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해 전의 포옹, 열두 해 후의 식탁
단편소설 | 가족 · 로맨스 · 휴먼드라마
선하가 윤아리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넓은 어깨가 한 번 크게 떨렸다.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아린 아무 말 없이 그의 등을 토닥였다.
서른일곱의 남자가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었다. 평소에는 누구보다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던 사람이었다. 회사에서는 수십 명의 직원을 이끌었고,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리 앞에서만큼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자기야."
"응?"
"나 진짜 자기 없으면 안 돼. 알지?"
아리가 피식 웃었다.
"내가 어디 간대?"
"그냥. 갑자기 무서워졌어."
"뭐가?"
선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아리의 허리를 조금 더 끌어안았다. 배를 압박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도 놓치기 싫다는 듯 두 팔에 힘을 주었다.
"우리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어서."
아린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행복하면 좋은 거지. 별걱정을 다 한다."
"자기는 참 쉽게 말해."
"어렵게 생각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잖아."
선하가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었다.
"자기가 나 안아주면 세상 다 가진 것 같아."
"그럼 앞으로도 많이 안아줄게."
"약속한 거다?"
"응. 약속."
선하가 아리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날 두 사람은 거실의 불도 켜지 않은 채 한참을 소파에 앉아 있었다. 창밖으로 가로등 불빛이 스며들었고, 선하는 아리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 내렸다.
아린 그때만 해도 몰랐다.
그날의 약속이 열두 해가 지난 뒤에도 여전히 유효할 줄은.
이듬해 봄, 윤아리는 넷째 아이를 출산했다.
딸이었다.
선하는 분만실 앞에서 두 시간을 넘게 서성였다. 이미 세 아이의 아버지였으면서도 출산만큼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간호사가 아기의 탄생을 알리자 선하는 가장 먼저 아리부터 찾았다.
"우리 아내는요? 괜찮아요?"
"산모와 아기 모두 건강합니다."
그제야 긴장이 풀린 선하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울었다.
첫째 채린이가 태어났을 때도 울었고, 하준이가 태어났을 때도, 선준이가 태어났을 때도 울었다. 넷째라고 다를 게 없었다.
아린 병실로 들어온 남편의 얼굴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또 울었어?"
"아니."
"눈이 벌건데?"
"피곤해서 그래."
"그러시겠지."
선하가 아리를 바라보다가 결국 웃고 말았다.
"자기야, 고생했어."
"당신도 고생했어."
"내가 뭘 했다고."
"밖에서 걱정하느라 고생했잖아."
선하는 아리의 손을 잡았다.
"우리 이제 진짜 마지막이다. 다섯째는 없어."
"나도 생각 없어."
"진짜지?"
"왜? 또 낳자고 할까 봐 무서워?"
"응. 자기가 아픈 거 보기 싫어."
아리가 웃었다.
"알았어. 그럼 우리 넷째 이름이나 지어줘."
선하는 잠시 고민했다.
"선율."
"선율?"
"응. 우리 집에서 가장 예쁜 소리가 됐으면 좋겠어."
그렇게 막내딸의 이름이 정해졌다.
선율.
아린 아이의 작은 손을 바라보았다. 손가락 다섯 개가 오므라들었다 펴지는 모습이 신기했다.
네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첫아이를 낳았을 때는 모든 것이 두려웠다. 아이가 울면 왜 우는지 몰랐고, 열이 나면 당황했으며, 조금이라도 잘못될까 봐 밤잠을 설쳤다.
그런데 넷째를 낳았다고 육아의 모든 것을 알게 된 것도 아니었다.
아이들은 똑같이 태어나도 하나같이 달랐다.
그 사실을 깨닫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열두 해가 흘렀다.
마흔아홉의 선하는 이제 거울 앞에서 흰머리를 발견하는 일이 낯설지 않았다.
처음에는 한 올이었다. 그다음에는 두 올, 세 올. 어느 날부터는 일일이 뽑기도 귀찮아졌다.
아린 마흔일곱이 되었다.
선하는 여전히 아리에게 예쁘다는 말을 자주 했다. 아린 그럴 때마다 눈을 흘겼다.
"나이 먹으니까 이제 눈이 침침해졌나 봐?"
"무슨 소리야. 자기 예쁜 건 팩트인데."
"그놈의 팩트."
"진짜야."
