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미지의 경로] 15화
"형님은 바카라을 한 권 쓰셔야 할 것 같아요."
"내가? 바카라을?"
"보고서만 쓰기에는 좀 아까운 것 같아요. 글을 상당히 잘 쓰시네요."
후배의 한 마디가 내 몸을 살짝 흥분으로 진동시켰다.
"그러고 보니 내가 글을 좀 쓰는 것 같긴 하단 말이지? 흐흐! 어떤 말을 써야 읽는 사람이 고개를 끄덕일지, 무슨 말을 써야 발표를 듣는 사람이 딴지를 안 걸지를 나름 잘 파악해서 절묘하게 쓰잖아!"
정확히 말하면 글을 잘 쓴 건 아니었다. 타고난 예민한 성격 탓이었다. 내 신경계는 내 의사와 상관없이 사람들의 눈빛과 숨소리에 멋대로 해석을 붙이고, 그들이 어떤 말에 민감한지 미리 짐작하는 짓을 계속 해댔다. 그러다 보니 글을 읽고 발표를 듣는 사람들의 머릿속을 남보다 조금 더 헤집고 들어갈 수 있었을 뿐이었다.
즉, 글쓰기 재능과는 크게 상관이 없었다. 성격 탓이었다. 그럼에도 나름 글 좀 쓴다는 착각에 빠져서는, '나도 언젠가는 바카라을 내야 해!' 하며 그 대화 이후 20여 년을 더 보냈다.
한때는 파울로 코엘료 같은 작가가 되고 싶은 환상에도 빠졌었다. 왜 파울로 코엘료냐고?
그의 바카라에 반해서?
아니다. 물론 연금술사는 읽었다. 다른 바카라들은... 다 읽다 말았다.
그의 문장에 반해서?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문장은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보여주는 스티븐 킹 같은 문장이다.
설마... 잘생겨서?
뎃기, 이 사람아! 당연히 아니다.
그럼, 왜? 다른 작가도 많은데?
그건... 파울로 코엘료의 삶이 너무 부러워서였다.
반년은 브라질에서, 나머지 반년은 프랑스인지 스위스인지에서 보내면서 글을 쓴다는 그 모습이 너무 부러웠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었다.
그러려면 당연히 장소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직업이 있어야 했고, 그걸 가능하게 해 준 "작가"라는 직업이 너무 멋져 보였다.
게다가 스스로 '글 좀 쓴다'는 말도 안 되는 착각까지 하고 있었지 않은가. 초딩 시절에 '저는 대통령이 되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는 유치한 꿈이었다.
착각이든 환상이든 "글을 쓰고 싶다, 나는 써야 하는 사람인 것 같다"라는 생각이 현실 속으로 다시 파고든 것은 3년 전이었다. 글을 쓸 시간도, 생활의 여유도 생겼던 시기였다.
단 한 줄도 못 썼다.
어떤 글을 써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내 슬롯 경험의 전문성을 살린 바카라? 전문적인 경제경영서? 일반적인 자기 계발서? 내 생각을 담은 철학 에세이? 아님 일반 에세이? 소설? 시?
그 바카라을 쓰는 동력은 뭐지? 속에서부터 차오르는 할 말이 있는 건가? 바카라을 써서 강의나 사업으로 연결시키려고 하는 건가? 딱히 다른 할 일이 없어서, 그저 오랫동안 품어 왔던 숙제를 하듯이 쓰려는 건가?
막상 쓴다 해도 뭘 어떻게 쓰면 되는 거지? 그냥 노트북이나 핸드폰에 쓰면 되나? 블로그라도 열어야 하나? 아! 온라인카지노 작가 심사를 통과해서 온라인카지노에서 뭘 써야 하나?
근데... 이 모든 혼란을 뚫고, 또 실제로 힘겹게 쓰는 고난의 과정을 극복해 낸 후, 어찌어찌 바카라을 냈다 쳐 보자고.
그게... 돈이 될까?
그리고는 앉아서 계산기를 "탁! 타닥!" 두들겼다.
"솔직히 잘 모르겠네. 만약 이걸 사업이라는 관점에서 따져본다면... 인건비도 안 나올 것 같은데? 하아... 절대 쉬운 길이 아니네."
며칠 몇 주를 고민한 끝에,
"글은 그냥 모닝페이지만 쓰는 걸로 하자.
뭔가를 쓰고 싶은 욕구는 있는데, 뭘 써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떤 장르의 글을 써야 할지도 전혀 모르겠어.
음, 돈은... 일단 주식으로 한 번 벌어보자.
