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터파크의 추억(II): 해골바가지

2장 [무지의 자각] 7화

by아제

"파도풀은 한 번 해봤으니까 됐어!

이젠 안 할 거야! 무서워!"


온몸이 젖은 채 파도풀 밖으로 걸어 나오면서 여친이 손사래를 쳤다.


우리 뒤편에서는 파도가 여전히 철썩이고 있었다.

"촤알아~~ 철썩! 철썩!", "카아아~~ 철썩! 철썩!"


파도풀은 워터파크에서 제일 무서운 시설은 아니다. 그러나 워낙 물을 무서워하는 여친이었다. 그나마 꼭 한 번은 해 보고 싶다고 해서 같이 들어간 거였다.


들어간 김에 장난친다고 파도풀 안쪽까지 여친을 끌고 갔다. 여친이 극한의 공포에 빠져 내게 매달리는 바람에 나까지 물만 왕창 먹었다.

화창한 날씨에 파도풀 물귀신 커플이 될 뻔했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가볼까?"

"몰라, 다 무서워 보여."


여기저기를 한참 돌아다니다 찾은 게 해골바가지였다.

정식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다들 해골바가지라고 불렀다.


이름은 무시무시하지만 아이들이 노는 공간이었다. 아이들 놀이터 꼭대기에 해골 모양의 큰 물바가지가 놓여 있었다. 바가지에 물이 차면, 벼락처럼 밑으로 물을 쏟아냈다. 물을 비워낸 바가지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고, 물이 차면 또 쏟아냈다. 지극히 단순한 공간이었다.


여친은 그게 그렇게 재밌다고 했다. 아직도 천상 소녀였다. 물벼락이 천둥처럼 쏟아지는 건 무섭지만 두 발을 굳건히 땅에 붙이고 중심을 잡을 수 있어서 안심하는 것 같았다.


물벼락을 쏟아내기 직전, "삐이익! 삐이익!" 요란한 경적으로 "조심하라! 조심하라!" 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해주는 것도 무서움을 달래주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막상 물벼락이 쏟아질 때면 물의 압력이 오금을 저리게 했다.


"꺄아악! 꺄아악!" 연신 비명을 지르면서도 여친은 신나서 깔깔거렸다.


"이제 가자. 더 할 거야?"

"한 번만 더해. 나는 여기서 이게 제일 재밌어. 흐흣"

"그럼 진짜 한 번만이다?"

"응, 알았어. 자기야! 물 온다! 꺄아아악!"


같이 갔던 일행들은 저 높은 곳에 있는 슬라이드를 타러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나는 해골바가지의 포로가 되어서는 세차게 떨어지는 물로 승모근, 이두박근, 광배근까지 단련하고 있었다. 집에 가면 평소에 한 개도 못하던 턱걸이를 세 개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스무 번 넘게 물벼락 세례를 맞은 후에야 해골바가지의 포로에서 해방됐다.


문득 하느님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떠올랐다.

"하느님, 해골바가지처럼, 재밌지만 무섭지는 않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나요? 겁 많은 여친도 이건 재밌어하네요?" 사실 혼잣말이었다.


"아흐흐흠~~~ 아, 뭐냐? 낮잠 자는데! 아, 졸려..." 하느님이 기지개를 켜면서 나타났다. 진짜 나타날 줄은 몰랐다. 그럴 양반이 아니잖은가!


"근데, 잠깐만! 네가 먼저 나를 찾았다고? 이건 반칙이잖아! 아니, 내가 왜 온 거야? 어휴! 잠결에 왔네, 잠결에 왔어! 얌마! 이건 무효다! 난, 다시 간다!"

"하느님! 잠깐만요! 아이, 이왕 오셨는데 뭘 다시 가세요! 여기 좋잖아요! 워터파크 구경이나 좀 하다 가세요."

이왕 왔으니 물어 볼 건 물어 봐야지.


"엥? 그러고 보니 컴컴한 집구석이 아니네? 오! 그래서 날 부른 게냐? 인석이 생각보다 기특한 구석이 또 있네? 음... 반칙은 맞지만 기왕에 온 거니... 그래! 저기 저 워터 슬라이드나 한 번 타고 가자! 오, 저 옆에 저것도 재밌어 보인다! 가자!!"


"아니, 아니요! 저는 저... 여친한테 돌아가야 해서요... 슬라이드는 좀따 혼자 타셔야 할 것 같아요..."