"알았으니까 설거지나 해."
그런 대화가 오가는 집이었다.
첫째 채린이는 스무 살이 되었다. 하준이는 열여덟, 선준이는 열다섯, 막내 선율이는 열두 살이었다.
한때는 네 아이가 동시에 울어 정신이 없더니 이제는 네 아이가 동시에 말을 해서 정신이 없었다.
누군가는 학원에 데려다 달라고 했고, 누군가는 용돈이 부족하다고 했으며, 누군가는 형이 자기 물건을 건드렸다며 소리를 질렀다.
막내는 가끔 이렇게 물었다.
"엄마, 나 주워 왔어?"
그럴 때마다 아린 똑같이 대답했다.
"응. 아주 귀한 곳에서 주워 왔지."
"어디?"
"엄마 뱃속."
선율이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매번 웃었다.
그렇게 네 아이는 각자의 속도로 자랐다.
그리고 어느 토요일 오후였다.
선하가 거실에서 커피를 마시던 중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았다.
채린이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아빠. 오늘 대학 합격 발표야. 나 너무 떨려.
선하가 아리에게 화면을 내밀었다.
"자기야, 채린이 오늘 발표라는데?"
"알아."
"우리 딸 많이 떨리나 봐."
"당연하지.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데."
"나까지 떨리네."
아린 바카라을 덮으며 웃었다.
"당신이 시험 봤어?"
"아니, 그래도 우리 딸 인생이 걸린 일인데."
"인생까지 걸린 건 아니지. 떨어지면 다시 하면 되는 거고."
선하는 아리를 바라보았다.
"자기는 어떻게 그렇게 태연해?"
"내가 같이 떤다고 결과가 바뀌나?"
"그건 그렇지."
"그리고 채린이는 잘할 거야."
아린 딸을 믿었다.
단순히 부모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채린이는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좋아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건반 앞에 앉았고, 손가락이 아프다면서도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물론 늘 즐거웠던 것은 아니었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채린이는 연습실에서 돌아오자마자 가방을 내던지고 울었다.
"엄마, 나 피아노 그만할래."
"왜?"
"나보다 잘하는 애들이 너무 많아."
아린 딸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나 재능 없는 것 같다고."
"그럼 그만둬."
채린이는 울음을 멈추었다.
"뭐?"
"하기 싫으면 그만두라고."
"엄마는 내가 피아노 그만두면 안 아쉬워?"
"아쉽겠지. 그런데 엄마가 아쉽다고 네가 계속할 이유는 없잖아."
그날 채린이는 방문을 닫고 들어갔다.
아린 딸을 쫓아가지 않았다.
대신 저녁을 준비했다.
고구마치즈돈가스였다.
채린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얼마 후 방문이 열렸다.
"엄마."
"왜?"
"나 돈가스 먹어도 돼?"
"그럼. 네 거 남겨뒀어."
채린이는 식탁에 앉아 말없이 돈가스를 먹었다.
그러다 불쑥 물었다.
"엄마는 내가 피아노 잘 쳐서 좋아?"
아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아니."
"그럼?"
"네가 좋아하는 걸 하니까 좋지."
채린이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근데 엄마."
"응."
"나 사실 피아노 좋아해."
"알아."
"그만두기 싫어."
"그럼 계속해."
그날 이후 채린이는 다시 피아노를 쳤다.
아린 그 일을 누구에게도 대단한 교육 방식처럼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저 딸의 선택을 존중했을 뿐이었다.
오후 세 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아리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채린이었다.
"엄마!"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옥타브 높았다.
"왜? 발표 났어?"
"엄마! 나 붙었어!"
"어디?"
"엄마! 고려음대! 나 합격했어!"
아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말?"
"응! 진짜야! 엄마, 나 어떡해!"
"뭘 어떡해. 축하받아야지!"
채린이는 울고 있었다.
아린 웃으면서도 코끝이 시큰했다.
수없이 많은 밤이 떠올랐다.
차가운 새벽 공기를 가르며 딸을 연습실에 데려다주던 날, 손가락에 붙인 반창고, 악보 위에 떨어졌던 눈물, 뜻대로 되지 않아 건반을 두드리던 작은 주먹까지.
무엇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애쓰던 딸의 모습이 떠올랐다.
"채린아."
"응, 엄마."
"정말 고생 많았어."
그 말에 채린이는 더 크게 울었다.
