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천만 원을 먼저 썼지만, 금융이 보고 싶어 한 건 매출이었다
창업자라서 돈이 필요한데, 창업자라서 어려웠다
몇천만 원을 먼저 썼지만, 아직 보여줄 매출은 없었다
지원금으로 기계를 살 수 없다는 걸 확인한 뒤 가장 먼저 떠올린 건 대출이었다.
창업자에게 돈을 빌려주는 제도는 생각보다 많아 보였다.
소상공인 정바카라자금이 있었고, 지역 신용보증재단을 통한 대출도 있었다.
검색창에 ‘창업 대출’을 입력하면 수많은 상품이 나왔다.
처음에는 그중 하나쯤은 당연히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사업자등록을 했고,
사업장도 구했고,
기계와 집기, 인테리어 등
실제 창업에 들어가는 돈도 쓰기 시작한 상태였다.
사업계획서 속 창업은 이미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금융에서 보는 ‘창업자’는 조금 달랐다.
당시 부딪힌 가장 큰 조건은 두 가지였다.
업력 90일.
그리고 매출.
나는 사업을 시작한 지 90일이 지나지 않았고, 아직 매출도 없었다.
하나를 알아보면 업력이 걸렸고,
다른 하나를 알아보면 매출이 걸렸다.
‘창업자를 위한 자금’이라고 해서 막 사업을 시작한 사람이 곧바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조금 이해하기 어려웠다.
창업자가 돈이 가장 필요한 시기는 언제일까.
사업장을 계약하기 전일까.
기계를 사고 난 뒤일까.
매출이 안정적으로 발생하기 시작한 뒤일까.
적어도 내 경우에는 매출이 생기기 전이었다.
제품을 만들려면 기계가 필요했고,
기계를 놓으려면 공간이 필요했고,
공간을 열려면 보증금부터 인테리어, 집기, 프로그램, 재료까지 먼저 돈이 들어갔다.
매출은 그다음이었다.
그래서 창업 초기에는 돈을 벌기 전에 돈부터 쓴다.
나 역시 이미 몇천만 원을 창업에 넣은 상태였다.
그런데 금융기관이 확인할 수 있는 숫자만 놓고 보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업력 90일 미만.
매출 0원.
이미 얼마를 투자했는지와 앞으로 매출을 만들기 위해 얼마가 더 필요한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돈을 썼다는 사실이 곧 돈을 갚을 능력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금융기관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판단이다.
매출이 없는 사업자에게 돈을 빌려주는 것은 위험하다.
문제는 창업자의 시간표와 금융의 시간표가 서로 달랐다는 데 있었다.
창업자는 매출을 만들기 전에 돈이 필요하고,
금융은 가능하면 매출이 만들어진 뒤의 기록을 보고 싶어 한다.
조금 이상한 순서가 만들어졌다.
매출을 만들려면 돈이 필요했다.
그런데 돈을 빌리려면 매출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그 사이의 돈은 어디서 마련해야 할까.
처음부터 운영자금을 충분히 가지고 시작하거나,
가족에게 빌리거나,
개인 신용으로 조달하거나,
조건이 맞는 다른 금융상품을 찾아야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겼다.
그럼 창업 초기의 운영자금은 원래 가지고 있는 사람만 시작할 수 있는 걸까.
이미 몇천만 원을 사업에 투입했고 실제 사업장을 만들고 있는 사람에게,
첫 매출이 나오기 전까지 버틸 몇천만 원을 추가로 빌릴 방법은 없는 걸까.
그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정바카라자금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창업하면서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다른 제도들도 하나씩 조건을 확인해야 했다.
여성기업 확인도 마찬가지였다.
사업자등록증에 여성 대표자의 이름이 적혀 있다고 바로 모든 절차가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신청하고 확인받는 별도의 과정과 요건이 있었다.
사업자등록증 하나가 생기면
‘사업자’에게 열리는 문이 많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는 사업자등록 직후부터 바로 열리는 문도 있었고,
일정 기간을 지나야 열리는 문도 있었고,
매출이나 실적이 생겨야 접근하기 쉬워지는 문도 있었다.
지금 현재 그 문들 사이에 있다.
사업자는 맞는데 업력이 없다.
사업에 돈은 이미 들어갔는데 매출은 없다.
창업지원사업에는 선정됐지만 가장 필요한 자산은 지원금으로 살 수 없었다.
그리고 필요한 돈을 빌리려고 하니 이제는 ‘얼마나 사업을 했는가’와 ‘얼마나 벌었는가’를 보여줘야 했다.
이때 처음 알았다.
사업자등록을 하는 순간과
금융시장에서 ‘사업자로 인정받는 순간’은 같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창업지원에서는 가능성을 설명했다.
창업을 시작하면서는 내 돈을 먼저 넣었다.
그리고 금융에서는 그 가능성이 실제 매출이 되었다는 증거를 요구받기 시작했다.
결국 찾아야 했던 것은
‘창업자를 위한 대출’이 아니었다.
업력 90일도 되지 않았고, 매출도 0원이지만
이미 몇천만 원을 사업에 넣은 지금 받을 수 있는 돈이었다.
창업을 준비할 때는 무엇을 팔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막상 시작하고 보니 그보다 먼저 풀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첫 매출이 나오기 전까지, 무엇으로 버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