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냄새를 훔친 자

bybeyond juri


향기는 타인에게서 나온다. 우리는 타인이 만든 냄새를 사서, 그것을 '나'라고 부른다. 고양이 발바닥에서 나는 꼬순내, 개구쟁이들의 머리 땀내, 어른들의 살냄새는 사랑이지, 향기는 아니다. 향기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서 몸에 걸쳐 입는 패션과 같다. 인간에 관한 한, 향기는 본인의 것이 아니다.


무취는 무존재


영화 <향수:어느 살인자의 이야기>(2006)에서 그르누이는 18세기 프랑스에서 가장 악취가 심한 곳, 생선 내장이 썩어가는 좌판 밑에서 태어난다. 어머니는 그르누이를 생선 내장 더미에 버리려 했지만, 아이가 울음을 터트리는 바람에 영아살해죄로 처형된다. 악취 속에서 아이가 태어나고, 엄마는 죽는다.


냄새가 창궐하는 곳에서 태어난 그르누이는 다른 사람이 가지지 못한 천재적인 후각을 가지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몸에서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다. 냄새를 가지지 못한 자가 후각의 천재라는 점, 그르누이의 불행은 결핍과 잉여가 과도하게 공존한다는 데 있다. 그르누이에게 향기는 세상에 대한 자기 발언, 자신의 존재증명이다.


냄새가 없는 자는 곁에 있어도 인지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를 알아채지 못하고, 또 이유 없이 꺼린다. 무취는 무존재다. 자두를 팔던 소녀의 체취에 끌려 뒤를 밟은 그는 놀란 소녀의 비명을 막으려다 그녀를 죽이고 만다. 우발적인 살인이었다. 그러나 식어 가는 소녀의 몸에서 향이 사라지는 것을 본 뒤 알게 된다. 고유한 냄새는 유리병이 아니라, 사람 몸에 있다는 것을. 이후로 오랫동안 살인은 그르누이가 냄새를 소유하는 방법이 된다.


그르누이는 타인의 냄새를 훔쳤고, 우리는 타인이 만든 향수를 사서 자아를 만든다. 향수는 없는 자아를 만들어내는 기술인 것이다.


남과 다른 나만의 향, 니치(niche)


니치 향수 매장에 들어서면 시향지가 쌓여 있다. 시향지에 향수를 뿌리고 가볍게 흔들어 코에 가져다 댄다. 직접 양손목에 문지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음 병을 집는다. 우디, 머스크, 앰버, 시트러스. 수십 개의 향을 거쳐 하나를 고른다. 이때 사람들은 냄새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고른다고 여긴다. 향수의 선택은 단지 취향을 넘어 자신을 증명하고 만드는 행위라는 생각인 것이다.


니치향수(niche)의 본래 의미는 틈새다. 대중적인 취향을 벗어나 소수의 향을 겨냥한다는 뜻이다. 남과는 다른 나, 자기 고유의 시그니처를 만드는 향이다. 즉 향수에는 냄새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다. 이름과 이미지, 서사와 계급적 기호가 함께 들어 있다. 우디는 깊고 관능적이고, 시트러스는 산뜻하고 젊은 느낌이며, 머스크는 은밀하고 매혹적인 사람을 연상시킨다. 물론 이들을 조향하여 더 유니크한 향을 만들기도 한다. 향을 선택하지만, 사실은 이 향이 약속하는 인간형을 선택하는 것이다.


기호라는 향


그래서 향수 광고에 향이 없어도 별 문제가 안 된다. 향수대신 사람이 등장한다. 검은 수트를 입은 남자, 시스루룩을 입고 해변을 걷는 여인, 햇빛이 쏟아지는 지중해. 광고가 파는 것은 향기가 아니라, 그 향이 데려다 줄 어떤 사람이다.


향기는 겉에 입는다는 점에서 옷과 같지만, 옷과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을 입는다 데 향수의 매력이 있다. 이름을 묻기 전에 향이 먼저 도착해 자신을 알린다. 가까이 다가온 이를 감지하고, 떠나간 뒤에도 마음에 남는다.


디지털 세상에서 인간의 존재는 점점 더 이미지와 텍스트로 전환된다. 얼굴은 사진으로, 목소리는 음성파일, 취향은 프로필이 된다. 몸체가 사라진 건 아니지만, 존재를 드러내는 것은 점점 비물질화된다. 이런 슬롯에서 향수는 고유한 개인의 지문과도 같다.


현대판 그르누이들


그르누이는 타인의 냄새를 훔쳤다. 현대인은 타인이 만든 냄새를 산다. 이 사이에는 살인과 소비라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지만, 타인의 냄새를 빌려 자신을 만든다는 욕망은 닮아 있다.


그르누이가 끝내 가지지 못한 것은 향수가 아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에게 사랑받으며 기억되는 냄새. 고양이 발바닥의 꼬순내나 개구쟁이의 머리 땀내 같은 것들이다. 향기는 사서 입을 수 있지만, 삶에 몸이 개입하는 냄새는 살 수 없다. 우리는 타인의 냄새를 입고 그것을 '나'라고 부르지만, 정작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향기가 아닌 냄새일 수 있다.


그르누이는 자신이 태어난 오물 냄새 가득한 파리의 골목으로 돌아가, 사람의 몸으로 만든 향수를 온몸에 뿌리고 사라진다. 그르누이가 원했던 것은 향기가 아니다. 그가 돌아간 곳이 향수 가게가 아니라 악취의 자리였다는 것은 향기보다 냄새가 그의 가치임을 말해준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에게 사랑받으며 기억되는 냄새. 고양이 발바닥의 꼬순내나 개구쟁이의 머리 땀내처럼, 삶에 몸이 개입해 생기는 냄새는 살 수 없다.


현대인은 향을 위해 사람을 죽이지는 않는다. 대신 향수를 산다. 나를 설명하기 위해, 때로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확인하기 위해 향을 입는다. 현대판 그르누이들은 여전히 타인의 냄새를 빌려, 자신이 누구인지를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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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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