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금은 있었지만 가장 필요한 기계는 살 수 없었다
정해진 사업계획과 항목에 따라 집행해야 하는 사업비였다.
그런데 선정되고 나서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무엇을 살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살 수 없는가였다.
사업비에는 사용 기준이 있었다.
제품을 만들기 위한 재료비도 가능했고,
외주를 맡길 수도 있었고,
홍보비나 상표 출원비에도 사용할 수 있었다.
공간을 빌리거나 기자재를 임차하는 것도 가능했다.
대신 한 가지가 걸렸다.
자산취득 성격의 물품은 살 수 없었다.
자수 사업을 준비하는 사람에게 이 기준은 꽤 직접적인 문제였다.
가장 필요한 것이 자수기였기 때문이다.
제품을 만들려면 기계가 필요하다.
기계가 있어야 샘플을 만들고,
주문을 받고,
매출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지원금으로는 그 기계를 소유할 수 없었다.
임차는 가능했지만 구매는 달랐다.
여기서 지원금 700만 원의 의미가 조금 달라졌다.
통장에 700만 원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내가 쓰고 싶은 대로 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지원금은 사업자가 자유롭게 사용하는 창업 종잣돈이 아니라,
정해진 기간 동안 정해진 방식으로 정해진 사업계획과 항목에 따라 집행해야 하는 사업비였다
재료를 사고, 외주를 맡기고, 홍보에 쓸 수는 있었다.
하지만 사업이 끝난 뒤 내 자산으로 남는 물건을 사는 데는 쓸 수 없었다.
하필 이 사업에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그 ‘자산’이었다.
자수기
지원하는 쪽의 논리도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다.
세금으로 지원한 돈이 사업 종료 후 특정 개인의 고가 자산으로 남는 것을 제한하려는 기준은 필요하다.
그런데 생산 장비가 핵심인 업종에서는 다른 문제가 생긴다.
카페라면 재료를 사고 홍보를 할 수 있다.
서비스업이라면 외주와 마케팅에 비용을 투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제조에 가까운 사업은 생산수단이 먼저 필요하다.
그 생산수단이 ‘자산’에 해당하면
지원금이 있어도 별도의 초기자본이 필요해진다.
결국 같은 700만 원을 받아도
업종에 따라 체감하는 크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내가 알아본 공업용 자수기는 1,500만 원 안팎이었다.
문제는 단순히
‘지원금이 700만 원인데 기계가 1,000만 원 이상이라 부족하다’가 아니었다.
700만 원을 보태고 나머지 몇백만 원만 마련하면 되는 구조도 아니었다.
기계 구매 자체를 지원금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그러면 계산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지원금 700만 원.
기계 구입비는 별도.
지원금으로 처리되지 않는 비용도 별도.
부가가치세 역시 사업자가 부담해야 했다.
지원사업에 선정됐지만
창업자가 마련해야 할 현금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여기서 예비창업자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았다.
더 작은 장비로 시작하거나,
장비를 빌리거나,
자기 돈을 넣거나,
돈을 빌리는 것.
사업계획서를 쓸 때만 해도 ‘자금조달 계획’은 표 안의 한 칸이었다.
필요한 자금을 계산하고, 2천만 원 규모의 계획을 적어 넣었다.
하지만 심사가 끝난 뒤 실제로 배정된 지원금은 700만 원이었다.
선정은 됐지만, 필요한 돈까지 함께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결국 나머지 금액은 내가 마련해야 했다.
그때부터 자금조달 계획은 사업계획서 속 숫자가 아니라 현실의 문제가 됐다.
결국 다음으로 알아본 것은 대출이었다.
생각해 보면 조금 묘한 순서였다.
사업을 시작할 돈이 부족해 지원사업에 들어갔다.
지원사업에 선정돼 700만 원을 받았다.
그런데 가장 필요한 생산 장비는 지원금으로 살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돈을 빌릴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지원금이 쓸모없다는 뜻은 아니다.
700만 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분명 많았다.
문제는 지원금을 받는 것과 창업자본을 확보하는 것은 서로 다른 일이었다는 것이다.
특히 장비가 필요한 사업에서는 더 그랬다.
선정되기 전에는 지원금을 받으면 돈 문제가 조금은 끝날 줄 알았다.
실제로는 그때부터 돈의 종류를 구분하기 시작했다.
쓸 수 있는 돈.
쓸 수 없는 돈.
빌려야 하는 돈.
그리고 결국 내가 직접 감당해야 하는 돈.
700만 원을 받은 뒤 가장 먼저 배운 것은
돈이 생겼다는 사실보다,
그 돈으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다음 목적지는 은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