스크바 자타공인 효자답게 둘째는 그 난리통에도 깨지 않고 곤히 자고 있었다.



'그래, 너도 고맙다……'



뒤늦게 확인한 남편의 상체는 자잘하게 베인 상처투성이였다. 얼마나 아팠을까. 남편의 등 뒤에서 연고를 발라주는데, 속상한 마음에 울컥 눈물이 차올라 눈앞이 자꾸 흐려졌다.

우겨서라도 함께 데려갔어야 했는데.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일단 내 몫으로 받아온 항생제를 건네며 당장 먹어야 한다고, 물 잔까지 손에 쥐여주며 재촉했다. 이제라도 병원에 다녀와야 한다고 강하게 밀어붙여 보았지만, 남편은 끝내 괜찮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요즘이 한창 바쁜 시즌인 데다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하니, 나중에 상처가 심해지면 그때 가겠단다.



저 고집…… 저... 고집……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구시렁대며 내가 할 수 있는 건 한국에서 가져온 상비약을 매일 챙기고 후시딘 연고를 수시로 발라주는 것뿐이었다. 함께 병원에 가지 못해 미안했고,

그 아수라장 속에서 가족을 가장 먼저 지켜내 준 마음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며칠 뒤 후속 치료를 위해 다시 병원을 찾았다.

수납처를 다녀온 남편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왜 그래?"

"오늘까지 한 거 둘이 합해서 거의 200만 원은 넘은 거 같아."


뭐라고?!!!!!


아무리 주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시설 좋은 대형 병원이라지만 '헉' 소리가 절로 났다.

애는 X-ray라도 찍고 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나는 겨우 꿰매고 소독한 게 다인데……

남편은 자기까지 진료받았으면 이번 달은 파산했겠다며 농담조로 웃었다.

우리는 씁쓸한 기분을 지우지 못한 채, 눈이나 얼굴을 다치지 않아 이만하길 다행이라며 서로를 다독였다.


다행히 한국에서 미리 들어둔 보험 덕분에 후에 보상은 받았지만, 그 후로 우리는 병원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으려 매사에 안전 부분은 더 조심하게 되었다.


사고를 완전히 막을 순 없겠지만, 그날처럼 스릴 넘치는 공포물은 이제 그만 겪고 싶었다.


남편은 바로 다음 날 집주인에게 사고 경위를 설명하는 이메일을 보내 파손된 샤워부스 수리를 요구했다.

본인 집의 건식 바닥이 손상될까 봐 바로 조치해 줄 거라 예상했지만 그것도 보기 좋게 빗나갔다.

계속 연락이 없다가, 두 달 뒤에 말도 없이 불쑥 들이닥쳐 유리문 사이즈를 재고 간 게 전부였다. 결국 우리가 그 집에서 이사를 나갈 때까지 샤워부스 문은 새로 설치되지 않았다. 우리는 보호막 없이 휑하게 뚫린 상태로 욕실을 써야 했다.


뭐, 나름 편했다.

이제 문 여닫으며 맘 졸일 필요도 없고.


자기 집인데 왜 빨리 안 고쳐주는지 집주인의 생각이 궁금하다는 나의 말에 남편은 으레 그럴 줄 알았단다.

여기서는 한국적인 사고방식을 버리는 게 내 정신 건강에 좋다는 거다. 뭐든 '빨리빨리' 조치되는 한국과 이곳 러시아는 시스템도, 사람들의 생각도 많이 다르다면서.


그리고 남편은 어깨를 으쓱하며 의미심장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에따 러시야~ (여긴 러시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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