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와의 대화

3장 [미지의 경로] 17화

by아제

"엄마, 공부를 왜 해야 해?"

"그럼 굶어 죽을 거야?"

"공부랑 돈이랑 무슨 상관이야?"

"얘 좀 봐?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을 가야, 그래서 좋은 온라인 게임에 취직을 해야 밥 벌어먹고 살지!"

"그깟 돈 벌기 위해서 공부해야 한다고?"

"그깟 돈? 넌, 그걸 말이라고 하냐? 쓸데없는 소리 말고 가서 공부나 해!!"

"꼭 큰 회사에 취직을 해야만 해? 다른 일 할 수도 있잖아? 사업을 할 수도 있고..."


"사업은 아무나 하냐? 얘는 꼭 쓸데없는 소리만 골라서 한다니까!! 아이고야. 가슴이 다 철렁하네. 너, 사업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 망할 수도 있다고! 그리고 우리 주변에 사업하는 사람이 누가 있냐? 사업은 절대 안 돼! 엉뚱한 생각 말고 가서 공부나 하라고!"


"난 아직도 돈만 벌기 위해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게 이해가 안 돼. 그놈의 돈! 돈!"

"야, 이노무 시키야!!" 엄마가 빗자루를 들고 쫓아오는 바람에 방으로 도망쳤다.


정확한 말은 오래되어 흐릿하지만, 내 기억 속 대화는 대략 이런 식이었다.


중학생이던 나는 정말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 국어, 영어, 수학을 이렇게 죽어라 공부해야 한다고? 그리고 어디다 써먹을지도 모르는, 몇 년도에 누가 뭘 만들고 무슨 말을 했고 하는 온갖 것들을 죽어라 달달 외워야 한다고? 다 돈 때문에?


"아, 짜증 나. 공부하기 싫어!"


무지 연습장에 "돈!", "돈!", "그놈의 돈!"... 돈이란 단어를 하나 가득 썼다. 한쪽을 다 써도 뭔가 분이 풀리지 않았다.

"으아악!! 돈! 돈! 돈!" 엄마가 들을까 봐 입속으로 웅얼웅얼 소리 지르면서 서너 쪽을 채우자 간신히 진정이 됐다.


다행히 엄마가 좋은 머리를 물려주셔서 공부는 곧잘 했다. 엄마가 원하던 대학은 못 갔지만, 어디 가서 빠지지 않을 만한 대학에는 진학을 했다.


"회계사 자격증 따 두는 건 어때?"

"꼭 S그룹에만 취직해야 한다며? 근데 무슨 회계사야?"

"너네 외삼촌들 봐라. 회계사 자격증 있으니까 회사 다니다 나와서 회계사 사무실 차려서 지금 떵떵거리고 살잖아! 학생 때 미리 따두면 좋잖아! 사람 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회계사 공부한다고 몇 년 억지로 하는 척하다가 회계 과목 학점만 다 C, D로 깔고 포기했다. 절대로 내가 갈 길이 아니었다.


"여자 잘 만나야 한다. 아무 여자나 만나면 안 돼! OO대 정도가 딱 좋아. 여자가 너무 똑똑해도 안 좋아. 키는 160cm대 초반이 좋아. 키가 너무 커도 부담스러워. 그렇다고 너무 작아도 못 쓰고."

"아... 엄마!!!"

"아직 얘기 안 끝났어! 그리고 집안도 중요해! 어느 정도 유복하게 사는 집이 딱 좋아. 가난해도 안 되지만 너무 잘 살아도 안 돼! 적당히 유복하고 화목한 가정이 딱 좋아."


무슨 다트 게임인가? 수십 번을 던져도 한 번 맞을까 말까 한 정중앙을, 직업도 여자도 한 번에 맞추라고? 게다가 엄마가 찍어놓은 그 정중앙이 나에게도 정중앙인 게 맞는 거냐고!