옆에서 통화 내용을 듣고 있던 선하가 아리의 팔을 붙잡았다.
"자기야. 붙었어?"
아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우리 딸 합격했어."
선하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
"명문 음대라잖아. 고려음대."
"진짜?"
"응."
선하는 아리에게서 휴대전화를 받아 들었다.
"채린아!"
"아빠!"
"우리 딸 대단하다! 아빠가 제일 먼저 축하한다!"
"아빠, 엄마가 먼저 축하했는데?"
"... 그럼 아빠가 두 번째."
아린 웃음을 터뜨렸다.
선하의 목소리는 이미 잠겨 있었다.
"우리 딸, 정말 고생했어."
"아빠 울어?"
"아니."
"또 울지?"
"아니라니까."
"아빠는 맨날 울어."
"기뻐서 그러지, 기뻐서."
채린이가 웃었다.
전화를 끊은 선하는 눈가를 손등으로 훔쳤다.
아리가 휴지를 건넸다.
"애 넷 낳을 때도 그러더니 대학 합격했다고 또 우네."
"자기야, 우리 딸이 음대 갔어."
"알아."
"우리 채린이가."
"알고 있다고."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
아린 남편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렇게 좋으면 오늘 맛있는 거 사줘."
선하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당연하지! 뭐 먹고 싶어?"
"고구마치즈돈가스."
선하는 웃었다.
"자기 아직도 그거 좋아해?"
"좋아하는 데 나이가 어딨 어?"
"맞네."
선하가 휴대전화를 들었다.
"채린이는 크림파스타 좋아하지? 하준이는 소고기. 선준이는 떡볶이. 선율이는 뭐 좋아하더라?"
아리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당신 딸은 벌써 잊었어?"
"누구?"
"채린이."
"왜?"
"채린이도 고구마치즈돈가스 좋아하잖아."
선하는 이마를 짚었다.
"아, 맞다!"
"중학교 때 학교 앞 돈가스집 단골이었잖아."
"그러네. 내가 왜 그걸 까먹었지?"
"그러니까 아빠 자격 없다고 하지."
선하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야, 그 정도까지야?"
"농담이야."
선하는 가족 단체 채팅방을 열었다.
아빠: 오늘 저녁 7시 본가 집합. 채린이 합격 축하 파티.
아빠: 소고기, 떡볶이, 크림파스타, 고구마치즈돈가스. 추가 주문받는다.
잠시 후 답장이 쏟아졌다.
하준: 소고기 무한리필 가능?
선준: 치킨도.
선율: 케이크! 딸기 케이크!
채린: 나는 고구마치즈돈가스 두 개.
하준: 누나 합격했으니까 누나가 쏘는 거 아님?
채린: 대학생 되기 전에 파산시키려고?
선준: 아빠 카드 있으니까 괜찮음.
선하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자기야, 우리 애들 대체 누굴 닮아서 저래?"
"당신."
"왜 나야?"
"먹는 거 좋아하는 것도, 말 많은 것도, 고집 센 것도."
"자기는?"
"나는 조용하잖아."
선하가 한참을 아리를 바라보았다.
"자기야."
"왜?"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아리가 쿠션을 집어 들었다.
선하는 재빨리 웃으며 두 손을 들었다.
"농담! 농담이야!"
저녁 일곱 시.
집 안은 오랜만에 사람 사는 소리로 가득했다.
하준이는 소고기부터 찾았고, 선준이는 배달 봉투를 뒤적였다. 선율이는 케이크 상자에 붙은 리본을 풀고 있었다.
채린이는 현관문을 열자마자 아리에게 달려와 안겼다.
"엄마!"
아린 딸을 꼭 안아주었다.
스무 살이 되었다고 해도 품에 안기면 여전히 어릴 적 그 아이 같았다.
"우리 딸 축하해."
"엄마, 나 진짜 붙었어."
"알아."
"아직도 꿈같아."
"그럼 볼 한 번 꼬집어 줄까?"
"아파!"
두 사람이 웃었다.
선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슬그머니 옆으로 다가갔다.
"아빠는?"
채린이가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왜?"
"아빠는 안 안아줘?"
"아빠도 축하해 줬잖아."
"전화로 했지. 실제로는 안 했잖아."
채린이는 못 말리겠다는 듯 웃으며 선하를 안았다.
