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 우리의 첫사랑 2
내일은 드디어 그녀를 만나는 날이다. 나는 사실 지난 일주일가량 김기태 사건을 처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거울을 보니 꼴이 아주 엉망이다. 머리는 제멋대로 자라서 덥수룩하고 몇 날 며칠 동안 면도도 하지 않아서 턱이 거뭇거뭇했다. 나는 거울 앞에서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우리나라 물 부족 국가라는 거 다~ 순 뻥이라더만, 너를 보면 그것도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거 같어?"
나는 락커 문을 닫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예??"
"김기태는 이미 잡았는디, 강 형사는 아직 산에서 내려오는 중인가벼~? 내일 손님들도 오시는디, 경찰서에 자연인이 이렇게 떡하니 하나 있어도 되겄냐고? 우리 내일 뭐 나는 자연인이다~ 찍는 거여?"
나는 팀장님의 핀잔에 무안한 표정으로 눈썹을 살짝 쓸었다. 지금 내 꼴이 남이 보기에도 영 아닌 모양이었다.
"마무리도 됐응게 나머지는 효범이헌테 넘기고 집에 잠깐 들렀다 와. 더 하다간 가족들도 못 알아보겠어."
툭 내뱉은 팀장님의 말에 나는 시계를 보았다. 아직 오후 5시. 미용실에 들러 머리를 자르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경찰서를 빠져나왔다.
김기태는 지난주에 무사히 검찰 송치까지 완료한 상태였다. 구속 상태로 검찰에 넘겨진 만큼 당장은 그놈이 거리를 활보할 일은 없었으므로 잠깐 동안은 안심할 수 있었다.
감사장 수여식 당일에는 옷을 고르는 데 시간을 한참 할애했다. 어떻게 된 건지 옷장에 옷들이 죄다 거무죽죽하고 입을 만한 게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나는 옷장 구석에서 쇼핑백을 하나 발견했다. 작년 생일에 선물 받았던 옷가지였다. 나는 퍼뜩 그 쇼핑백을 꺼냈다.
쇼핑백 안에서 상자를 꺼내 뚜껑을 열자 새 옷이 그대로 곱게 접혀 있었다. 옅은 하늘색 셔츠였다. 나는 안에 곱게 접혀 있는 카드를 펼쳤다.
[26번째 생일 축하해. 제발 사람같이 좀 하고 다녀라.]
'민유정, 나이스.'
나는 카드는 침대 위로 툭 던져놓고 1년 가까이 처박아두었던 셔츠를 꺼내 몸에 대보았다. 제법 봐줄 만한 것 같았다. 나는 하얀색 반팔 티셔츠를 꺼내 입고 그 위에 새 옷을 걸쳤다. 잘 다린 아이보리색 면바지의 밑단도 깔끔하게 접었다.
'너무 멋을 냈나...'
나는 거울 앞에 서서 이리저리 몸을 둘러보았다. 어제 자른 머리, 새로 꺼내 입은 옷, 누가 봐도 열심히 꾸몄다고 광고하는 꼴이 좀 우습게도 느껴졌다. 하지만 오늘이 어떤 날인가. 합법적으로 그녀를 제대로 만날 수 있는 날이 아닌가. 오늘은 반드시 그녀에게 연락해도 되냐고 물을 작정이었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현관문을 나섰다.
햇빛이 쨍쨍하고 날이 너무 좋다. 오늘은 진짜 뭔가 될 것 같은 기분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사무실 문을 열었다.
"너 뭐 어디 오디션 같은 거 보러 가냐? 직업 바꾸려고? 그래, 그 얼굴로 괜히 경찰 짓 오래혔지."
팀장님은 특유의 능글맞은 표정으로 웃었다. 아... 역시 너무 과했나 보다.
"... 아닙니다. 그냥 선물 받은 옷이 있길래..."
나는 멋쩍어서 말꼬리를 흐렸다. 팀장님은 의자에 앉아 자신의 어깨를 안마봉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그려. 그렇겠지 뭐. 갑자기 선물 받은 옷이 입고 싶어지는 날도 있는 거지. 이해햐~ 그나저나, 그 여성분은 지금 금~방 효범이가 모시러 나갔는디, 우리 막내가 길을 안 잃어버리고 잘 모시고 오려나 모르겄네?"
