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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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에게.
오전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어. 온몸에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으니까. 열심히 준비한 경주를 숨이 턱에 차오를 때까지 달리고 달렸는데, 결국 아무런 함성도 듣지 못하고 관중이 모두 떠난 텅 빈 경기장에 홀로 들어온 꼴찌 마라토너 같았어.
이건 나의 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아주 잠깐 했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마. 나도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자동반사 같은 일시적 감정일 뿐이니까.
레이스를 끝마치긴 한 걸까. 어쩌면 남들보다 길고 긴 나만의 코스를 갖고 있어서, 내 마라톤은 여전히 진행 중인 거라고 생각해. 경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계속 달려야만 해. 나의 골인 지점은 남들보다 더 먼 곳에 숨어있을 테니까.
포기하지 않을 거야. 이제 난 과거의 내가 아니니까.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아주 잠시만 미안해할게. 조금만 더 기다려줘.
연인에게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어젯밤 늦게까지 잠이 오지 않아 읽던 에세이집을 다시 펼쳤다. 그어놓은 밑줄을 찾아 그 문장을 수첩에 옮기는데, 곧바로 연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 메시지를 읽자마자 바로 전화를 한 것이리라.
“괜찮아, 자기야. 난 조금도 실망 안 했으니까, 나한테 미안해하지 마. 기분 괜찮지? 이제 시작이잖아. 난 세상에 자기만 한 선생님이 없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포기하지 마. 앞으로 만날 제자들을 위해서라도 계속 도전해 보자.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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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심 기대하고 있던 우선고등학교는 2017년엔 국어 정교사를 선발하지 않았다. 새해 정교사로는 수학 교사 1명을 모집한다는 공지 사항을 뒤늦게 읽었을 때, 나는 어떤 마음이었나. 아쉬웠을까. 미련을 버릴 수 있었기에 다행이었나. 우선고등학교에서 보낸 지난 일 년이 한 편의 영화처럼 머릿속을 스쳐 갔다.
2017년 1월, 나는 일단 우선고등학교 기간제 교사 채용 시험에 재응시했다. 우선고등학교는 기간제 교사에 대한 자동 갱신은 없었고, 모든 기간제 교사 과목을 일 년 단위로 재모집했다. 지난해 근무했던 교사도 응시할 수 있었지만, 올해 지원자들과 동일하게 원서를 또 접수해야 했다.
비민주적인 학교 문화와 영어 기간제 C교사에 대한 대처 방식 등 우선고등학교에 실망감이 없었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첫 교직 생활을 시작한 우선고등학교에 재응시하는 게 기간제 교사직을 유지하는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일 년 전과 똑같이 서류를 통과했고, 면접과 수업 실연을 거쳤다. 면접장에서 마주한 장면은 지난해와 같았다. 우측에 교장, 좌측에 교감, 가운데 앉은 이사장의 모습. 다른 점이라면 이번에는 이사장의 아들인 교감이 질문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수업 실연을 시작하고 채 일 분이 지났을까. 교감이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모의수업을 중단시켰다.
“강민 선생님은 작년에 우리 학교에서 고3 국어까지 맡으셨는데, 우리가 수업을 더 평가할 건 없고요. 바로 면접으로 넘어가시죠. 분필 교탁에 두시고 여기 의자에 앉으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교감은 내 서류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바로 나를 바라보며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했다.
“올해 또 우리 학교에 지원하신 이유가 뭐죠?”
나는 우선고등학교에서의 지난 일 년을 떠올리며 좋았던 점들을 솔직히 얘기했다. 더불어 학생들과의 토론 수업, 못해본 비교과 활동을 더 하고 싶다고 말했고, 비담임이었던 탓에 학생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해 아쉬었다고도 덧붙였다. 그래서 올해는 꼭 담임교사를 하고 싶어서 우선고등학교에 다시 지원했다고 답변했다.
“그러면 올해는 담임 맡으셔야겠네요."
교감이 웃으며 말했다. 작년 면접 때 처음 마주한 교감의 차가운 표정과 너무 달라서 놀랐고, 한편으론 재합격을 확신했기에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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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부천시립 상동도서관 열람실. 겨울방학도 겨우 열흘 정도가 남았다. 그때까지 남은 사립 정교사 임용시험은 단 하나였다.
공립 시험 이후로 두 차례 더 응시한 사립 정교사 시험 결과도 좋지 않았다. 하지만 우선고등학교에서 다시 일 년의 기간제 교사 자리를 확보했기 때문인지 공부할 때 불안하고 답답했던 마음은 많이 사라졌다. 여유를 갖고 공부를 하니 집중도 더 잘 되는 듯했다. 천천히 배움의 자세로 계속 도전한다는 마음이었다.
여전히 공부가 부족하다는 걸 느꼈다. 전공 지식만이 아니다. 시험을 위한 공부만 하다 보니 삶에 대한, 세계에 대한 이해와 고민, 사색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다음 주 마지막으로 예정된 사립 정교사 임용시험을 준비하다가 문득 든 생각이었다.
열람실 창밖을 보니 짧은 겨울 해는 벌써 지고 어둠이 내려앉았다. 집에 가는 길, 오랜만에 기분 전환 삼아 서점에 잠시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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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지하상가에 있는 서점은 제법 큰 규모의 지역 서점이었다. 시집 코너를 서성이다가 모처럼 인문학 서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래지 않아 눈에 띈 양장 표지의 자그마한 바카라이 있었다. 제목은 『공감필법(共感筆法)』. 표지 안쪽엔 ‘공부’의 뜻이 풀이돼 있었는데, 단순한 사전적 정의는 아닌 듯했다.
공부(工夫) 「명사」
1. 세상의 겉과 안을 동시에 바라보는 일.
2. 더불어 나의 바깥을 이해하는 일.
3. 타인과 함께 슬롯를 고민하는 일.
4. 읽고 쓰고 말함으로써 참여하는 일.
1부터 4까지 적힌 공부를 지금 제대로 하고 있는지 나 스스로 점검해 보았다. 해당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4번에 제시된 ‘읽고 쓰고 말’하기만 그냥 조금 하는 정도랄까. 그것도 ‘참여’를 위한 ‘읽고 쓰고 말’하기가 아니었다. 내가 하는 건 당장의 안정된 원(圓)에 들어가기 위한 삶의 몸부림에 불과했다.
그 바카라은 필자가 강연했던 내용을 보충해서 쓴 강연록 원고였다. 그래서인지 문체가 쉽고 가벼워 읽기 편했다. 눈에 띈 한 문장.
공부가 뭘까요? ‘인간과 슬롯와 생명과 우주를 이해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는 작업’입니다.
진정한 공부는 눈앞의 시험을 위한 것도, 안정된 체제로의 진입을 위한 수단도 아니었다. 잠시 바카라을 덮고 내 공부에 대해 되돌아보았다. 문득 지난 일상에서의 실패와 실망, 사소한 성공들이 아주 작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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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밤 흰 눈이 그토록 아름답게 보였던 건 그 눈이 이번 겨울 들어 참으로 드물고 오랜만에 내렸기 때문이다. 첫눈 이후 눈다운 눈은 처음이었다. 희소한 것은 그만큼 아름답고 가치있다고 여기면서도, 그것들이 너무 잦고 익숙해지면 또 금세 그 소중함을 잊어버린다.
나는 수첩을 펴고 또 오늘의 생각을 적었다.
그들이 아름다움을 잃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 아름다움을 잊는 것.
만남이 그랬고 사랑이 그랬다. 첫 학교와 첫 수업, 첫 제자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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