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을 견디는 텃밭

어쩌다, 텃밭 9

by혜솔

이틀에 한 번씩 새벽이면 물을 주러 텃밭에 나갔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대낮의 햇볕은 등을 밀어낼 만큼 뜨거웠고, 호미를 들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연일 울려대는 '야외활동을 자제하라'는 안전문자는 괜한 엄살이 아니었다. 그래서 며칠 동안은 텃밭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며칠 만에 흐린 하늘을 핑계 삼아 저녁 무렵 텃밭으로 향했다. 곧 비가 내릴 거라는 예보가 있었다.

텃밭은 마치 작은 사막 같았다. 바싹 마른 흙 사이로 풀이 무성하게 밀고 올라와 뻣뻣하게 버티고 있었다. 잡초와 농작물이 뒤엉켜 무엇이 풀이고 무엇이 작물인지 한눈에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다시 한 번 깨닫는다. 매일 들여다보고 안부를 나눌 때는 멀쩡하던 아이들이 며칠만 얼굴을 비추지 않아도 금세 앓아눕는다는 것을. 사람도 식물도 관심과 손길을 먹고 사는 모양이다.


가지는 상처를 입고 비실대고 있었고, 오이는 제 몸을 둥글게 말아버렸다. 방울토마토 줄기에는 웬 큰 토마토 하나가 낯선 손님처럼 매달려 있었다. 제자리를 잘못 찾아온 것인지, 방울들 사이에서 혼자 의젓하게 익어가고 있다.

장마라며 이틀 내린 비는 잠깐의 위로였을 뿐, 그 뒤로 이어진 뙤약볕은 식물들에게도 버거운 여름이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 비 덕분에 풀만 더 무성해졌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작은 텃밭이라도 하루도 사람 손길이 필요하지 않은 날은 없는 것 같다.


그래도 모두 포기하지는 않았다. 비틀어진 오이도, 상처 입은 가지도, 붉게 익어가는 토마토도 저마다 오늘을 견디고 있었다. 무엇보다 스피어민트와 들깻잎은 더위 속에서도 향기를 잃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니 싱그러운 향을 내뿜으며 "잘 왔어." 하고 먼저 안부를 건네는 듯했다.

온 김에 옥수수를 모두 수확했다. 며칠 못 오는 사이 알이 꽉 차 있었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알이 딱딱해졌을 것이다.

너무 자란 풀도 대충 베어냈다. 나는 잡초를 뿌리째 뽑아 없애는 농사를 좋아하지 않는다. 풀도 작물도 서로 기대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게으른 농부이기 때문이다. 길을 막은 웃자란 풀만 길이 보일 만큼 베어내고, 베어낸 풀은 다시 작물 곁에 덮어 준다. 여름 햇볕을 막아 주고 흙의 수분도 지켜 주는, 텃밭만의 작은 이불이 된다.


정리가 거의 끝나갈 무렵, 기다렸다는 듯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참 때맞춰 왔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수확한 옥수수를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폭염을 견뎌 낸 옥수수는 생각보다 실하고 단단했다. 껍질을 한 장씩 벗기며 가장 알이 고르고 예쁜 것들을 따로 골라 놓았다. 사돈댁에 보내드리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함께 나눌 사람을 떠올리는 순간, 뜨거웠던 여름의 고단함도 어느새 작은 보람으로 익어 간다. 텃밭은 수확의 기쁨을 나만 누리는 곳이 아니라, 마음까지 함께 나누게 하는 곳임을 또 한 번 배운다.

텃밭은 올해도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잘 자라는 날보다 견디는 날이 더 많다는 것을. 그리고 살아 있는 것들은 견디는 동안에도 조용히 열매를 준비한다는 것을.

폭염을 견뎌 낸 옥수수처럼, 사람의 마음도 그렇게 조금씩 영글어 가는 것이 아닐까.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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