나는 괜히 딴청을 부리다 그 말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생각할 틈도 없이 재빨리 사무실에서 튀어나갔다. 그런 내 뒤로 팀장님의 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려~ 뛰어~! 그 정도 속도면 범인을 셋은 잡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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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그녀가 보인다. 예쁘게 하고 오겠다더니 진심이었나 보다. 미치겠다. 나는 자꾸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렸다. 진정해라. 지금 17살 강윤재가 아니지 않은가. 나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게 길게 심호흡을 했다. 숨을 한 번 수욱 내뱉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자꾸 얼굴에 들어가는 힘을 뺐다.
"제가 또 밴드를 엄청 좋아하거든요."
효범이가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웃으며 꼬리를 흔들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얼른 가서 그녀의 뒤에 섰다. 그리고 두어 번 헛기침을 하며 마른 성대를 준비시켰다.
"오셨어요."
나의 목소리에 약간 놀란 듯 그녀가 동그란 눈을 뜨고 나를 보았다. 아... 진짜 귀엽다. 얘는 어떻게 이렇게 토끼같이 생겼지? 오늘은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화장도 옅은 게, 딱 16살 때 진영이 같아서 손에 땀이 난다. 지금 보면 얘는 얼굴이 진짜 하나도 안 변했다.
"뭐야? 형사님. 설마 사진 찍으려고 그 옷 새로 산 거예요?"
그녀는 나를 놀리려는 듯 내게 손가락질을 하며 웃었다. 제길. 그래 너무 꾸몄어. 적당히 할걸... 나는 괜히 쑥스러워서 몸을 돌려버렸다.
"... 원래 있던 겁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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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정진영 씨."
감사장 수여식을 다 마치고, 귀가하려는 그녀를 따라나가 조용히 불렀다. 하지만 막상 불러놓고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니 또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으로 침을 한 번 삼키자 기다리다 못한 그녀가 나를 재촉했다.
"네. 형사님, 하실 말씀 있으세요?"
"저기..."
해야 된다. 말해야 해. 강우진, 정신 좀 차려라. 오늘은 그녀를 낚아채갈 동료들도 없다. 오늘을 놓치면 이제 다시는 그녀를 볼 일이 없다. 하늘이 주신 마지막 기회마저 이렇게 허무하게 놓치고 나면 이제 하늘도 열받아서 너를 돕지 않을 거다.
"...?"
그녀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다. 나는 다시 한 번 마른침을 삼켰다.
"연락처를 좀 받을 수 있을까요?"
뭐라는 거야 이 미친놈아. 나는 준비했던 말을 다 까먹고 생뚱맞게 그녀의 연락처를 물었다. 아니, 연락처는 이미 알고 있잖아. 연락을 해도 되냐고 물어야지. 그리고 니가 왜 연락을 하고 싶은지, 니가 누구인지를 먼저 설명해야지. 이건 뭐 어디 길거리에서 처음 보는 여자에게 수작이나 부리는 시정잡배와 다를 바가 뭐냔 말이다. 그녀가 얼마나 당황하겠어!!
"아. 핸드폰 주세요."
하지만 내 걱정과는 달리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핸드폰을 가져가 자신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통화 버튼까지. 그렇게 그녀의 폰에 내 번호가 찍혔다. 아직 미처 저장하지 못한 그녀의 번호가 내 핸드폰에도 남았다.
"상금 수여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그녀는 내게 핸드폰을 다시 내밀며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내가 이미 여러 차례 본인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조차 까먹은 것 같았다. 아니지, 그냥 신경을 안 쓴다는 게 더 맞는 말인가? 내가 그녀 번호를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은 그녀에겐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어쩐지 씁쓸한 기분이었다.
아침에 했던 결심이 조금씩 무너져 내린다. 지금 그녀에게 내 감정은 너무 지나치다. 결국 나는 하려던 말을 모두 삼켜야 했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두 달 정도가 흘렀다. 김기태는 구속 기소되어 재판 중이었고, 나는 김기태 사건 말고도 크고 작은 다른 사건들을 처리하느라 바빴다. 그동안 그녀에게 연락은 한 번도 하지 못했다.
