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사춘기

폭설주의보 유토피아

byAnna Jang

그날 폭설주의보 안전 문자가 온 것은 오후 5시 무렵. 퇴근 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눈 예보가 있었던가 생각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창밖에 눈이 시작되고 있었다. 눈은 가볍지 않았고, 한눈에 봐도 엄청난 양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눈이 내리기 직전에야 급하게 눈 예보가 폭설주의보로 격상된 것 같았다. 퇴근시간과 맞물릴 것을 우려한 듯했는데, 관측은 정확했다. 주차장을 빠져나왔을 때 이미 와이퍼를 작동시키지 않고는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고, 메타세쿼이아길을 지나 학여울역 사거리 앞을 지날 때는 이미 도로에 쌓인 눈이 상당해서 바퀴가 누르며 지나는 눈의 감촉이 엉덩이를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차를 버리고 내려서 눈을 밟으며 걷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이건 첫눈이지 않은가. 배부른 상상은 가속도가 붙으며 무섭게 내리는 눈앞의 폭설이 깨뜨려 주었다. 잠실대교에 다다라서는 이미 차선을 보고 운전하는 것이 불가능한 지경이 되었다. 20km/h를 넘기 힘들었는데 흡사 눈사태를 맞은 한강 다리처럼 보였고 다리 위에 있는 모든 차들이 깜박이고 있는 비상등도, 다리를 비추는 가로등도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다리 위를 지날 때 자꾸만 이병헌이 나왔던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떠올랐다. 쏟아지는 눈이 무섭게 느껴진 것은 아마도 내 생애 처음인 것 같았다. 시멘트 분진이 아니라 막 내리기 시작한 새하얀 눈이 온 세상의 모든 빛과 색을 소거할 수도 있구나. 콘크리트로 덮인 세상 같은 암울한 착시였다. 다행인 것은 눈이 내린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태라서 내린 눈이 다져지거나 얼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었다. 이대로라면 집까지 도착하는 것은 괜찮겠지 잠시 안도하면서 아이들의 위치를 확인한 것이었다. 바깥세상에 나도 놀란 참이라 '아차' 하면서였다. H는 좀 전에 귀가한 것 같았다. 우리 집. J는 수상하다. 현재 위치가 뜨지 않고 위치 정확도가 낮아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전화도 받지 않는다. 심장 박동이 약간 빨라진 채로 동네 근처에 이르자 눈앞에 빈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발이 허공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차선이 안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와이퍼를 빠르게 돌려도 앞이 보이지 않았고 당연히 거의 서있다시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인가, 스노우 디스토피아인가.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 낭떠러지와도 같은 절벽 속으로 발걸음을 떼어놓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몸과 마음을 낮추고 브레이크레서 발을 떼지 못한 채 주행이 계속되었다. 동네 어귀였지만 집은 가깝고도 멀었다. 가능한 바퀴를 천천히 굴러가게 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속도가 나지 않도록 제어해야 한다. 핸들을 잡은 두 손과 곧추 세워 앞으로 튀어나갈 듯 각을 접은 허리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와이퍼가 쉴 새 없이 앞창의 눈을 치우느라 분주했지만 밀어낸 눈들이 다시 양쪽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밀리느라 와이퍼는 처음 운동을 시작했던 수평 각도의 지점까지 더 이상 내려가지 못했다. 그나마도 와이퍼가 잠시 잠깐 밀고 지나간 창으로는 순식간에 눈이 쌓여 시야를 가려놓았다. 처음 느껴보는 눈에 의한 엄청난 속도감과 밀도감이었다. 풍경과 사물을 분간하는 것은커녕 눈 송이송이 사이의 빈틈을 찾아 빛과 색으로 상황을 어림할 수밖에 없었는데, 수천수만 번은 지나다닌 우리 집 앞 공원길이라는 사실도 좀체 위안이 되어주지 못했다. 다시 한번 J의 위치를 확인해 보지만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수 차례 새로고침을 하는 와중에 마치 기적처럼 접속에 성공했는데 이게 웬걸. '뚝섬한강공원이라고? 지금? 이 시간에?' 뚝섬한강공원으로 가서 J를 데려오려면 당장 유턴을 해야 했다. 잠시 잦아들었던 심장 박동이 곧바로 다시 빨라지고 있던 순간, 때마침 전화벨이 울렸고, 나는 깊이 안도했다. J였다.



고모! 눈이 너무 많이 와!


사뿐히 송이송이 내려앉는 설렘 가득 상기된 목소리에 다시 한번 안도하며 나는 아무렇지 않았던 듯 연기한다.



그치! 정말 눈이 많아. 고모 도로에서 멈춰 서있어.


아니 나는 B랑 한강에서 라면 먹고 오는 길인데,
진짜 잠깐이었거든?
근데 눈이 갑자기 너무 많이 와서 빨리 먹고 바로 집으로 오고 있는데
더더더 점점 더 많이 와서, 자전거가 잘 안 나가는 거야.
지금 대공원 정문 앞에 그 공터거든? 어쨌든 나 빨리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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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오면 왜 강아지처럼 밖으로 나가 뛰고 싶을까. 콘크리트 분진처럼 보이는 눈일지라도 나는 눈 속의 낭만을 택하겠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알게 되었고, 아이 역시 분주히 계획하고 움직였던 일과 중에 뜻하지 않게 폭설을 만나 제 갈 길을 못 가는 상황은 나와 똑같았다. 아마도 내가 방금 지나쳐온 공원길 어딘가에서 잠깐 자전거를 멈추고 눈덩이를 굴리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이 오는데 한강은 왜 갔는지' '누가 먼저 한강엘 가자고 했는지' '왜 간다고 말도 안 한 것인지' 묻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한강에서 라면을 먹고 신나게 라이딩 한 바퀴 할 생각이었을 텐데, 아이는 이렇게 갑작스러운 폭설에 계획을 수정하고도 오히려 신이 나서 한껏 달뜬 목소리였고 그 청량하고 생동감 넘치는 조잘거림에 내 입술이 씰룩댔기 때문이다.

공원 돌담길로 접어들어서도 어렵게 길을 더듬어가며 도착해 시동을 끄고 안도했을 때, 주차장 진입로를 거침없이 미끄러져 들어오는 J와 마주쳤다. 나에게는 진땀 났던 그 여정이 J에게는 쾌감이었던 듯, 아랑곳없는 속도감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J는 흡사 제대로 눈을 뒤집어쓴 곰돌이 푸우 같았다. 까만 패딩 점퍼의 모자를 쓰고 장갑까지 야무지게 쓴 머리와 어깨 위로 소복하게 쌓인 눈이 또렷한 아웃라인을 그려주었는데 가로등 불빛에 물들어 부드럽고 따듯한 주홍빛 빛을 뿜어 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새빨갛게 달아오른 두 뺨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아 맨손으로 두 볼을 감싸주었는데, 웬걸. 얼음장 같을 줄 알았던 두 볼이 온천수처럼 들끓으며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가만 보니 가로등 빛에 물들어 푸우처럼 보인 것이 아니라 패딩을 뚫고 피어오르는 J의 열기가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활활 번지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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