선하는 딸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언제 이렇게 컸을까.
어릴 때는 자기 무릎 위에 앉아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던 아이였다. 손바닥만 한 악보를 들고 아빠에게 연주를 들어 달라고 조르던 아이였다.
그런 딸이 이제 대학생이 된다.
"아빠."
"응?"
"숨 막혀."
"아, 미안."
채린이가 웃으며 아버지에게서 떨어졌다.
"아빠 또 울어?"
"안 울어."
"눈 빨간데?"
"아까 울어서 그래."
"그러니까 울었잖아."
"그만 좀 놀려라."
그때 하준이가 끼어들었다.
"아빠, 누나 졸업식 때는 대성통곡하겠네."
선준이가 맞장구쳤다.
"결혼식 하면 기절할 듯."
채린이가 눈을 흘겼다.
"야, 누가 결혼한대?"
선하가 정색했다.
"그러게. 우리 딸 아직 스무 살인데 무슨 결혼이야."
아리가 웃었다.
"당신은 애들 다 커도 똑같구나."
"뭐가?"
"호들갑 떠는 거."
"내가 언제?"
네 아이가 동시에 대답했다.
"맨날!"
선하는 결국 두 손을 들었다.
"알았다. 아빠가 졌다."
식탁 위에는 음식이 가득했다.
소고기, 떡볶이, 치킨, 크림파스타, 돈가스.
누가 보면 명절인 줄 알 정도였다.
아린 고구마치즈돈가스를 자신의 접시에 덜었다.
선하가 자연스럽게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자기야, 줘. 내가 잘라줄게."
"나도 손 있어."
"알아. 그래도 내가 잘라주고 싶어서."
"애들이 다 보는데?"
"보면 어때?"
채린이가 웃었다.
"엄마, 그냥 아빠가 하게 둬. 안 그러면 삐져."
아린 못 이기는 척 접시를 내밀었다.
선하는 먹기 좋은 크기로 돈가스를 잘랐다.
마흔아홉이 된 남자가 마흔일곱 아내의 돈가스를 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하준이가 고개를 저었다.
"아빠는 엄마밖에 몰라."
선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알면 됐어."
"우리는?"
"너희도 사랑하지."
"근데 왜 엄마 것만 잘라줘?"
"너희는 직접 잘라먹을 수 있잖아."
"엄마도 할 수 있잖아."
"엄마는 특별해."
하준이가 혀를 내둘렀다.
"와, 진짜 못 말린다."
아린 웃다가 돈가스 한 조각을 선하의 입에 넣어주었다.
"됐지? 나만 특별한 거 아니네."
선하는 그 한 조각에 세상을 다 가진 듯 웃었다.
식사가 끝날 무렵, 채린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엄마, 아빠."
모두의 시선이 채린이에게 향했다.
"나 하고 싶은 말 있어."
선하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뭔데? 필요한 거 있어?"
"아니, 그런 거 말고."
채린이는 잠시 머뭇거렸다.
"나 대학 가면 학교 근처에서 살고 싶어."
순간 식탁이 조용해졌다.
선하가 눈을 깜빡였다.
"뭐?"
"기숙사든 자취든. 통학하면 연습 시간이 너무 부족할 것 같아서."
"아빠가 데려다주면 되잖아."
"아빠도 회사 다니잖아."
"기사님한테 부탁하면..."
"아빠."
채린이의 목소리가 조금 단호해졌다.
"나 이제 스무 살이야."
선하는 입을 다물었다.
아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언젠가 아이가 부모의 손을 놓는 순간을 받아들이는 일이기도 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마음까지 쉬운 것은 아니었다.
아리도 섭섭했다.
새벽에 깨워 밥을 먹이던 아이가, 추운 날이면 목도리를 둘러주던 아이가 어느새 혼자 살아보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섭섭하다는 이유로 딸의 선택을 막고 싶지는 않았다.
"채린아."
"응, 엄마."
"혼자 살면 생각보다 해야 할 일이 많아. 밥도 챙겨 먹어야 하고, 청소도 해야 하고, 돈 관리도 해야 하고."
"알아."
"엄마는 네가 잘할 거라고 생각해. 다만 충분히 알아보고 결정하자."
채린이의 표정이 밝아졌다.
"엄마는 허락하는 거야?"
"조건만 맞으면."
선하가 아리를 바라보았다.