여러 가지 핑계가 있지만, 제일 큰 건 역시 그녀가 바빠 보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녀를 방송을 통해 종종 볼 수 있었다. 어쩐지 좀 더 멀어지는 기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간절히도 바라고 꿈꾸던 시간이었을 테니 충분히 즐기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대로 너무 지체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왜냐하면 어떤 배우 하나가 진영이를 이상형으로 꼽았기 때문이다. 그 짧은 유튜브 영상을 본 순간, 나는 간신히 참아왔던 이성이 끊어졌다. 이러다 진짜 연예인이라도 사귀면?... 와, 괜히 타이밍 본다고 넋 놓고 있다가는 닭 쫓던 개 신세가 될 수도 있다.
"야, 너 전에 산 셔츠 그거 어디서 산 거냐?"
나는 퇴근 전 유정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일은 비번이라 가능하면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그녀의 스케줄이 허락할지 아닐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일단 준비는 해야 했다. 기회도 준비된 자에게 온다고 하지 않는가. 무턱대고 약속을 잡았다가 거지꼴로 만날 수는 없었다.
"진짜 간만에 전화해 놓고는 뜬금없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툴툴대는 유정이에게 이러쿵저러쿵 설명할 시간이 없던 나는 바로 본론만 전달했다.
"아니, 전에 네가 사준 하늘색 셔츠. 그런 거 어디서 사면 되냐고."
"..."
내 말에 그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너 여자 생겼냐?"
그녀는 예전부터 참 예리했다. 어떻게 알았지? 아니 그냥 사고 싶을 수도 있지. 참내. 나는 괜히 찔려 말을 돌렸다.
"아, 안 알려줄 거면 끊어. 내가 알아서 할게."
"야, 네가 뭐 어딘지 알려주면 잘 고를 수는 있고? 같이 가. 내가 골라줄게. 너 어디야?"
나는 만족스럽게 씨익 웃었다. 사실 혼자 가서 잘 고를 자신도 없긴 했다. 나는 퇴근 후 유정이를 만났다. 그렇게 유정이의 도움을 받아 이것저것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거 촌스러. 내려놔. 이거나 입고 나와봐."
유정이는 내가 손에 쥐고 있던 티셔츠를 빼앗듯 가져가고는 옅은 핑크빛이 도는 셔츠와 통이 넓은 청바지를 내밀었다.
"... 이걸 입으라고?"
"너는 셔츠가 나아. 핏이 되니까. 위에 입은 그거 벗고, 안에 입은 그 반팔만 입은 채로 걸치면 돼. 아래도 그 그지 같은 옷 벗고 내가 준 대로 싹 입고 나와."
나는 반신반의하며 그녀가 내민 옷들을 들고 피팅룸에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고 나니 정말 같이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나는 어린애처럼 거울 앞에서 몸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진영이는 어떤 취향일까? 뭘 좋아할까? 머리는 좀 내리는 게 더 어려 보이나? 나는 피팅룸 안에서 괜히 머리를 쓸어 넘겨도 보고 내려도 보았다.
"야, 아직 멀었어? 뭐 하는데 이렇게 오래 걸려!"
유정이가 부르는 소리에 커튼을 열었다. 민유정은 특유의 매와 같은 시선으로 나를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한 번 훑었다.
"... 신발이 에러다. 그거 계산하고 신발 사러 가자."
나는 내 운동화를 내려다보았다. 새로 산 지 얼마 되지 않은 새 건데?
"...? 이것도 괜찮은 것 같은데."
내 말에 유정이는 코웃음을 치며 커튼을 닫았다.
"갈아입고 나와. 신발은 누나가 사줄게."
한두 시간 정도는 돌아다닌 것 같다. 나는 내 옆에 놓인 쇼핑백들을 보았다. 이렇게나 많이 살 생각은 아니었는데... 유정이는 내 앞에서 달달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개운한 듯 탄성을 내뱉었다.
"아~ 속이 다 시원해. 이참에 니 옷장 싹 한 번 정리하자. 네가 만나는 그 여자분이 누군진 모르지만, 나한테 감사해야 해! 이런 친구가 어딨냐!?"
그녀는 케이크를 포크로 작게 잘라 입에 넣었다. 저렇게 단 걸 먹으면서 또 단 걸 먹다니.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아메리카노를 한입 마셨다.
"그래서 누군데?"
유정이의 새까만 눈동자가 빛났다. 나는 저 표정을 아주 잘 안다. 민유정은 내게 여자가 생겼다고 확신하는 듯했고,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그래... 이래서 내가 얘를 피했었지.
나는 여기서 유정이에게 그녀의 이야기를 하진 않을 생각이다. 지난 연애들을 통해 배운 건 이 자식이 내 연애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마이너스지.