마음속으로 동의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반박을 하는 순간, 밤새 이어지는 마라톤 설교에 아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적당히 "네, 네." 하고 도망 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틈만 나면 밖으로 싸돌아다니면서 가능하면 얼굴을 마주치지 않는 게 최선이었다.


엄마가 원하던 대로는 하나도 되지 않았다. 일반 대기업보다 더 돈을 많이 벌 수 있겠다고 판단한 외국계 회사로 갔다. 우여곡절 끝에 꽤 괜찮은 학교에서 유학도 마치고 돌아왔다. 그리고 교포 출신의, 엄마 생각보다 더 좋은 학벌의, 키도 나보다 큰 며느리에 만족하셔야만 했다.


내 나름대로는 엄마가 세웠던 목표를 초과달성한 셈이었다. 물론 다 지극히 주관적인 나만의 생각이었다. 내 고집으로 엄마보다 더 높은 목표를 세웠다고 생각했고, 30대 초반에는 그 목표를 모두 달성했다는 으쓱함도 있었다.


다 부질없었다.


그때부터 인생의 롤러코스터가 부릉부릉 출발했다. 온라인 게임도 가정도 짧은 시간 안에 부서졌다. 그런데 그건 첫 번째 급강하에 불과했다.


“안전띠 단단히 매세요!”라는 안내도 못 들은 채, 정말 한참 동안 “으아악!” 비명을 지르며 살았다.


애초부터 내 방향이 부실했던 거였다. 내 진짜 목소리가 원하는 방향이 뭔지는 제대로 생각조차 못 해본 거였다.


내 의지로, 스스로 목표를 세웠다고 생각했지만, 틀렸다. 엄마가 세웠던 똑같은 방향으로 좀 더 높은 목표를 세웠을 뿐이었다.


인정받고 싶었으니까.


지독히 듣기 싫은 잔소리였지만 엄마가 나를 지극히 사랑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니까. 기대를 저버리고 완전히 딴 길로 간다는 것은 상상도 해보지 못했으니까. 천성이 새가슴인 내가 그럴 수 있었겠는가.


한때 그렇게 좋아했던 음악을 했었으면 인생이 다른 식으로 펼쳐졌을까?


"음악은 취미로 하는 거야! 취미로 음악 하는 의사들, 얼마나 보기 좋냐! 너도 나중에 그렇게 하면 되지!"

중고생 때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잔소리였다.


"대학교 들어가면... 대학가요제 한 번 나가 볼까?"

고3 때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했다가, 엄마, 아버지 두 분이 "비상! 비상!" 알람을 울리고 전투태세로 돌입하셨다.


평소에는 티격태격하시던 두 분이 그날은 합심을 해서 나를 앞에 앉혀놓고 사인을 맞추더라. 그리고 끝도 없는 야단이 시작됐다. 그날, 밤을 꼴딱 새우며 혼났다.


예전에 "음성다중방송"을 티브이에서 제공해 주던 때가 있었다. 외국 영화를 볼 때 영어와 더빙 한국어가 동시에 들리는 서비스였다. 딱 그 짝이었다.


양쪽에서 숨도 쉬지 않고 "다다다다!!" 폭풍처럼 거칠고 흥분된 말들이 동시에 쏟아지는데... 솔직히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격앙된 분위기에 한마디도 못 하고 고개만 푹 숙인 채 죄인처럼 앉아 있을 뿐이었다.


아, 한마디는 기억이 난다. "음악을 한다고? 네가? 넌 재능이 없다고! 그러다 대학도 못 가고 3류 인생으로 전락해서 밥벌이도 못 하고 빌빌대고 살 거다. 아휴, 내가 이런 놈을 아들이라고 믿고. 아... 속상해! 도대체 우리가 너에게 못 해준 게 뭐가 있니?! 흑흑." 엄마는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나는... '아니, 대학을 안 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지금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는데... 대학교 가면 대학가요제도 나가볼 거다 하는 게 뭐가 문제지? 꿈이 생기면 공부를 더 열심히 하자는 마음도 들잖아!' 하는 생각에 무심히 그 말을 꺼냈을 뿐이었다. 내 생각과 상관없이 '대학가요제 한 번 나가보겠다'는 말은 역적모의 판결을 받았다.