"자기야."
"왜?"
"우리 딸 아직 애잖아."
"스무 살이야."
"나한테는 아직 애야."
아리가 웃었다.
"당신 눈에는 쉰 살이 돼도 애겠지."
선하는 대답하지 못했다.
맞는 말이었다.
채린이가 쉰 살이 되어도 자신에게는 여전히 어린 딸일 것이다.
아린 남편의 손을 잡았다.
"우리가 평생 데리고 살 수는 없잖아."
"그건 알지."
"잘 키웠으니까 믿어보자."
선하가 채린이를 바라보았다.
딸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의 허락을 기다리는 표정이라기보다 자신의 선택을 존중받고 싶은 얼굴이었다.
선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대신 집은 아빠랑 같이 알아보자."
"진짜?"
"응. 보안도 확인해야 하고, 학교랑 거리도 봐야 하고."
"아빠!"
채린이가 선하에게 달려들었다.
선하는 딸을 안으며 중얼거렸다.
"근데 주말에는 집에 와."
"알았어."
"전화도 자주 하고."
"알았다고."
"밥 굶지 말고."
"아빠!"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밤이 깊어졌다.
하준이와 선준이는 방으로 들어갔고, 선율이는 소파에서 잠들었다.
채린이는 거실 한쪽의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오래된 피아노였다.
아리가 결혼하기 전부터 사용하던 것이었다. 건반에는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었고, 나무 표면에는 작은 흠집이 있었다.
몇 해 전에는 건반 하나가 제대로 눌리지 않아 수리를 맡기기도 했다.
선하가 새 피아노를 사주겠다고 했지만 아리가 말렸다.
"멀쩡한 걸 왜 바꿔? 고치면 되잖아."
그 피아노로 채린이가 처음 건반을 눌렀다.
아리가 옆에 앉아 손가락 번호를 알려주었고, 채린이는 작은 손으로 도레미파솔을 따라 쳤다.
채린이가 조심스럽게 건반에 손을 올렸다.
"엄마."
"응?"
"나 이거 기억나."
익숙한 선율이 흘러나왔다.
채린이가 다섯 살 때 처음으로 끝까지 연주했던 곡이었다.
아린 딸의 옆에 앉았다.
"기억하지."
"엄마가 맨날 틀렸다고 다시 하라고 했잖아."
"내가 언제 맨날 그랬어?"
"맨날!"
아리가 웃었다.
"그때는 손가락을 제대로 놓는 게 중요했으니까."
"엄마 되게 무서웠어."
"그래?"
"응. 근데 지금 생각하면 엄마가 제일 좋은 선생님이었어."
아린 딸을 바라보았다.
채린이의 손가락이 건반 위를 움직였다.
어릴 때의 서툰 손놀림은 사라지고 없었다. 어느새 아리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곡을 해석하고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엄마."
"응."
"나 사실 합격 못 할 줄 알았어."
"왜?"
"마지막 실기시험에서 실수했거든."
"그랬어?"
"응. 집에 와서 말 안 했잖아."
아린 고개를 끄덕였다.
시험을 마치고 돌아온 딸의 표정이 좋지 않았던 것을 기억했다. 그러나 굳이 묻지 않았다.
"엄마가 왜 안 물어봤는지 알아?"
"왜?"
"물어보면 내가 울 것 같았거든."
채린이가 웃었다.
"엄마는 항상 그런 것 같아."
"뭐가?"
"내가 말하고 싶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거."
아린 대답하지 않았다.
채린이가 건반에서 손을 떼었다.
"나 그때 피아노 그만두겠다고 했던 거 기억해?"
"중학교 때?"
"응."
"기억하지."
"그때 엄마가 그냥 그만두라고 해서 진짜 서운했어."
"그랬어?"
"응. 엄마는 내가 그만둬도 상관없나 싶어서."
아린 딸의 손을 잡았다.
"상관없었던 건 아니야."
"그럼?"
"엄마 욕심 때문에 네가 하기 싫은 걸 계속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어."
채린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알아."
"그래?"
"응. 엄마가 그때 계속하라고 했으면 오히려 더 싫어졌을지도 몰라."
채린이가 웃었다.
"내가 선택해서 계속한 거니까. 힘들어도 누구 탓할 수 없잖아."
아리도 웃었다.
"그렇다고 힘들 때 혼자 참으라는 건 아니야."
