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잡무가 나를 단단하게 한다

전공은 환불이 안 되나요: N회차 이직과 비전공자의 발버둥

byNoA

앞서 이야기 했었던 내가 원무과장으로 승진했던 병원의 시작은 조그만 한의원이었다. 대표원장 둘은 나와 동갑이거나 한 살 많은 또래였다. 전국적으로 다이어트 한약과 피부 시술 바람이 거세게 불던 시절, 서울 강남의 잘나가는 병원 시스템을 발 빠르게 벤치마킹한 한의원은 무서운 속도로 몸집을 불려 나갔다.

하루 내원 환자가 백 명을 훌쩍 넘어서자 원장 둘로는 진료실을 감당할 수 없어 새로운 부원장들이 연이어 부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지역구에 분점을 냈고, 건물 1개 층을 쓰던 의원은 순식간에 4개 층짜리 한방병원으로 승격했다. 다시 인근 병원을 인수해 브랜드를 입히고, 타 지역에 네트워크를 확장하더니 분점이 꼬리를 물고 늘어났다.

처음 들어갔을 때 고작 10명 남짓이던 직원은 내가 병원 문을 나설 무렵 400명 규모의 대형 의료 브랜드가 되어 있었다. 앳된 대표원장은 수백억 원대 매출을 주무르는 거대한 의료재단의 이사장이 되었고, 병원은 연일 승승장구했다.


바깥에서 보기엔 눈이 부시도록 화려한 성공 신화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화려한 팽창의 이면에서, 나와 몇몇 개원 멤버들의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조직의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면 시스템과 행정도 고도화되어야 마땅하건만, 현장에는 그럴 만한 준비도, 전문 인력도 없었다.

그 거대한 구멍이 터질 때마다 가장 만만하고 편리한 총대는 언제나 나였다.

"새로 오픈하는 지점 병원 개설 신고는 누가 맡지?" "노아 부장님이요." "은행에서 대출 서류 때문에 재무 담당자 찾으러 왔다는데요?" "노아 부장님한테 안내해드리세요." "외래 환자가 시술 부작용 났다고 로비에서 소리 지르며 난리 났어요. 누가 상담 좀 해주세요." "노아 부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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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의 영역인 메스를 쥐고 침을 놓는 의료 행위를 빼고, 병원에서 이뤄지는 모든 업무가 내 앞으로 떨어졌다.

신규 병원 개설에 필요한 지자체 인허가 서류부터 금융권 대출 실행, 직원 채용과 면접, 인테리어 도면 감리와 집기 발주, 거래처 단가 협상, 심평원 실사 방어, 컴플레인 고객 응대, 원내 마케팅 홍보까지. 병원에서 일어나는 온갖 궂은일과 낯선 사고들은 전부 내 손을 거쳐야만 수습되었다.


당연히 매일이 지옥이었다. 태어나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투성이였고, 어느 대학에서도 개설 신고서 양식이나 악성 민원인을 달래는 법 따위를 가르치는 곳은 없다.

선택지는 없었다. 모르면 물어볼 선배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아니라, 관공서 계장에게 욕을 먹어가며 서류를 고쳤고, 은행 지점장을 찾아가 사정하며 도장을 찍어왔다. 잘해내진 못했어도 어떻게든 펑크 난 구멍을 메워냈다.


그렇게 닥치는 대로 온몸을 던져 바닥을 구르다 보니, 내가 담당하던 원무과 아래로 시설과, 부속실, 인사과, 총무과, 심사과, 홍보팀이 줄줄이 엮여 있는 조직도가 만들어졌다. 병원 안에서 아무도 감당하지 못하는 낯설고 골치 아픈 일이 터지면 이슬롯는 지체없이 나를 찾았다.


욕을 바가지로 먹으며 사방으로 뛰어다닐 땐 내가 값비싼 소모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에 실핏줄이 터지도록 뛰어다니는 사이, 나는 어느덧 병원 직원 중 가장 높은 직바카라인 '총괄본부장'의 자리에 올라서 있었다. 통장에 찍히는 두둑한 월급과 나를 의지하는 동료들의 눈빛은, 2등 낙하산으로 들어와 서러움을 삼키던 시절의 상처를 깨끗이 씻어내 주었다.


병원을 그만두고 나와 마케팅 회사를 직접 창업했을 때도, 식품 제조 공장에 팀장으로 들어갔을 때도, 엉망진창이던 슬롯적기업에 발을 들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조직을 가든 닥쳐오는 위기와 혼란은 놀랍도록 익숙했다. 지자체 지원 서류를 꾸밀 때도, 공장 물류 시스템이 꼬여 지게차와 싸울 때도, 계약서의 독소 조항을 걸러낼 때도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그 작은 병원의 거대한 팽창기 속에서 뼈가 닳도록 겪어냈던 땜빵의 흔적이 내 몸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어차피 다 해본 일이고, 하다 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세상은 언제나 뚜렷한 전공과 화려한 한 우물 파기를 찬양한다. 하지만 야생의 밥벌이 전선에서 정작 나를 굶어 죽지 않게 지탱해 준 것은, 고상한 전공 이론이 아니었다.


청소부터 대출 서류까지 가리지 않고 몸으로 때우며 체득했던 그 천덕꾸러기 같던 잡무들. "내가 이런거나 하려고 대학 나왔나"라며 밤마다 술잔을 기울이게 만들었던 그 서글픈 땜빵의 시간들이, 역설적이게도 나를 어떤 바닥에 내던져져도 어떻게든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는 든든한 경험이 되어 있었다.

무엇이든 배워두면 쓸데가 있다는 옛 선인들의 말은 정말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당신이 오늘 회사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억지로 갈아 넣은 그 사소하고 초라한 시간들은, 훗날 궤도를 벗어난 차가운 야생에서 당신의 숨통을 틔워줄 가장 질긴 근육이 되어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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