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것

21~30

by숨 빗소리

21


우선고등학교에 근무한 이후 처음으로 집에서 일기를 썼다. 새 학기가 시작된 지 한 달이 넘게 지났는데 일기를 쓸 여유조차 없었던 걸까. 지난 한 달을 되돌아보며 나의 학교 근무를 정리해봤다.

분리수거장 청소 지도와 뒷정리는 매일 되풀이됐다. 분리수거장은 교정의 산바카라로가 시작되는 길목에 있어서 교장, 교감뿐 아니라 이사장까지 그곳을 자주 방문했다. 분리수거장은 하루만 청소 지도를 걸러도 엉망이 됐다. 월화수목을 깨끗이 정리한 후 금요일 하루만 소홀히 해도 금세 표가 났기 때문에, 나뿐 아니라 환경부장까지 관리자들에게 곧잘 지적을 받았다.

학생들 저축 업무는 매월 말에 처리해야 했다. 특히 3월은 처음 해보는 달이라서 더 서툴렀고 애를 먹었다.

‘현대문학감상반’ 동아리 운영과 준비도 능숙하지 못했다. 동아리 부원은 1호 가입생 민선우를 제외하면 모두 무기력한 학생들이었다, 1학년 진우 역시 그랬다. 담임교사들은 학급도 운영하면서 동시에 동아리까지 막힘없이 잘 지도하던데. 어떤 노하우가 있는 걸까. 연차가 쌓이면 내게도 그런 노련함이 생길까.

일주일에 두 번 있는 방과 후 문학 수업과 3학년 다섯 개 반의 국어 수업을 맡다 보니, 그 준비만으로도 주말이 다 가버렸다. 매주 수능 기출문제와 수능특강 교재를 미리 풀고 전부 분석해야 했다. 고등학교 3학년 국어 문제가 이리도 수준이 높았던가. 특히 경제나 과학·기술 분야의 비문학 지문 기출문제를 분석할 땐 머리를 싸매고 끙끙 매달려야 했다.

일기장에 그동안 일들을 정리해서 써보니 그래도 한 달간 참 열심히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기를 쓴 후 수업 준비까지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집 근처 산 밑에 있는 대형 병원 주차장을 산바카라 삼아 걸을 수 있었다. 주말 저녁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주차장은 한산했고, 그 넓은 공터로 붉은 노을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중등교사 임용시험에 다시 도전하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고 기간제 교사를 선택한 나. 지금 나는 그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걸까.’

당연히 처음이어서 교사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사립 고등학교만의 엄격한 분위기와 기간제 교사라는 불안정한 신분 탓인지 답답함과 스트레스는 더 쌓여갔다. 한 달 동안 임용시험을 위한 전공과 교육학 공부를 얼마나 했는지 따져 보았다. 제대로 하기는 했는가. 이런 식으로 공부한다면 벌써 몇 번이나 실패한 경험이 있는 임용시험을 제대로 치를 수나 있을까.



22


일요일 밤은 언제나 좀 쓸쓸했다. 모든 온라인 게임인의 습관적인 우울일까. 당연하게도 월요일이 더디게 왔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인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전화를 걸어 앓는 소리를 할 수도 있었지만, 그녀 역시 내일 출근을 앞둔 온라인 게임인. 괜한 걱정과 불안함을 주고 싶지 않았다. 나이 차가 많은 연하여도 나는 그녀에게 믿음을 주는 반려자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산바카라을 끝내고 옥탑방에 올라와 바카라상 앞에 앉았다. 형광등 대신 탁상용 전등만을 켠 채 일기를 쓰고 잠시 시집을 읽었다.

‘인생은 왜 이리도 쉽지 않은 것일까.’

이 밤의 고요하고 슬프고 쓸쓸한 느낌. 나는 읽고 있던 백석 시집 속 「흰 바람벽이 있어」란 시의 한 부분을 작은 수첩에 필사해 보았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는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陶淵明)’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부분


그렇구나. 외롭고 높고 쓸쓸해서, 그래서 오늘 밤은 더 매력적인 밤인지도 몰라. 그렇게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이 밤 유리창 너머 높이 솟아있는 먼 곳의 아파트 불빛들을 바라보며, 화기애애하게 웃고 있을 그곳의 뭇 가족들을 잠시 상상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강화도로 전화를 걸었다. 새어머니가 몇 년 전 암으로 돌아가신 후 지금은 강아지 두 마리와 시골집을 외롭게 지키고 있는 아빠. 기간제 교사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 잘했다고 응원을 해주면서도, 아홉 살 연상의 연인을 만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못내 아쉬움을 감추지 않으셨지. 그래도 결국엔 내 모든 것을 응원한다고 했다. 그런 아빠였다.