"알아."
"그만두고 싶으면 언제든 그만둬도 돼. 대신 남들이 잘한다고 해서 따라가거나, 못한다고 해서 포기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채린이는 아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엄마."
"응?"
"고마워."
아린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마도 고마워."
"뭐가?"
"건강하게 잘 자라줘서."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실에는 오래된 피아노의 나무 냄새와 저녁 식사 뒤에 남은 음식 냄새가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특별할 것 없는 밤이었다.
그런데 아린 이런 밤이 좋았다.
자정이 가까워졌을 무렵이었다.
채린이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고, 선하는 소파에 앉아 아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리가 거실로 나오자 선하가 두 팔을 벌렸다.
"자기야."
"왜?"
"이리 와."
"애들 다 컸는데 아직도 이래?"
"애들 크는 거랑 내가 자기 안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아린 웃으며 선하의 옆에 앉았다.
선하는 아리를 품에 끌어안았다.
열두 해 전과 같은 자세였다.
다만 그때보다 어깨가 조금 굽었고, 머리카락에는 흰 가닥이 늘었다.
선하는 아리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자기야."
"응."
"시간 진짜 빠르다."
"그러게."
"채린이가 벌써 스무 살이야."
"당신도 마흔아홉이고."
"그 얘기는 굳이 안 해도 되는데."
아리가 웃었다.
"내년이면 쉰 살이네?"
"자기야, 그만."
"우리 남편 이제 오십이야."
"아직 아니거든?"
선하는 아리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자기는 마흔일곱이면서."
"응. 난 마흔일곱."
"그래도 예뻐."
"또 시작이네."
선하는 아리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진짜야."
아리는 남편의 손을 잡았다.
어느새 손등에는 잔주름이 생겼다.
신혼 때보다 피부도 거칠어졌고, 손마디도 조금 굵어졌다.
그러나 아리의 손을 감싸는 방식은 여전했다.
"자기야."
"응?"
"나 오늘 좀 서운했어."
"채린이 자취한다는 거?"
"응."
아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자기도?"
"당연하지. 내 딸인데."
선하가 아리를 바라보았다.
"근데 왜 그렇게 쉽게 허락했어?"
"쉽게 허락한 거 아니야."
아리는 잠시 말을 골랐다.
"나도 붙잡고 싶었어. 아직은 집에서 같이 밥 먹고, 같이 웃고, 투닥거리는 시간이 더 있었으면 좋겠거든."
"그렇지?"
"그런데 그건 내 마음이잖아. 채린이 인생은 채린이가 살아야지."
선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잘 키운 거겠지?"
"응. 잘 키웠지."
"자기가 잘 키웠어."
아리가 웃었다.
"에이, 내가 뭘 한 게 있나. 자기가 다 키웠지."
선하가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리야. 자기가 채린이 데리고 새벽부터 연습실 다니고, 하준이 공부 봐주고, 선준이 발표회 챙기고, 선율이 아플 때 밤새 지켰잖아."
"당신도 했어."
"나는 회사에서 돈 벌어온 거밖에 없는데."
아리가 몸을 일으켜 선하를 바라보았다.
"당신."
"응?"
"애들 키우는 게 꼭 옆에 붙어 있는 것만은 아니잖아."
선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채린이 피아노 고장 났을 때 회사 끝나고 수리업체 알아본 사람 누구야? 하준이 운동회 때 회의 미루고 달려온 사람은? 선준이 학교에서 상 받았다고 꽃다발 사 온 사람은?"
아리가 하나씩 손가락을 접었다.
"선율이 처음 걸었을 때 울었던 사람도 당신이잖아."
선하가 피식 웃었다.
"그때도 울었나?"
"응. 아주 대성통곡을 했지."
"자기야, 왜 자꾸 내가 운 얘기만 해?"
"당신이 많이 울었으니까."
두 사람이 함께 웃었다.
아리는 선하의 볼을 감쌌다.
"당신도 좋은 아빠였어. 그러니까 이제 우리끼리 누가 더 잘 키웠는지 따지지 말자."
선하가 아리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알았어."
"그리고 앞으로도 할 일이 많아."
"뭔데?"
"하준이 대학 가야지. 선준이 사춘기 끝나야지. 선율이 도 중학교 가야지."
선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한참 남았네."
