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좀 이런 자유가 그립다

byMari

비록 04:30 모닝콜 소리에 눈은 떴지만, 문득 오늘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출근도 접고, 해야 할 일도 모르는 척 ‘불가피한 사정으로 오늘 연차를 쓰겠습니다.’라는 카톡 문자 하나만 날리고 나중의 후폭풍 따위는 지나가는 누렁이한테나 던져주고 다른 의미의 특별한 외출을 서두르고 싶다. 남편과 큰애, 작은애는 다 큰 성인이니 알아서 움직일 터, 궁금해하지도 말고 나간다고 알리지도 말며 헝클어진 머리는 대충 모아 고무줄로 묶고 검정 패딩의 무성한 라쿤 털은 시원스레 떼어버리고 패딩의 후드를 덮어쓴 채 가방을 메고 현관문을 밀고 나가 미명의 새벽 공기와 눈을 마주치고는 큰 숨을 들이마시는 그런 자유가 나는 좀 그립다.


앞뒤 재지 말고 빌라 단지를 벗어나 지축에서 3호선 지하철을 타고 강남 고속터미널까지 이어폰으로 BTS의 ‘봄날’을 들으며 잠시 지하철 문 옆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으면 이제 막 겨울을 털어내고 봄 햇살의 기운을 만끽하며 반짝거릴 바다를 떠올리는 그런 여유를 맛보고 싶다. 잠원역쯤에서 미리 내려 강남 고속터미널 매표소까지 20~30분 걸어갈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은 일탈이라며 혼자서 고소한 웃음을 흘리다가 저기 어디쯤 전주나 속초나 안동이든지 거창이든지 그것도 아니면 부산 광안리 바닷가까지 그냥저냥 흘러 들어가 모래 위에 펑퍼짐한 엉덩이를 깔고 바다 끝을 무념무상 바라보는 그런 자유가 나는 좀 그립다.


미지의 땅을 향해 가는 탐험가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고속버스 창밖으로 펼쳐지는 3월의 나무와 꽃들과 바람에 넋을 빼앗기든, 겨울의 끄트머리와 봄의 머리 깃이 아웅다웅 다툼을 벌이는 혈기 왕성한 풍경에 온전히 시선을 빼앗기든 그저 의식의 흐름대로 비.로.소. 떠남을 만끽하고 싶다. 지나는 어디쯤 휴게소에서 잠깐의 시간에 걸음을 재촉하면서도 알감자에 뿌릴 소금도 살뜰히 챙기고 휴게소 명물이라는 소떡소떡에 흠뻑 빠져 하마터면 못 탔을지도 모를 우등버스에 올라타 휴! 하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웃지 못할 에피소드 하나를 만들었다는 소회를 풀어 소확행 1이라 쓰고 메모를 채울 조금은 어리바리한 50대 아줌마라서 다행이라 여길 그런 자유가 나는 좀 그립다.


낯선 시외버스 터미널에 내려 후각에서부터 느껴지는 비릿한 바다 내음에 몸을 맡기고 걸으며 내 인생에서 한 번도 부딪쳤을 리 없는 건어물 점포의 주인장에게 시답잖은 농담을 건네는 배짱이 나에게도 있었음에 스스로 놀라면서도 호기롭게 건어물을 고르며 가능한 한 더 유려한 언어유희를 즐기고 싶다. 강남 호화로운 저택이나 아파트에 사는 사모님은 아니지만, 그저 돈 좀 있어 보이는 서울 여사님 행세를 하며 다시마며 디포리와 멸치, 감태와 말린 보리새우를 한 상자씩 주문해 택배로 보내 달라고 값을 치르면서도 더 살 게 없는지 둘러보는 그런 여유만만한 태도로 주인장의 왁자지껄한 치사도 호탕하게 받아주는 그런 자유가 나는 좀 그립다.


내리쬐는 한낮의 햇살을 시나브로 받으며 멀지 않은 바다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그 진동을 온몸으로 느끼며 나에게 주어진 직립 보행의 선물과 끝내 오늘의 나를 있게까지 돌봐 주신 신에게 참으로 깊은 감사의 인사와 함께 덤으로 앞으로도 승승장구하게 하소서 간구하고 싶다. 점점 가까워지는 바다에 읍하며 나아가 이런 자연을 온전히 하사하신 신의 아량과 하루의 일탈을 연차로 맞바꾼 나의 배포와 거기에 맑은 하늘과 청아한 바람을 보내준 것까지 다 감사하며 이참에 어떤 분노와 어떤 미움도 결코 참지 못하게 했던 나의 지인들 모두를 용서하노라 마음먹으며 세상과 화해의 손을 내밀 수 있는 그런 자유가 나는 좀 그립다.


뱃속 저 아래쪽부터 허기가 느껴지면 바닷가 모래밭에 체면치레 없이 주저앉았던 엉덩이의 모래를 털고 끼룩끼룩 날아대는 갈매기에 아는 척 웃음을 던지고 한 번쯤은 미친 듯 두 팔을 치켜올려 하늘이라도 날 수 있는 것처럼 파닥파닥 인공의 날개를 그렇게 퍼덕이고 싶다. 그런 흉내가 지칠 때쯤이면 다시 모래밭에 철퍼덕 앉아 파도와 갈매기와 수평선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근처 어시장이든 재래시장이든 먹거리를 찾아 국밥이든 비빔국수든 어묵이든 김밥이든 곤드레밥이든 뜨끈하거나 매콤하거나 달콤 쌉싸름한 요기를 하고 다시 어디를 가볼까 허세 부리며 관광 지도를 펼쳐보는 그런 자유가 나는 좀 그립다.


그렇게 낯선 도시의 고즈넉함과 이색이 주는 향취에 빠져들어 허우적대다 무심코 눈에 뜨인 길가 2층 카페가 너무 맘에 들어 딸랑 방울 소리를 들으며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면 아늑한 느낌의 낮게 드리운 조명과 그리 화려하지 않은 내부 장식이며 소박한 가구들이 마음에 쏙 들어 무작정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키고 소파에 파묻히고 싶다. 커피 맛이야 어떻든지 간에 한나절을 앉아 있어도 좀이 쑤시지 않는 그런.


불현듯 부산에 사는 지인들이 생각나 같은 과 동기든 동아리 동기든 사촌 언니든 사촌 오빠든 누구든 휴대폰에 저장된 번호를 눌러 정겹고도 수다스러운 대화로 뭉쳐 한 명이라도 나를 위해 달려 나와 주는 누군가 있다면 두 손을 마주 잡고 카페가 떠나갈 듯 잠시 요란한 인사를 나눈 후에 살아온 이야기를 끝도 없이 나누고 싶다. 모습은 달라졌어도 같은 시간을 이고 살았던, 그래서 바로 어제 만난 것 같은 그런.


어둠이 내리면 아, 나를 기다리는 가족이 내게도 있었지 새삼스럽게 무언가 가슴이 짠해지는 그리움으로 전화를 하고, 사랑스럽고 걱정 가득한 목소리에 위안을 받으며 이 먼 거리를 언제 달려가나 하며 조급하고도 설레는 마음으로 다시 버스에 오르고는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나만의 꿈을 꾸기 위해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에서 고요하게 잠에 스며드는


그런 자유가 나는 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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