그날 음악은 딱 포기했다. 그때 이후 "온라인 게임인 말고 다른 꿈? 아예 생각도 말아!" 하고 살기 시작했다.


이제는 나이가 많이 드셨지만 아직도 나에 대해 "얘가 이렇게 살면 좋을 텐데..." 하면서 걱정하시는 것들이 분명 있으실 거다. 몇 년 전부터는 그런 말씀은 거의 안 하신다. 그래서 최근 몇 년간은 부모님과 더 잘 지내고 있다.


뚱딴지같이 이제부터는 글을 쓰는 삶을 살겠다고 하면 또 어떤 말씀들이 쏟아져 나올지 모르겠다. 분명히 예전처럼 잔소리를 하지는 않으실 거다. 그러나 지금 나이에 전혀 새로운 길을 간다는 데에 또 불안과 걱정이 앞서실 것 같다.


"그냥... 다시 취직할 데는 없을까? 나이가 있어서 오라는 데가 없으려나?... 어쨌든 이왕 하는 거니까 한 번 잘해봐라! 응원할게!" 하시지 않을까.


어떤 말씀을 하시든, 부모님이 아직도 나를 지극히 생각하신다는 것은 잘 안다.


얼마 전 여친과 함께한 부모님과의 식사 자리가 생각났다.


"공부로는 한 번도 속을 썩인 적이 없었어." 엄마가 여친에게 내 칭찬을 하고 계셨다.

"공부하라고 엄청 볶으셨는데요..."

"그땐... 나도 어렸어서. 잘 몰랐어."


어쩌다 노래 얘기가 나왔다.

"얘가 노래를 얼마나 잘하는데! 너 들어봤니?"

수십 년 전에는 재능이 없다고 윽박지르시던 분이, 이제는 아들이 노래 잘한다고 열을 올리며 칭찬하고 계셨다.


이제 글쓰기에 대해서도 듣고 싶은 말이 있다.


“네가 진짜로 글 쓰는 걸 좋아하는구나. 좋아하는 걸 찾았다니 엄마도 기쁘다. 용기 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잘했다, 아들!”


이런 말까지는 쑥스러워 못 하실지도 모른다.


“괜찮아요, 엄마! 그럴 줄 알고 제가 대신 써드렸잖아요! 사랑해요, 엄마! 오래오래 건강하셔야 해요!”


"휴우우..." 다 쓰고 났더니 긴장이 좀 풀렸다.

"근데 오늘은 왜 안 나타나지? 오늘 에피소드는 본인 없이 여기서 따뜻하게 끝내라는 배려인가? 음... 절대로 그럴 캐릭터가 아닌데? 오히려 불안해지네?" 하고 중얼대는 순간,


"짠짜라짠짠 짠짠짠!!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당신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고깔모자를 쓴 하느님이 케이크를 들고 나타났다.


"어? 하느님! 이게 뭐예요? 오늘이 누구 생일이에요?"

"네 생일이잖냐! 모지란 놈도 생일은 축하해 줘야지. 생일 축하한다!! 해피버쓰데이 투 유!! 모지리!! 해피버쓰데이 투 유!! 크크크!"

"뿌우! 뿌우! 뿌우!" 하고 코끼리 나팔까지 연신 불어댔다.


"아잇! 뭐예요! 생일 지난 지 벌써 한 달도 넘었는데!"

"아니다! 오늘이 네 생일 맞다! 뿌우! 뿌우! 뿌우!"

"그만 좀 불어요! 정신없어! 생일 이미 지났다니까요? 무슨 하느님이 내 생일도 몰라!"


"생일 맞다니까? 오늘이 드디어 네 엄마 품에서 벗어난 날이잖냐! 그러니깐 오늘이 생일 맞지! 크크크!"