"그럼. 벌써 다 키운 줄 알았어?"
"아니."
"채린이 대학 갔다고 육아가 끝나는 것도 아니고."
선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앞으로도 계속 부모인 거지."
"그렇지."
선하는 다시 아리를 끌어안았다.
"자기야."
"또 왜?"
"나 진짜 자기 없으면 안 돼."
아리는 웃었다.
"그 말 열두 해 전에도 했잖아."
"기억해?"
"그럼."
"그때 내가 엄청 울었지?"
"응."
선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때는 자기가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았어."
"지금은?"
선하가 아리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알아."
"뭘?"
"내가 혼자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 그런데 자기가 옆에 있으니까 훨씬 좋다는 거."
아리는 조용히 웃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선하가 아리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우리 앞으로도 이렇게 살자."
"어떻게?"
"맛있는 거 먹고, 가끔 싸우고, 애들 때문에 속 썩고, 좋은 일 생기면 같이 좋아하고."
"그건 지금도 그러고 있잖아."
"그러니까 계속."
아리는 남편의 어깨에 기대었다.
창밖에는 가로등이 켜져 있었다.
열두 해 전에도 두 사람은 같은 자리에서 서로를 안고 있었다.
그때는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몰랐다.
아이들이 얼마나 자랄지, 어떤 꿈을 꾸게 될지, 자신들이 어떤 부모가 될지 알 수 없었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 행복한 날만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부부싸움도 했고, 서로에게 서운했던 날도 있었다. 아이들의 문제로 의견이 엇갈릴 때도 있었고, 돈 때문에 걱정했던 적도 있었다.
어떤 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마디도 나누기 싫을 만큼 화가 났다.
그래도 결국 같은 식탁에 앉았다.
밥은 먹어야 했으니까.
아리는 그것이 결혼 생활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중요한 일부라고 생각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는 것보다, 화가 난 날에도 상대방이 밥을 먹었는지 확인하는 일이 더 어려울 때가 있었다.
그런 날들을 지나 여기까지 왔다.
"자기야."
선하가 불렀다.
"응?"
"내일도 고구마치즈돈가스 먹을까?"
아리가 고개를 들었다.
"왜?"
"자기 좋아하잖아."
"오늘 먹었는데?"
"내일 또 먹으면 되지."
아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 나랑 살면서 취향 하나는 확실히 외웠네."
"그럼. 내가 자기 남편인데."
"채린이가 좋아하는 건 까먹었으면서?"
선하가 머쓱하게 웃었다.
"그 얘기는 이제 그만하자."
그때 방문이 살짝 열렸다.
잠옷 차림의 선율이가 얼굴을 내밀었다.
"엄마."
"왜? 아직 안 잤어?"
"목말라."
아리가 일어나려 하자 선하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빠가 물 줄게."
선율이는 선하의 손을 잡고 주방으로 향했다.
아리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선율이가 아빠에게 무언가를 속삭였고, 선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잠시 후 선율이가 큰 소리로 외쳤다.
"엄마! 나도 내일 돈가스 먹을래!"
아리는 웃었다.
"알았어!"
곧이어 선준이의 방문이 열렸다.
"나도!"
하준이도 방에서 소리쳤다.
"나는 소고기!"
선하는 주방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야! 아빠 지갑 좀 살려줘라!"
집 안에 웃음소리가 번졌다.
아리는 소파에 앉아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조용한 집에서 하루만 쉬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누구 하나 부르지 않고, 울지 않고, 싸우지 않는 그런 하루를 원했다.
그런데 이제는 알고 있었다.
언젠가 아이들이 하나둘 집을 떠나면 이 시끄러운 저녁도 그리워질 거라는 사실을.
그러니 지금은 조금 시끄러워도 괜찮았다.
아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여보."
선하가 고개를 돌렸다.
"응, 자기야."
"내일은 내가 돈가스 잘라줄게."
선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맨날 당신이 잘라줬잖아."
선하가 웃었다.
"그럼 나는 먹기만 하면 돼?"
"응."
"진짜?"
"응. 대신 설거지는 당신이 해."
선하는 잠시 아리를 바라보더니 크게 웃었다.
"역시 우리 자기야. 공짜가 없어."
아리도 따라 웃었다.
열두 해 전, 선하는 아리의 품에서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때 아리는 그 말이 조금 과장되었다고 생각했다.
