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인간관계는 '랜덤박스'였다

나는 친구를 사귀지 않는다 #1

by권비앤


적당한 기대감으로 포장을 뜯고, 화려하게 꾸며진 겉면을 지나 밑바닥을 확인하는 과정.

그 안에서 내가 바라던 내용물이 나오면 안도했지만, 기대치 않은 결과물이 발견되는 순간 나는 조용히 상자 뚜껑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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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망을 감추는 법에는 익숙했으나, 그 상자를 계속 곁에 두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다.


좋았던 기억과 싫었던 감정은 시간이 흐르며 모호하게 뒤섞였다.

어떤 이는 내 삶의 의미가 되었고, 어떤 이는 쓰레기통으로 던져졌으며, 어떤 이는 영원히 열어보지 않을 추억의 저장고에 쌓아 두었다.


나는 어떤 기준으로 사람들을 분류해 왔던 걸까.

그것은 단순한 변덕이 아니라, 타인과 부딪히며 발생한 상호작용의 결과물이었다.


10대 시절, 내게 먼저 다가온 아이가 있었다.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와 크고 또렷한 눈망울을 가진 아이.

에너지가 넘치고 매사에 똑 부러지던 그 애는, 형제 많은 집안의 북적거리는 이야기들을 내게 자주 들려주곤 했다.


맑고 밝은 에너지가 부족했던 내게 그 애는 흥미로운 관찰 대상이었다.

함께 있으면 나까지 공중에 붕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딱 한 학기가 지났을 때, 나는 서서히 연결된 줄을 놓기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잘 들어주었고 호의를 베풀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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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자면, 그 애의 눈부신 밝음 앞에 나의 탁한 속내를 꺼내 놓을 용기가 없었다.

기껏 띄워 놓은 기분을 가라앉게 만들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진짜 나'를 들키는 것이 두려웠다.

결국 우리 사이에는 영양가 없는 인스턴트 대화만 겉돌았다.


나는 마음을 여는 대신 문을 잠그는 쪽을 택했다.

그때 내가 서툴더라도 내 고민을 털어놓았다면, 우리는 ‘진짜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오랫동안 나는 나를 드러내는 일에 무관심하고 무능했다.

타인의 시선이 신경 쓰여 입을 닫으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평온한 가면을 쓰고 버텼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굳이 꺼내서 무엇하냐’며 내면의 작은 소리들이 웅얼댄다.

하지만 이제는 쌓아 두기만 했던 이 속사정들을 하나씩 꺼내 마주해 보려 한다.

나는 친구를 사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새로운 랜덤박스를 집어 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