그래, 이제는 주식 투자도 작가처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전 세계 어디에서나 할 수 있는 일이잖아! 주식으로 성공하면 파울로 코엘료 같이 살 수 있잖아!" 하고 정했었다.
그땐 몰랐었다.
글을 쓰면 시간을 까먹는 것 같아도, 결국 글도 글쓰기 경험도 차곡차곡 쌓인다.
반면 주식은 경험이 쌓인다고 돈이 쌓이는 일이 아니었다.
돈을 이렇게도, 저렇게까지도 잃을 수 있구나 하는 경험만 겹겹이 쌓였다.
'주식 투자란 게 원래 그럴 수 있다'라고 머리로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내가 그럴 줄은 몰랐던 거다.
더욱 참기 힘들었던 것은, 돈을 잃을수록 내 존재 자체가 우주 속 먼지처럼 사라져 버리는 느낌이 자꾸 올라오는 거였다.
모닝페이지에서는 계속 주식 얘기를 쓰고 있었다. 무슨 종목을 살까요, 팔까요, 무서워요, 힘들어요.
우여곡절 끝에 글쓰기에 전념하는 시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고통스러웠던 지난 3년이 글쓰기의 자양분이 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고통의 시기를 겪다가 어느 순간 '아, 나는 이걸 써야만 해!' 하는 걸 찾게 된 거다.
"우주가 '일단 3개월은 무조건 피신해서 글만 써라!' 해서 시작하긴 했는데... 그건 맞았던 것 같아. 내 속에 쓸 말이 가득 쌓여 있었어! 좀 후련해! 머리도 맑아지는 것 같아!"
달력을 봤다.
"근데... 이제 3개월이 거의 다 되어가네? 잠깐만... 이제 앞으로 주식? 아, 주식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콩닥콩닥 하네... 하면 할수록 더 까먹는 거 아냐? 흑... 그러면 앞으로 어떡하지? 글 쓰는 걸로 조금이라도 돈을 벌 수는 있을까? 그게 가능할까? 글 쓰는 게 너무 좋기는 한데... 근데..." 말을 마저 끝내려는 순간,
"트악!!"
"악!" 뒤통수를 세차게 맞아 눈에서 불꽃이 튈 뻔했다.
"근데 돈이 될까?
이 말하려고 한 거지 이놈아! 크크!!"
키보드를 들고 하느님이 서 있다.
"말로 해요, 말로!! 이러다 뒤통수가 다 납작해지겠어요! 아니 빵구 나겠어요! 이 씨!!"
"네가 말이 통하는 놈이라야 말로 할 거 아니냐!"
"트악!!"
"윽!!"
자세히 보니 키보드가 아니라 키보드만 한 계산기다.
"넌 인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냐? 네 표현대로 하면 미지의 경로라면서! 앞으로 뭔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는 거 아니냐? 그걸 계산기 두드린다고 알 수가 있냐?"
"트악!!"
"그래서 계산기는 돈 계산용이 아니라 이렇게 너를 쥐어패는 용도인 거다!! 정신 차려라, 인마!! 크크크!!"
"트악!!", "트악!!", "트악!!"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우리 집은 표현의 자유가 완벽하게 금지된 곳인가?
"말도 못 해요?! 말도?!"
"말하면 뭐가 달라지냐? 걱정만 늘어나지."
"걱정할 만하니까 걱정하는 거 아녜요! 그럼, 모래 속에 머리 파묻고 나 몰라라 하는 타조처럼, 현실에 눈을 감아버려요?!"
"지금까진 왜 걱정 안 했냐? 아무 생각 없이 글만 잘 쓰던데?"
"그야... 아직 3개월이 꽤 남아 있었으니까..."
"겨우 그거냐? 그럼 3개월 연장해 줄게!! 크크크크크!!!"
"에잇! 무슨 은행 대출이에요? 그럼 그다음은요?!"
"3개월 또 연장해 주면 되지? 크크크!! 흐흐!!"
하느님은 신이 나서 폴짝폴짝 뛰며 깔깔거렸다.
"계속 계속 연장하면 되지? 크크!! 네 놈이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흐흐흐!!"
아, 진짜... 애초부터 3개월을 믿은 게 잘못이었나? 갑자기 급 불안해졌다.
"에잇!! 자꾸 말장난만 하실 거예요? 갑자기 불안해진다고요! 무서워진다고요! 제 인생을 또 막아서시는 거예요?!"
"저, 저, 옘병 망상증 또 시작이네! 어이구야!"