태어나면서부터 늘 함께였다. 우리 형은 내가 유치원생일 때 유정이와 결혼하겠다고 했다며 놀리곤 했다. 나는 기억도 못 하는 이야기지만.
사실 초등학교 5학년 때쯤엔 실제로 좀 좋아하기도 했었다. 내가 가장 힘들 때 언제나 내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뿐이었다. 별다른 건 없었다.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그녀에게는 나 말고 다른 친구들이 많이 생겼다. 그중에는 사귀지 말았으면 하는 부류도 있었다. 김기태가 제일 큰 예였다.
김기태랑 처음 크게 부딪힌 것도 유정이 때문이었다. 그 새끼가 유정이에게 술을 먹인 걸 알고 눈이 돌았으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좋아하는 여자애여서라기보다는 친한 친구라서 그랬다. 하지만 그땐 내가 유정이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착각했었다.
"알아서 뭐 하게. 됐고, 계좌로 신발값 보냈다."
내가 송금을 마친 휴대폰을 내려놓자 민유정은 짜증을 부렸다.
"아~ 왜! 신발은 그냥 내가 사준다고 했잖아!"
나는 남은 커피를 한 번에 쭈욱 들이켰다. 내 머릿속엔 온통 진영이뿐이었다. 지금은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얼른 집에 가서 빨리 자고, 내일 일찍 일어나서 연락을 해볼 생각이었다.
"가자. 늦었어. 태워다 줄게."
민유정은 내가 말을 돌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나를 째려보며 가방을 챙겼다. 하지만 더 캐묻진 않았다. 오랜 세월을 같이 지내니 그녀도 내 성격을 알기 때문이었다. 먹다 남은 케이크가 보였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다이어트한다고 많이 먹지도 않을 거면서 꼭 시키는 거였으니까.
중학교 1학년 시절을 돌이켜보면 유정이랑은 참 많이도 싸웠다. 길거리에 서서 정신 안 차릴 거냐고 소리를 지른 적도 있다. 네가 무슨 상관이냐며 밀어내는 유정이를 제자리로 끌고 오는 데만 꼬박 1년이 걸렸다. 나는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는 진영이를 처음 본 날, 내가 그동안 생각했던 '사랑'은 전혀 다른 거였다는 걸 깨달았다.
정진영이 전학 오던 날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작고 하얀 게 반짝반짝했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이 무엇인지 깨달은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나는 투덜거리는 민유정을 뒤로한 채 먼저 걸어 나와 유리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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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 우진...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가? 너무 어색하다."
진영이는 아직 밥을 한술도 뜨지 못한 채 당황하고 있었다. 일단 밥은 좀 먹이고 얘기할걸 그랬나 보다.
나를 죽어도 기억해 내지 못하던 그녀가 지금은 하얀 얼굴을 복숭아빛으로 살짝 물들이고 있다. 내가 누군지 알고 나면 당장 벌떡 일어나서 가버릴 수도 있다고 최악의 경우까지 상상했던 나는 그녀의 반응에 조금 안심했다.
그녀는 짧게 올라가 있는 치마가 불편한지 연신 손으로 잡아 끌어내렸다. 나는 그 모습이 신경 쓰여 옆에 놓여 있던 담요를 그녀에게 건넸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첫 키스 상대인데... 못 알아보는 건 좀 심하지 않아?"
내가 던진 농담에 그녀는 마시던 물을 잘못 삼켰다.
"켁... 켁...! 뭐야,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녀는 당황한 듯 냅킨으로 입술을 닦아내었다. 당황하는 그녀를 보니 나는 어릴 때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에 미소를 머금었다.
"언제 적이라니 너무하네~ 나한텐 소중한 첫사랑인데."
내가 턱을 괴고 앉아 웃자, 그녀는 말을 돌렸다. 웃고는 있었지만, 그 미소가 어쩐지 불편하게 느껴지는 건 내 기분 탓일까?
"하하... 아무튼 뭐, 그래서?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너무 반갑다."
그녀는 이미 그때로부터 많이 멀어져 있겠지? 나는 혼자 추억에 젖어 있는 내 모습이 꼴사납게 느껴졌다. 그래서 얼른 장난기를 거두었다.
"나야 보다시피 경찰이 되었지. 넌? 요즘 TV에 자주 보이더라."