"그럼 그렇지! 네놈이 기특할 턱이 없지. 아, 놔, 이놈 참... 기분 잡치게 만드네?! 얌마! 그럼 왜 불렀냐고?! 남의 낮잠까지 방해해 가면서!"


"죄송해... 잠깐만요. 생각해 보니 뭔가 이상한데요? 아니, 저는 하느님 부르지도 못해요? 그게 뭐가 반칙이에요? 식사하시라고 부를 때면 1초도 기다리지 않고 바로바로 나오시잖아요!! 듣다 보니 진짜 이상하네?"

"내가... 그랬냐? 흠흠. 그건 밥이고. 이건 다르지. 지금은 밥상이 차려진 것도 아니잖냐!"


"무슨 하느님이 그렇게 본인 거만 챙기세요?! 수고하고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와라! 이런 게 진짜 하느님 아니에요?"

"헛쭈?! 너 지금 나한테 따지는 거냐? 이놈이 간이 배 밖으로 나왔네? 너 지금 여친 옆이라고 폼 잡는 거냐? 그러면 내가, 이야, 새가슴도 남자네?! 이럴 줄 알았냐?" 그러면서도 계속 여기저기 물놀이 시설을 휘휘 둘러봤다. 분명 워터파크에는 관심이 있는 눈치였다.


"그리고! 수고하고 짐 진 자들? 그거 다른 사람이 한 말이지, 내가 한 말 아니다? 설령 내가 했다고 쳐보자. 너는 수고한 것도 없고 짐도 하나도 없이 맨몸뚱이인데 뭘 아무 상관도 없는 말로 우기려 드냐?"


"어휴, 알았어요, 알았어요. 제가 다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그러지 마시고... 아까 제 질문에만 답해 주시고 얼른 워터 슬라이드 타러 가시라고요. 눈이 죄다 그쪽으로 가 있는 거 뻔히 다 보이거든요?!"

"흐흐!! 표가 좀 났냐? 아닌 게 아니라 재미있어 보이는 게 진짜 많은데?... 엉? 아니 이놈이?! 너, 자꾸 나하고 맞먹으려고 하냐? 이런 고연 놈 같으니라고!"


"촤아아아아악!!!"


순간, 해골바가지보다 열 배는 더 강한 물바가지가 내 몸 위로 세차게 쏟아졌다.

"크크크크크!! 물에 젖은 생쥐네, 생쥐!! 흐흐!!"

깔깔거리더니 기분이 살짝 풀어져 보였다.


"네!! 맘껏 물 뿌리셔도 돼요! 뿌리세요! 그냥, 제 질문에만 좀 답해주시라니까요?"


"촤아아아아악!!!"


"크크크!! 그래! 너 물로 얻어맞는 꼬락서니를 보니까 기분이 좀 풀린다. 크크. 지금 얼른 물어봐라. 마음 바뀌기 전에 후딱!" 오! 찬스다!


"네! 혹시, 해골바가지처럼 재미있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냐고요! 물이라면 겁부터 내던 여친도 그건 재밌어하던데, 새가슴인 제가 세상을 해골바가지처럼 사는 방법은 없냐고요. 그게 질문이에요!"


"해골바가지? 저 위에 있는 저거?... 음... 해골바가지라... 넌 어땠냐? 너도 재미있었냐?"

"저도 뭐... 재미는 있었는데... 근데 솔직히는 좀 싱거웠어요. 재미가 없지는 않았어요."

"그럼 별루였네. 근데 나한테 왜 별루로 사는 방법을 물어보냐?"

"아니..."


갑자기 말문이 턱 막혔다.


파도풀은 불쑥 공포가 몰려올 때가 있다. 안전하다는 걸 알면서도 당황하는 순간이 있고, 그럴 때는 여지없이 코로 입으로 물이 들어가서는 콧날이 시큰해지곤 했다.


해골바가지도 세차게 물벼락을 맞는다. 그러나 파도풀처럼 순간적으로 당황하게 만드는 공포는 오지 않는다. 그래서 좀 싱겁지만, 그래서 또 마음이 느긋해진다. 파도풀은 파도풀대로 해골바가지는 해골바가지대로의 재미가 있다.


"말을 시작했으면 끝까지 해라, 인마. 그래서 뭐 어쨌다고?"


