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짜리 일이 하루가 된 뒤 생긴 변화
새 회사로 이직하고 AI를 업무에 조금씩 적용해 보던 즈음이었다. 어느 날 설계 중이던 시스템을 개선할 새로운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생각을 몇 장의 슬라이드로 정리해 디렉터와의 1:1에서 설명했다. 그는 "Impressive!"라며 꽤 흡족해했다.
이제 실제로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확인할 차례였다. 그러려면 실제로 구현해 실험하고 데이터를 뽑아야 했다. 다만 언제까지 결과를 보여주겠다고 디렉터에게 못 박지는 않았다.
이전 회사에서 비슷한 일을 손코딩으로 했을 때 꼬박 2주 정도 걸렸던 기억이 났다. 코드를 작성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디버깅에 대부분의 시간을 썼다. 지금 회사에서는 AI를 쓸 수 있었지만, 그것으로 시간이 얼마나 줄어들지는 아직 감이 없었다.
미팅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코딩 에이전트에게 일을 맡겨봤다. 웬걸. 하루 만에 구현이 끝났고 실험 결과까지 나왔다. 헛웃음이 나왔다. 야근을 하며 2주 걸려 하던 일이 단 하루 만에 끝난 것이다.
다음 1:1에는 1차 결과를 정리해 들고 들어갔다. 결과를 보여주며 신나게(?) 말했다.
"이거 AI로 해봤는데요, 하루 만에 됐습니다. 예전 회사에서 2주 걸리던 일입니다."
이 말엔 'AI를 꽤 잘 활용하고 있다', 그리고 솔직히 '나 잘했지?'와 같은 마음도 조금 섞여 있었다.
그 뒤로 에이전틱 코딩의 위력을 실감하며 사용 빈도를 높여갔다. 아이디어를 보완하고, 새로운 기능을 추가하고, 실험 조건도 다양하게 바꿔가며 데이터를 뽑았다.
그러다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는 아이디어가 떠오른다고 이렇게까지 하나하나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새로운 생각이 생기면 머릿속에서 먼저 비용부터 계산했다.
"이걸 검증하려면 2주는 걸리는데, 정말 해볼 가치가 있나? 더 우선순위가 높은 일도 있는데?"
2주라는 비용은 그 자체로 아이디어를 걸러주는 필터였다. 해볼 만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자연스럽게 나눠줬다. 그런데 이제는 하루면 끝난다?
"그 정도면 한번 해보지 뭐."
과거에는 비용 때문에 버렸을 아이디어들이 살아남기 시작했다. AI가 낮춘 것은 작업 시간만이 아니었다. '할 만한 일'의 가격도 같이 내려갔다.
문제는 가격이 내려가자 수요가 늘어났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2주의 비용 때문에 포기했던 실험을 이제는 하루면 해볼 수 있다. 하나를 해보고 나면 다른 변형도 궁금해졌다. 조건을 하나 더 바꿔보고 싶었고, 다른 아이디어도 시험해보고 싶어졌다. 예전에는 "굳이?" 하며 버렸던 것들이 이제는 "몇 시간이면 되는데?"로 바뀐 것이다.
그런데 생산성 향상으로 아낀 시간이 고스란히 휴식으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추가 실험과 새로운 시도로 다시 채워졌다. 재미있는 것은 회사에서 "AI로 생산성이 올랐으니 더 많은 일을 하라"라고 요구한 적이 없다는 점이다. 디렉터 역시 "그렇다면 다음 일도 하루 만에 되겠네?"라고 재촉하지 않았다.
바(bar)를 올린 사람은 나 자신이었다. 처음엔 하루 만에 일이 끝난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흥분되었다. 그런데 곧 주변에서 AI 파워유저는 생산성을 10배, 심지어 100배까지 높인다는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비교 기준이 슬그머니 바뀌었다.
"나는 AI를 제대로 쓰고 있는 게 맞나?"
"이 정도로 만족해도 되나?"
"병렬로 더 돌려야 하나?"
"하네스와 루프를 제대로 못 쓰는 것 아닐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2주짜리 일을 하루 만에 끝낸 것이 대단하게 느껴졌는데, 어느새 그것조차 부족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즈음 젠슨 황의 인터뷰 기사 하나를 읽었다. 연봉 50만 달러를 받는 엔지니어가 1년에 AI 토큰을 5천 달러어치밖에 쓰지 않는다면 걱정할 것이며, 적어도 25만 달러어치는 써야 한다는 취지의 말이었다 [1]. 순간 뜨끔했다. 하필 내가 다니는 회사의 CEO가 한 말이라 그냥 흘려듣기가 어려웠다.
'혹시 저게 앞으로 원하는 엔지니어의 모습인가?'
물론 공개 인터뷰에서 나온 발언을 곧바로 사내 평가 기준으로 받아들일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한번 그런 생각이 들고 나니 묘하게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나는 충분히 쓰고 있나?'
'토큰을 아끼는 게 오히려 AI를 제대로 못 쓰고 있다는 뜻인가?'
아무도 바를 올리지 않았는데, 어느새 내가 알아서 바를 올리고 있었다.
"얘는 내가 집에 가도 일할 수 있잖아."
어느 때부턴가 새로운 습관이 생겼다. 퇴근할 때면 밤새 돌려놓을 만한 덩치 큰 일을 일부러 찾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시켜놓지 않고 퇴근하면 왠지 밤 시간을 그냥 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나 대신 일해주는 AI인데, 정작 내가 쉬는 동안 AI가 놀고 있다는 사실이 신경 쓰였다.
어느새 AI의 유휴시간 없이 24시간을 온전히 활용해야 한다는 압박까지 느끼고 있었다. 최근에는 에이전트가 스스로 작업하고 결과를 확인한 뒤 다시 수정하는 '루프'도 써보기 시작했다. 실제로 내가 중간에 개입해야 하는 횟수가 꽤 줄었다. 그러자 이 유혹은 더 커졌다. 정말 내가 없는 동안에도 일을 계속 시킬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AI가 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오히려 내가 일을 완전히 내려놓기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물론 밤새 컴퓨터에 일을 시키는 것 자체는 새로운 일은 아니었다. 예전에도 퇴근 전에 스크립트를 걸어두거나 긴 실험을 돌려놓곤 했다. 달라진 것은 미리 정해놓은 계산만이 아니라, 구현과 디버깅처럼 중간 판단이 필요한 일까지 맡길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문득 이상했다. 내가 정작 원했던 것이, AI를 24시간 일하게 만드는 것인가? 아니면 필요한 일을 더 효율적으로 하는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둘은 전혀 다른 목표였다. 나는 AI 가동률(utilization)과 내 생산성(productivity)을 같은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AI가 밤새 실험 20개를 돌릴 수 있다고 해도, 그 모두가 해볼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기 쉬워졌다는 것과, 우선순위가 높아진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AI 시대에는 '하지 않는 결정'이 전보다 더 중요해질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시간, 비용, 리스크 같은 제약이 많은 것을 걸러줬다. 몇 주가 걸리는 일이라면 시작하기 전에 정말 필요한 지부터 고민했다. 하지만, AI가 그 제약을 하나둘씩 없애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외부가 아닌 나 스스로가 직접 그 필터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느 순간, 내가 AI를 부리는 건지 AI가 나를 부리는 건지조차 모르게 될 것만 같다.
-예나빠
* 참고 문헌
[1] Morales, J. (2026, March 23). Jensen Huang says Nvidia engineers should use AI tokens worth half their annual salary every year to be fully productive - compares not using AI to using paper and pencil for designing chips. Tom's Hardware. 원문 보기
* 표지 이미지 출처 =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