"아, 오늘 뭔가 정리된 건 맞지만... 그래도 지금 제가 몇 살인데... 이제야 태어난 거면... 어휴... 창피해..."


"깩! 하고 죽기 전에 다시 태어났으면 된 거지 넌 뭘 또 궁시렁궁시렁 말이 많냐! 뎃끼! 복 받은 줄 알아야지! 나이 90 먹고도 이런 거 모르다가 가시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데! 넌 그 돌대가리에 200살을 살아도 모르는 게 정상인데, 다행히 나를 만나서 일찍 깨달은 줄이나 알아라."


화제를 돌려야겠다.


"하느님, 근데 엄마들은 도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그냥 좀 놔두면 우리가 알아서 잘할 텐데... 그걸 그렇게 못 믿고 왜 끝까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어휴"

"그걸 왜 모르냐? 그게 엄마다. 엄마들은 원래 그런 거다 이 멍충아!!"

"아니, 자기들 삶도 아닌데 왜 자식들의 삶에 감나라 콩나라 자꾸 그러냐고요! 그런다고 콩나무에서 감이 나는 것도 아닌데요."

"엄마들이 그게 쉽게 되냐?! 넌 애를 안 낳아봐서 도저히 알 수가 없는 거다, 인석아!"


"탁!" 결국 고무신 세례를 한 대 맞았다.


"그래도... 씨..." 문득 인도의 코끼리 사육 얘기가 생각이 났다. 아까 코끼리 나팔을 봐서인가 보다.


"인도에서는 코끼리를 사육하려고 아기 때 발에 줄을 묶고 그 줄에 말뚝을 박아 놓는다면서요? 도망가지 못하게. 그런데 코끼리가 다 크면 발 한 번 번쩍 들면 말뚝이고 뭐고 다 뽑힐 텐데, 어려서부터 말뚝 줄에 묶여서 자라면 나중에는 맨 줄만 묶어놔도 도망가지 못한다면서요? 자식들을 이렇게 키우는 건 아니지 않나요?"

한 방 먹인 것 같았다.


"코끼리? 음... 코끼리는 그랬지. 근데 니들은 코끼리가 아니잖냐. 왜? 코끼리가 되고 싶냐? 코끼리로 만들어 줄까? 그럼 네 놈 징징거리는 소리도 듣지 않고 나도 좋을 것 같네? 오, 좋은 아이디어다! 이리로 와봐라!" 눈을 희번덕거리길래 얼른 저만치로 도망쳤다.

"정말, 무슨 말을 못 한다니깐! 정신적으로 그렇다는 거죠. 정신적으로!"


"그러니깐, 니들이 코끼리도 아니고 사람인데 왜 코끼리처럼 구냐는 거다. 코끼리가 아무리 영물이어도 코끼리는 코끼리일 뿐이다. 니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자기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인데. 쯧쯧. 어디서 비유를 해도..."


"계속해서 잔소리를 해대는 데 언제 자기 목소리를 들을 틈이 있냐고요!"

"그땐 듣기 어려웠겠지. 근데 그건 까마득한 옛날 일 아니냐!"


"어쨌든! 전 발에 줄이 묶인 아기 코끼리같이 평생을 산 느낌이라니까요? 솔직히 아쉬운 것도 많아요."

"그건 네가 아기 코끼리처럼 커서 그런 게 아니라 네가 새가슴이어서 그랬던 거다. 우리, 말은 똑바로 하자."

"아기 코끼리였든 새가슴이었든!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요!"

"누가 말리냐? 맘대로 하라니까?"


"근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 수 있냐고요! 솔직히 무섭기도 하고요! 평생 그렇게 살아보지를 못했잖아요!"

"그래서 내가 오늘이 네 생일이라고 안 했냐? 새로 태어났으니 이제부터는 당연히 네가 알아서 하는 거지. 내가 대신 살아주랴?"


"아, 됐어요! 아무튼 제 진짜 목소리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고요. 아직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이거 저거 다 남의 목소리 같아요. 진짜 목소리? 그건 뭔지 여전히 잘 모르겠어요.