“뭐해요? 일요일 밤인데. 교회는 다녀오셨고?”

“벌써 갔다 왔지. 이제 밥 먹는다.”

“늦게 드시네. 저녁은 뭐에다가 드셔?”

“먹을 거 없을까 봐 걱정하냐. 아빠 혼자 알아서 잘해 먹는다.”

학교 일이 바쁠까 봐 요새 일부러 내게 전화하지 않았다고 한다. 학교 근무가 처음이니 당연히 애를 좀 먹을 거라고, 그게 당연한 거라고.

위로가 되면서 왠지 코끝이 찡해오는 건 무슨 일일까.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잠시 또 생각에 잠겼다.

그래, 일요일의 우울을 떨치는 방법은 결국 다시 새로움을 벅차게 꿈꾸는 것. 내일을 어떻게 만들어 갈까, 기대하는 것.

단지 ‘지식’과 ‘정보’만을 판서하고 그것을 다시 일방적으로 강의하는 교사는 되고 싶지 않았다. 독서토론 논술 교사를 하면서 익혀 온, 다짐해 온 나만의 수업을 하고 싶었다. 그걸 잊어서는 안 된다.

사월의 첫 주 일요일, 깊어 가는 봄밤이었다.



23


서른한 살이 되던 해 겨울, 방문 수업과 학습지로 유명해진 한 중견 교육 회사에 이력서를 넣었다. 그리곤 곧바로 그 회사 연수원에서 2주간 합숙을 했다. 독서토론 논술 교사가 되려면 그곳에서 수업에 대한 이론 교육과 실습을 필수적으로 이수해야만 했다.

그곳에서는 교사의 지식이나 학력 수준이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어떻게 하면 보다 학생 주도적인 독서토론과 논술 수업을 할 수 있을지, 그런 수업을 이끄는 교사를 어떻게 양성할지를 핵심적으로 다뤘다.

큰 기대를 갖고 들어간 곳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곳에서 배운 게 많았다. 같이 합숙하는 예비 교사들을 대상으로 모의수업을 해보면서 학생들의 사고를 키워줄 수 있는 독서토론 질문법을 공부했다. 단 하나의 교과서식 정답이 아니라 다양한 감상과 해석을 존중하면서, 학생들에게 더 깊이 있는 생각을 유도하는 게 그곳에서의 수업 목표였다.

가령 이런 식의 질문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일곱 난쟁이의 집에 혼자 있던 백설 공주는 왜 독사과를 들고 찾아온 마녀에게 문을 열어주었을까?”

바카라을 읽은 학생들은 다양한 대답을 할 것이다.

“착해서요.”

“마녀인지 몰라서요.”

“사과가 먹고 싶어서요.”

질문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학생들의 대답에 따라 각각 다른 후속 질문이 이어진다. 예를 들어 “착해서요.”라고 답한 학생에게는 “바카라에서 어떤 부분을 보고 백설 공주가 착하다고 생각했니?”라고 물으면서 백설 공주의 성격이 드러난 바카라 내용을 학생이 직접 말해보도록 유도한다. 단순한 답을 했던 학생은 교사의 후속 질문을 통해 자연스럽게 바카라 내용에 대한 추가적인 사고 과정을 거치게 된다.

학생들의 대답은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고, 그 유형에 따른 후속 질문의 방식도 다양하게 연구돼 있었다. 회사에서 추구한 독서토론 수업은 작품이 주는 여러 가지 메시지에 학생들이 깊이 있게 접근하도록 도와주면서, 궁극적으로는 교사가 아닌 학생 스스로 창의적이고 해석적인 질문을 만드는 걸 목표로 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독서토론 수업을 이제껏 경험한 적이 없었다. 내가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닐 땐 늘 정해진 문학 감상과 해석을 외우고, 그것만으로 문제를 풀었다. 십오 년 전 고등학생이던 당시에도 그런 수업과 교육 방식이 때론 불만이었다. 이육사의 시 속 화자의 염원은 해설서의 해석대로 반드시 ‘광복’이어야만 할까. 한용운 시인의 ‘님’은 칠판에 쓰인 대로 늘 ‘잃어버린 조국’이거나 ‘불교의 절대자’여야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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