사람 하나를 안았다고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다니.
그런데 지금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세상을 다 가졌다는 것이 반드시 대단한 것을 소유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좋아하는 음식이 식탁에 올라오고, 아이들이 서로 떠들어대고, 남편이 별것 아닌 농담에 웃음을 터뜨리는 것.
그 평범한 하루를 함께 보낼 사람이 있다는 것.
아리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물론 내일이면 또 정신없는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하준이는 늦잠을 잘 테고, 선준이는 형의 옷을 몰래 입었다가 혼날 것이며, 선율이는 아침부터 이것저것 물어볼 것이다.
채린이는 대학 생활을 준비하면서 새로운 고민을 시작할 것이다.
선하는 여전히 아리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것이고, 아리는 또 능청스럽게 받아칠 것이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다시 일 년이 흐를 것이다.
아리는 자신의 손을 잡고 웃는 선하를 바라보았다.
마흔아홉의 남자.
웃을 때면 눈가에 주름이 접히고, 머리카락에는 흰 가닥이 섞였지만 여전히 자신을 보면 스무 살 청년처럼 웃는 사람.
아리가 먼저 그의 품에 안겼다.
"자기야."
"응?"
"나도 당신 없으면 좀 심심할 것 같아."
선하가 웃었다.
"좀?"
"응. 아주 조금."
"너무하네."
"그럼 많이."
선하는 아리를 꼭 끌어안았다.
"사랑해."
"나도."
"얼마나?"
아리가 잠시 고민하는 척했다.
"음."
"왜 그렇게 오래 생각해?"
"돈가스보다 조금 더?"
선하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자기야, 내가 겨우 돈가스보다 조금 더야?"
아리는 그의 품에서 웃었다.
"농담이야."
"진짜지?"
"응. 당신이 제일 좋아."
그제야 선하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
주방에서는 선율이가 물을 마시고 있었고, 거실 한쪽에는 채린이의 오래된 악보가 놓여 있었다.
식탁 위에는 아직 치우지 못한 접시 몇 개가 남아 있었다.
아리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꾸며놓은 행복은 아니었다. 완벽한 가족도 아니었다. 서로 다른 성격 때문에 다투기도 하고, 가끔은 상처를 주고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를 아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아리는 그 사실이 좋았다.
열두 해 전에는 두 사람이 서로를 안고 있었다.
열두 해가 지난 지금은 여섯 사람이 같은 집에서 저마다의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또 열두 해가 흐른다면.
채린이는 서른두 살이 되고, 하준이는 서른, 선준이는 스물일곱, 선율이는 스물넷이 될 것이다.
선하는 예순하나.
아리는 쉰아홉.
그때도 이 사람은 자신에게 돈가스를 잘라주겠다고 할까.
아리는 혼자 웃었다.
아마 그럴 것이다.
손에 힘이 없으면 가위로라도 잘라주겠다고 우길 사람이다.
"자기야, 왜 웃어?"
선하가 물었다.
"그냥."
"뭔데? 나도 알려줘."
"당신이랑 늙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선하는 잠시 아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나는 아주 좋아."
아리가 웃었다.
"뭐가?"
"자기랑 늙어가는 거."
두 사람은 다시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거실의 불을 끄자 창밖의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들어왔다.
선하는 아리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날과 똑같았다.
열두 해 전, 아리의 품에서 울던 서른일곱의 남자는 이제 네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리는 그 남자의 옆에서 마흔일곱의 여자가 되어 있었다.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러나 모든 것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아리는 선하의 손을 잡았다.
선하도 자연스럽게 손가락을 맞물렸다.
어디선가 시계 초침 소리가 들렸다.
하루가 끝나가고 있었다.
내일이면 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아리는 내일도 이 사람과 함께 밥을 먹고, 웃고, 때로는 다투면서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한 해, 또 한 해.
서로의 얼굴에 주름이 늘어가는 시간을 함께 지켜보면서.
사랑이란 어쩌면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젊었을 때의 모습을 영원히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달라진 서로의 얼굴에도 익숙하게 미소 지을 수 있는 것.
그리고 어느 날 문득 뒤돌아보았을 때, 가장 평범했던 날들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것.
선하가 아리의 귓가에 속삭였다.
"자기야, 우리 내일도 같이 있자."
아리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대답했다.
"응. 내일도."
그것이면 충분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