근데, 남의 목소리라도 따라가면 중간은 가지 않나? 하는 생각이 또 들기도 하고... 막상 그렇게 가다 보면, 아 이건 아닌데 하게 되고. 아직도 진짜 머리 아파요!"


"퍽!" 단무지 방망이로 뒤통수를 한 대 세게 맞았다.


"아무래도 넌 맞아야 손톱만큼이라도 아이큐가 높아지는 것 같다. 좀 더 맞아야겠다."

"에잇! 이게 때려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저도 어렸을 때 엄마한테 빗자루로 엄청 맞았거든요? 그걸로 하나도 해결이 안 된다고요!"


"흠... 하긴. 네 아이큐가 충분히 높아질 만큼 때리려면... 그전에 내가 팔이 빠져서 죽을 수도 있겠다. 안 되겠네. 나하고는 더 이상 대화가 안 통하니 코끼리하고 직접 얘기를 나눠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에? 코끼리요?"


"딱!" 소리를 내며 하느님이 손가락을 튕겼다.


"뿌우우우우우우웅!"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잘생긴 코끼리 한 마리가 등장했다.


"이 친구가 코끼리 세계의 일론 머스크, 천재 코끼리다. 일반 코끼리와 달리 얘는 너보다 아이큐가 한참 더 높다고 생각하면 된다. 크크크!" 뭐가 그렇게 웃기는지 또 배를 잡고 흔들면서 낄낄거린다.


"안녕하세요, 천재 코끼리님!"

"안녕하세요, 새가슴님!"

엇쭈? 날 언제 봤다고 대뜸 새가슴이라고 부르냐. 근데 거대한 코끼리 앞에서는 대들 마음도 자취를 싹 감췄다. 궁금한 거나 물어보자.


"요즘도 그러는지는 모르겠는데, 아기 코끼리 발목에 줄을 묶고 그 줄을 말뚝에 묶어서 도망가지 못하게 사육한다면서요. 불쌍하게. 근데 이렇게 자란 코끼리들이 그 줄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방법은 아직 못 찾았나요?"


"아, 그게 쉽지가 않더라고요. 개중에 줄을 끊을 수 있다는 걸 깨달은 코끼리들이 간혹 있었어요. 그런데 줄을 끊었다는 걸 조련사들이 알아채는 순간, 바로 총을 들고 쫓아오더라고요. 그래서 줄을 끊어도 줄을 끊었다는 티를 내면 안 됐어요. 잘못하면 죽으니까요."

"아... 그게, 또 그런 점이 있었군요. 트라우마를 극복한다 해도 문제네요. 너무 어렵다."


"그렇죠. 그래서, 저희 코끼리 과학자들이 연구를 엄청 열심히 했어요. 그 트라우마 때문에 고생하는 코끼리들이 아직도 너무 많거든요. 그러다 한 가지 방법을 찾아냈어요."


"앗, 진짜요? 그 방법이 뭔데요?"


"가짜 다리요. 가짜 다리에 줄을 묶어 놓아 조련사를 안심시킨 다음, 실제 몸뚱이는 다니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다니는 거예요. 다 돌아다니고는 다시 돌아가서 진짜 다리에 줄을 묶고 아무 데도 안 갔던 것처럼 시치미 뚝 떼고 있는 거죠. 그게, 완벽한 해결바카라은 아닌데, 현재로서는 최선이에요."


"가짜 다리에만 줄을 묶어 놓고 도망가면 몸뚱이가 안 보이잖아요! 조련사들이 바로 알아채고 또 총 들고 쫓아오면 어떡해요?"