그러더니 귀를 덮는 헤드폰을 머리에 썼다.
"하느님!!!" 소리를 질렀다.
아무것도 안 들린다는 듯이 딴청을 부리더니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기면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하느님!!! 그냥 가시면 어떡해요!!"
"하느님!!!"
"...어!!?"
갑자기 내 몸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 나쁜 느낌이 들었다. 내 몸은 이미 연기처럼 변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슈우우우욱!!"
"안돼!!! 으아악!!"
정신을 차린 곳은 육상 경기장이었다.
또다시 ‘미지의 경로’ 트랙 위에 있었다.
내 불안이 물귀신처럼 나를 끌고 오는 그 노란 트랙.
단무지만 먹어대는 물소 아저씨가 오늘도 끝없이 뛰는 곳.
"으악!! 안돼!! 또다시 여기로 왔다고? 다시는 여기에 오기 싫었다고!!"
그런데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트랙이 내 눈앞에서 위아래로 살짝씩 흔들흔들 움직이고 있었다.
"헛, 둘! 헛, 둘!"
물소의 구령이 지나치게 가까이서 들렸다. 마치 내가 그 구령을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
"!!!"
물소 아저씨 몸속이었다. 내가 물소가 되어서 노란색 트랙 위를 헉헉거리며 뛰고 있었다.
"그만 뛰어! 이제 그만 뛰라고!!"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외쳤다.
물소는 여전히 뛰고 있었다.
아, 몸속에 들어와 있는 건 맞는데 몸을 통제할 수는 없구나. 그냥 구경꾼처럼 들어와 있는 거구나. 큰일 났다. 물소 아저씨 몸속에 갇혀 버렸다!
어떡해야 하지?
머리가 아파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 감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형체도 없이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순간 꿈속처럼 딴 세상이 펼쳐졌다. 물소의 몸속에서, 그 마음속으로 한 겹 더 들어온 것 같았다. 아, 이곳에는 내 몸이 있었다. 그러나 사방이 깜깜했다. 몸을 움직여야만 몸이 있다는 걸 간신히 알 수 있었다.
그때 눈앞에 뭔가 희끄무레한 게 보였다.
커다란 화이트보드였다. 보드에는 빽빽하게 글자들이 쓰여 있었다.
"크크크!! 어딘지 알겠냐?"
어디선가 하느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이건 또 뭐예요! 빨리 여기서 꺼내주세요! 제가 물소 아저씨를 얼마나 피하고 싶었는데! 심지어 그 몸속으로 들어왔다고요?! 정말 너무하세요!!"
"너 스스로 이 속으로 찾아들어왔다는 생각은 안 하냐? 내가 그런 거 아니다! 나는 네 마음이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도록 살짝 도와만 준 거라니까? 크크크!!"
"말장난은 그만하시고요, 빨리 여기서 나가게 해주세요! 이제 진짜 무섭다고요!!"
"네 마음이 여길 찾아들어왔으니 나갈 때도 너 스스로 찾아 나가야 한다!"
"네? 뭐가 어떻다고요?! 제가 어떻게 들어왔는지도 모르는데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가냐고요! 아, 진짜! 하느님이 아니라 악마예요?!"
"크크크!! 내가 아니라 네 마음이 악마겠지! 흐흐!"
"빨리 내보내 달라고욧! 제발요!!"
"여기서 정 나가고 싶으면...
물소 마음속 칠판을 바꿔 써라!!
미션이다.
크크크!! 행운을 빈다! 흐흐!!"
"칠판을 어쩌라고요? 하느님!! 칠판이 아니라 화이트보드거든요? 하느님!!, 하느님!!"
하느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분명히 '칠판을 바꿔 써라'라고 말했어. 도대체 뭔 말이야?!"
마음을 추스르고 화이트보드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하도 빽빽하게 글자들이 쓰여 있어서 처음에는 알아보기 어려웠다. 연습장에 마구 낙서를 해 놓은 것 같았다.
'단무지', '단무지', '난 단무지만 바라보면서 살 거야', '단무지', '단무지', '내 사랑 단무지'...
온통 단무지 얘기뿐이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다 보니 얼핏 봐서는 잘 보이지 않던 말들도 읽히기 시작했다. 단무지로 도배된 글자들 밑에 '경기장 밖은 너무 무서워', '나가면 죽을지도 몰라', '다시는 경기장 밖으로 안 나갈 거야'와 같은 두려움의 말들이 빼곡히 숨어 있었다.