"그게요... 해골바가지처럼 두 발을 땅에 딱 붙인 채 안정감 있게 살면 무슨 일이 닥쳐도 공포스럽지 않게, 그러면서도 인생을 재밌게 살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여쭤본 거죠."


"너는 그게 별루라며! 근데 그걸 왜 물어봐?"


"그냥 하느님이, 해골바가지처럼, 이제 물이 쏟아지니 조심해라 하고 경적도 울려주시고, 또 물이 마구 쏟아져도 흔들리지 않게 단단한 바닥도 돼주시고 하면, 그럼 저도 해골바가지에서 노는 것처럼 살 수 있잖아요. 앞으로 어떻게 될까, 내가 나이 먹어서 뭘 해 먹고살 수 있을까, 이런 막막한 고민에 자꾸 빠지지 않고 말이죠. 그래 주실 수는 없냐고요! 지금은 한없이 밑으로 빨려 들어가는 파도풀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것 같다고요!"


"이놈이 물벼락 맞고 신나게 놀다가는 갑자기 왜 또 울컥하고 지랄이랴? 오리지널 물벼락 맛을 봐야 정신 차리겠구먼?"


"촤아아아아악!!!", "촤아아아아악!!!", "촤아아아아악!!!"


"으흐흐흐흐!! 앗 차가!! 으흐흐흣!!!... 화내지 마시고요... 제가 답답해서 그래요, 답답해서!!"


"근데... 도대체 너란 놈은 왜 내가 경적도 안 울리고 바닥이 돼주지도 않았다고 착각하는 게냐? 하여간 싹퉁머리 없는 돌대가리 시키!! 얌마 난 항상 미리 알려줬고 항상 너를 받쳐주고 있었다니까? 네가 귀를 틀어막고 안 듣고는 실제로는 바닥인데 물속이라고 맨날 착각한 거라니까?!"


"네?"


"이젠 너하고 점점 말 섞기도 싫어진다 이놈아. 나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해골바가지가 아닌 적이 단 한 번도, 아니 단 한순간도 없었다 이놈아! 지가 해골바가지가 재미없다고, 이건 해골바가지 게임이 아니라고 스스로 믿어 놓고서는, 나보고 뭐 어쩌라는 거냐? 진짜로 싱크홀 같은 바닥을 한 번 보여주랴?"


"그럴 리가... 없는데..."


"별 시답잖은 얘기하려고 낮잠 자던 사람까지 깨우고는, 기껏 한다는 말이 겨우 그거냐? 난 또 뭐라고! 어휴. 에잇, 나는 최고로 무서운 슬라이드나 타러 가야겠다! 얌마! 쓸데없는 생각일랑 걷어치우고 너도 빨리 꺼져라! 저기 네 여친이 기다린다."


하느님은 휘적휘적 사라져 버렸고 나는 머리가 띵해진 채 멀뚱히 서 있었다.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맞는 것도 같았다. 나는 바닥이 있는 물벼락 앞에서도, 자꾸 물속으로 가라앉는다고 믿으며 허우적댔다.

그러고도 이렇게 두 손 두 발 멀쩡하게, 여친까지 만나서 해골바가지 밑에서 신나게 놀고 있지 않은가.


"오빠! 오빠, 뭐 해! 얼른 와. 우리 해골바가지 한 번만 더 하러 가자! 빨리 와!"

"응?! 그래, 알았어!"


'하느님이 해골바가지였나? 맨날 무서운 척 폼 잡고 물벼락만 뿌려대는 것 같았지만 밑에서는 알아서 다 지켜주시는...?'


에잇, 뭔 말도 안 되는 생각이야?! 나는 저 양반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절대 믿을 수 없다고!


암, 절대 믿으면 안 되고말고! 그러다 또 무슨 뒤통수를 맞을라고!


생각이 자꾸 왔다 갔다 했다.

하느님을 믿을 순 없는데,
멀쩡히 살아서 놀고 있는 건 맞고.

음... 하느님이 해골바가지인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운이 좋은 건가?





[다음 화 예고]


〈나는 운이 좋나?〉

2장 [무지의 자각] 8화


“나는 운이 좋다!”를 애절하게 외치는 새가슴.


하느님은 그런 확언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며

또 딴지를 건다.


하느님과 대화를 나눌수록

점점 더 미궁으로 빠져들고 만 새가슴.


과연 새가슴은 원하는 대로

운 좋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9월 23일(수)에 발행되는

8화 〈나는 운이 좋나?〉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