그녀는 그제야 편안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봤어?! 헤헤. 어떻게 보면 다 네 덕분이지! 나 요즘 진짜 행복해."
그녀는 그제야 처음으로 밥을 한술 떠서 입에 넣었다. 나는 그녀가 천천히 밥을 먹을 수 있도록 질문을 멈추었다. 그리고 나도 한입 떠서 입에 넣었다.
이런 외곽까지 나온 이유는 슬슬 사람들에게 인지도가 생기고 있는 그녀가 남 신경 쓰지 않고 편히 밥을 먹을 수 있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이곳은 외곽이라 평일 이 시간에는 사람이 잘 없을뿐더러 룸으로 되어 있어 조용히 밥을 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내 바람대로 지금 여기선 우리 둘뿐이었다.
"다른 애들도 연락하고 지내?"
"뭐 몇몇은... 넌? 전혀 연락 안 하고 지내?"
내가 되묻자 그녀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등을 등받이에 기댔다.
"난 뭐 수빈이 정도만. 수빈이도 성인 되고 나서 다시 만난 거지. 난 고등학교 때 또 전학 갔는걸."
나는 마시던 물잔을 내려놓았다. 고등학교 때 이미 이사를 갔구나... 어쩐지. 그래서 그렇게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던 거였다.
"다른 애들도 잘 지내고 있으려나? 궁금하다. 넌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 없어?"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물었지만, 나는 묘하게 신경 쓰였다. 지금 그녀가 궁금해할 만한 사람은 딱 한 명뿐 아닌가?
"너의 슈퍼 히어로, 홍정의가 어떻게 사는지 그런 게 제일 궁금하겠네."
내가 농담하듯 던지자 그녀의 얼굴이 홍당무 같아졌다.
"뭐라는 거야? 아니거든?!"
나는 그녀가 마냥 귀여워서 미소 지었다. 그녀는 연신 손부채질을 해댔다.
"정의는 외과 의사가 되었어. 지금 레지던트 1년 차."
나는 그녀가 밥을 마저 먹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녀의 앞접시 위로 계란말이를 하나 올려주었다.
"와~ 진짜? 의사가 되었구나~ 맞아. 걔네 집이 다 의사라고 했었던 거 같아. 레지던트면 엄청 바쁘겠다."
"바쁘지. 심지어 걔 중간에 과도 한 번 바꿨어. 1년을 버린 셈이지."
"어? 왜?"
"걔네 집에서는 피부과 가길 원했거든. 정의가 공부를 잘했잖아. 그래서 1년 했는데, 결국은 자기가 하고 싶어 했던 외과로 옮기더라구. 외과는 늘 사람이 부족하니까. 슈퍼 히어로답지?"
"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대단하다."
여전히 나는 그녀가 정의를 칭찬하면 질투가 난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우스워 피식 웃음이 나온다.
"지금은 박윤진한테 차이고, 슬픔을 일로 승화하고 있는 중이니까 좋은 기회야, 연락해 봐."
그녀는 방금 마시려던 물을 뿜었고 나는 냅킨을 내밀었다.
"뭐?"
나는 그녀를 놀리는 걸 멈추는 게 너무 힘들다. 나이가 스물일곱인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 그녀는 나를 잠깐 동안 새초롬하게 째려보았다.
"... 넌? 연애는 안 해?"
갑작스러운 그녀의 질문에 나는 밥을 먹던 손을 멈추었다. 사실 내가 제일 먼저 묻고 싶던 질문이었다. 나는 수저를 내려놓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 경찰 좋아하는 여자 별로 없어. 그러는 너는?"
나는 대수롭지 않은 척 물었지만,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나야 뭐, 남자가 엄청~ 많지? 끊이지 않지."
그녀는 뻥을 치거나 거짓말을 할 때면 늘 입을 앙다무는 버릇이 있다.
"... 허세는."
내가 코웃음을 치며 밥을 한술 더 뜨자, 그녀가 발끈했다.
"아니~ 지금 잠깐 없는 거고, 진짜 원래는 엄청, 되게, 완전 많아! 나 인기 진짜 많은데?"
그녀는 자백하듯 자신의 옆자리가 비어 있음을 알렸다. 내 얼굴엔 만족스러운 미소가 퍼졌다. 그때 그 족제비 그 자식도 남자친구는 아니라는 거잖아?
그래, 그거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