낯익었다. 단어만 조금 다를 뿐, 내 머릿속에도 비슷한 두려움의 말들이 아직도 딱 붙어서 떨어져 나가지 않고 있었다. 정작 내 경기장이 어딘지도 모른 채 헤매면서 말이다.
에휴, 이런 물소보다 못한 놈!
"근데... 물소 아저씨도 참 쓸쓸하긴 하네. 좀 안쓰럽긴... 뭐야,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할 때야! 어쨌든, 이러니 맨날 여기서 단무지만 먹으면서 뛰고 있지!"
이 칠판 글씨대로 물소가 움직이는 거라면 나는 평생 여기에 갇혀있다가 죽어야 한다.
"에잇, 이 말도 안 되는 얘기들을 일단 지워보자!"
그런데, 지우개가 안 보인다. 아, 저기 말라비틀어진 비누 같은 게 지우개인가?
안 지워진다. 얼마나 오래된 글씨들인지 화이트보드에 딱 달라붙어서 전혀 지워지지가 않았다. 화이트보드가 아니라 유화 그림 같았다.
"어떡해! 이제 끝인 거야?"
갑자기 서러움이 밀려왔다.
"글 쓰라고 해서 글 썼잖아요!! 하라는 대로 다 했잖아요! 근데 도대체 왜 이러냔 말이에요!! 이제 더 이상 뭘 어떻게 하냐고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서러움이 더욱 복받쳤다.
"으아앙!! 흑흑!! 뭘 더 어떡하라고!!"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앙!! 열심히 살아보려고 했던 것뿐이잖아!! 근데 나한테 왜 이러냐고!!! 으아아아앙!!!"
눈물이 폭포수처럼 콸콸 흘러나왔다. 눈물과 콧물로 얼굴이 범벅이 됐다.
한참을 울다...
퍼뜩 무슨 생각이 떠올랐다.
"응...?! 혹시...?!"
벌떡 일어섰다.
얼굴을 뒤덮은 눈물과 콧물을 손으로 문질러 세수하듯 닦아냈다. 그리고 눈물과 콧물이 잔뜩 묻은 손으로 화이트보드를 벅벅 문질렀다!
닦인다!!
살았다!!
"으아아아앙!!", 벅벅벅!! 벅벅벅!!
"으아아아앙!!", 벅벅벅!! 벅벅벅!!
ㆍㆍㆍ
울다가 닦다가 울다가 닦다가를 한참 동안 계속했더니 한 귀퉁이가 드러났다. 그리고 거기에서 물소답지 않은 글을 하나 발견했다.
"나도 그때... 20억 기회 왔었을 때... 그냥 모르는 척하고 나갈걸... 돈을 받든 못 받든... 정말 후회된다..."
그 글 위를 '단무지'라는 글자로 도배해 놓아서 전혀 보이지 않았던 거였다. 물소도 속으로는 나가고 싶었던 거다. 그럼 그렇지! 희망이 보인다.
간신히 하얗게 확보한 손바닥만 한 공간에 새로운 글을 깨알같이 써넣기 시작했다.
'세상은 넓고 먹을 것은 많다', '경기장 밖에서 맛있는 음식이 줄지어 기다린다', '무소의 뿔처럼 밖으로 나가라', '경기장 밖으로 나간 물소', '평일엔 파스타, 주말엔 온라인카지노가 대기 중', '치킨과 돈가스도 목을 빼고 기다린다', 그리고... '짜장면과 단무지만 먹다 죽으면 까맣고 노란 과속방지턱으로 환생한다, 그러고 싶냐'...
"이게 제발 작동하기를! 하느님, 아니 우리 하느님 말고 진짜 하느님! 부디 저를 도와주소서!!" 떨리는 마음으로 기도했다.
그리고 눈을 떴다.
오!
더 이상 눈앞에 노란 트랙이 보이지 않았다! 물소가 트랙을 벗어났다! 저쪽, 경기장 한편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칠판 미션이 진짜로 작동하는 건가?!
"헛, 둘! 헛, 둘!"
가까이 다가가자 철문이 나타났다. 철문 위에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플래카드는 상당히 낡았다. 몇 년은 된 것 같았다.
"세계 음식 대축제!
미지의 경로 선수들 대환영!
카드 환영!"
이미 다 지난 축제 아닌가?
살짝 찜찜하다. 분명히 하느님이 걸어놓은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물소가 철문을 밀고 있었다. 오! 철문이 열린다! 원래 그냥 열리는 문이었구나. 애초부터 잠겨있는 문이 아니었네.
뭐야. 그냥 걸어서 나가면 되는 거였잖아?