"저희가 임상 테스트를 엄청 많이 했거든요. 그런데, 코끼리들만 길들여진 게 아니었어요. 조련사들도 마찬가지로 자기들의 방식에 완전히 갇혀 있었어요. 그래서 딱 코끼리 다리만 확인하더라니깐요? 진짜예요! 저희들도 깜짝 놀랐어요. 분명히 다리 한쪽밖에 없는데, 그것도 가짜 다리요, 그 다리에 줄이 묶인 것만 확인하면 바로 안심하고 몸뚱이를 확인할 생각조차 하지 않던데요? 지금까지 30년 넘게 실험했는데도 가짜 다리가 걸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아, 조련사들도 자기 생각에 갇혀 있었구나. 코끼리만 묶여 있는 게 아니라 그들도 동시에 묶여 있는 거였구나.


"너무 놀랍네요. 진짜 천재세요. 그 가짜 다리 프로젝트를 직접 수행하신 거예요? 인간들에게도 적용 가능할까요?"

"네, 맨 처음 제가 직접 연구를 시작했고, 30년 넘게 실험을 이어오고 있어요. 코끼리하고 조련사에게는 이 방법이 먹혔는데... 인간 분들에게도, 자식과 엄마 사이에도 이게 먹힐지는, 글쎄 연구를 좀 해봐야겠죠?"


"어쨌든 감사합니다! 오늘 정말 놀라운 해결바카라을 들었습니다!"


"뿌우우우우우우웅! 혹시 또 궁금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불러 주세요!" 천재 코끼리는 우아하게 사라졌다.


"아무리 봐도 저 코끼리가 너보다 훨씬 나은 것 같다. 에휴, 내가 차라리 저 코끼리 놈 집으로 갔어야 하는데... 어쩌다 너 같은 놈 집으로..." 진심으로 아쉽다는 눈빛이었다.


"하느님, 저도 가짜 다리 하나 만들어 주세요. 천재 코끼리 방법이 일리가 있는 것 같아요!"

"나는 가짜 다리는 못 만든다. 내가 만드는 건 다 진짜밖에 없다. 하느님이 가짜 만드는 것 봤냐?"


"아, 그런가? 그럼 어떡하지? 일론 머스크가 로봇 다리 만들어서 팔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머리만 나쁜 줄 알았는데, 귀도 엄청 얇네? 코끼리가 한마디 했다고 바로 홀라당 넘어갔냐? 사기 치기에 진짜 최적의 타깃인데?"


하느님이 뭐라고 하는지는 이제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만약 가짜 다리에 줄을 묶어 놓으면 우리 엄마도 내 다리만 보고 진짜 안심을 할까? 우리 엄마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다 그럴까? 만약 그렇다면 이건 대박 아이템인데?

일론 머스크를 기다릴 게 아니라 어디서 마네킹 다리라도 구해서 연구를 해봐야 하는 거 아닐까?

음... 돈이 될 수도 있겠어. 홈쇼핑에서 판매하면 되지 않을까? 으악, 안 돼! 홈쇼핑은 엄마들이 보는 채널이잖아. 엄마들에게 그 비밀을 다 공개하면 어쩌라고! 절대 안 돼! 텔레그램 같은 데서 몰래 비밀리에 팔아야 하는 것 같아. 아는 사람들만 알게 입소문 내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아무것도 안 들렸다.


그러다...


"마네킹 다리?"


"...마네킹?"


그 단어에서 생각이 멈췄다.

깊은 물속으로 꾸르륵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위이잉."

머릿속이 진동했다.


다음 순간,

나는 어느 영화관 객석에 앉아 있었다.

대학 시절이었다.


"아! 이 영화...! 《마네킹》."





[다음 화 예고]


<말하는 마네킹>

3장 [미지의 경로] 18화


대학생 새가슴.

《마네킹》이란 영화를 보고 나서

"난 창의적인 일을 하며 살 거야!"

주먹을 불끈 쥐며 결심했었다.


그렇게 살았을까?

당연히 아니었다.

가슴이 아렸다.


하느님은

단무지 해머 세례를 퍼부으며

"마네킹같이 영혼 없이 계속 살 바에야

차라리 널 부숴버리겠다"라고 난리 치는데.


새가슴은 이대로 부서져 버릴 것인가?


10월 16일(금)에 발행되는

18화〈말하는 마네킹〉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