"끼이이이익!" 육중한 소리를 내며 철문이 활짝 열렸다.
"찰칵!", "찰칵!", "찰칵!"
"펑!", "찰칵!", "펑!", "펑!", "찰칵!", "펑!"
연이어 터지는 플래시 라이트와 카메라 셔터 소리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이미지 씨! 이미지 씨 맞으시죠? 미지의 경로를 탈출하신 소감이 어떠십니까! 저는 P방송국의 A기자입니다."
"소감이 어떠십니까?! 저는 K방송국입니다!"
"어떻게 살아남으셨습니까?! W일보입니다!"
"건강은 괜찮으십니까?! 다안다 닷컴입니다!"
연속으로 쏟아지는 질문에 물소는 눈만 껌뻑거렸다.
"어... 이게 다... 무슨 일이죠?"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물소가 물었다.
"아, 아직 정신이 없으시군요. 그러실 만합니다. 이미지 씨가 계셨던 곳은 사이비 종교 단체 "미지교", 일명 "단무지교"라고 불리는 곳이었습니다. 얼마 전 단체로 탈출이 이루어져서 저희가 이 장소를 알게 되었죠.
취재 결과 이미지 씨만 아직도 탈출을 못하신 것으로 파악돼서, 저희 기자진들이 이미지 씨 탈출을 손꼽아 기다리며 이곳에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밖에서는 절대로 문이 열리지 않더라고요!"
"아... 여기가 사이비 종교 단체였다고요?"
물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네, 단무지라는 교주가 만든 사이비 종교입니다. 도력이 꽤 높아서 아마 단단히 홀리셨을 겁니다. 어휴 너무 마르셨네요. 그동안 음식도 제대로 드시지 못한 것 같아요. 일단 병원부터 가셔야겠어요!! 119!! 누가 119 좀 불러주세요!!"
그랬다.
경기장 밖으로 나온 물소는 누렇게 뜬 얼굴에 깡마르고 왜소한 체구였다. 물소라는 환상 속에 빠져 있었을 뿐이었다.
아, 근데 물소는 물소고! 나는?! 하느님! 저 이제 나가게 해주세요! 미션도 완수했잖아요!
119 응급차를 같이 탄 기자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참, 이미지 씨 앞으로 후원이 이미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딱한 사연이 널리 알려져서요. 후원사 중에 K푸드라는 회사가 평생 무료 온라인카지노 식사를 제공하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매일이요! 그러니 일단 끼니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다행이죠? 정말 잘 되셨어요!"
"아... 감사하네요. 근데 온라인카지노면 서양식 아점 말하는 거죠? 그 왜, 계란이랑 소시지, 빵 같은 거 나오는 거요."
"맞죠. K푸드의 온라인카지노가 아주 유명해요. 맛도 좋고 영양분도 아주 꽉 차 있어요. 좋아하시는 분들이 정말 많아요. 이미지 씨도 만족하실 거예요."
"근데...
그 온라인카지노에...
...
...
단무지도 함께 나오나요?"
"엣? 이런 단무지...!" 기자가 눈을 휘둥그레 뜨는 순간,
"으아악!!" 소리와 함께 드디어 물소 몸에서 빠져나왔다.
온몸이 샛노랗다.
물소를 태운 응급차가 시야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다른 기자들도 전부 차에 올라타 물소가 탄 차를 뒤따랐다.
모두가 떠난 이곳은 이제 고요했다.
"안녕, 물소!!
이젠, 진짜 다신 보지 말자!!"
터벅터벅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물소 아저씨는 이제 매일 온라인카지노를 공짜로 먹는다.
평생.
“그럼... 저 아저씨는 이제 먹고살 걱정이 없어진 거잖아?”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물소는... 경제적 자유를 이룬 건가?”
걸음을 멈췄다.
"젠장. 나는?"
※ 물소와 단무지의 이전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은 2화 <미지의 경로> ~ 3화 〈무지의 쳇바퀴〉를 읽어 보세요.
[다음 화 예고]
<경제적 자유의 민낯>
3장 [미지의 경로] 16화
넷플을 보던 새가슴.
아이들용 애니메이션을 보다가도
‘경제적 자유’를 생각해 내고
거기에 발목이 잡힌다.
답답해하던 하느님은 새가슴을
영계의 시설로 보내버리는데.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들려주는
경제적 자유에 관한 뜻밖의 이야기.
새가슴이 원했던 자유는
정말 그런 모습이었을까?
10월 11일(일)에 발행되는
16화〈경제적 자유의 민낯〉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