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엔 따뜻한 차 한 잔
"일본은 이제 망했네"
친구를 만나고 들어온 남편이 한마디를 툭 던진다.
내 마음도 툭 내려앉는다.
안 그래도 유튜브에서 가끔 큼직하게 뜨는
일본 경제에 대한 흉흉한 썸네일이 신경 쓰이던 중이었다.
자극적인 썸네일이라도 막상 열어서 들어보면
별 내용도 없고 와닿지도 않고
일부의 이야기를 너무 부풀리는 경향도 있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진지하게 듣진 않았지만......
그런데,
남편이 저런 자극적인 말을 하니 불안이 확 올라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시부야(渋谷)에서 친구들과 저녁을 먹고
2차로 간단하게 이자카야에 간 모양이다.
생맥주와 안주를 몇 개 주문해서 마시고
다음 날 귀국하는 친구들을 위해
자리에서 일찍 일어났는데,
계산을 하고 나서 보니 예상보다 많이 나왔다고 한다.
나는 정말 이상할 정도로 숫자에 둔감한 반면,
남편은 정확하다.
내가 쫀쫀하다고 눈을 흘기면,
돈을 질질 흘리고 다니는 사람과 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그리 될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한다.
(나 알뜰살뜰 주부인데 뭐래?)
나도 메뉴판을 보면서 가격을 보긴 하지만,
먹고 마시면서 더해지는 총액까지는 신경을 쓰지 못한다.
나는 가끔 밥 먹다가 계산서를 감추고
아이들과 남편에게 "얼마 나왔~게?" 라고 퀴즈를 낸다.
그러면 세 명은 자기가 먼저 맞추겠다고
눈을 반짝이며 머리를 굴린다.
난 그게 재미있다.
그게 뭐라고 맞추려고 집중하는 모습들이 웃기다.
난 귀찮아서 계산할 생각조차 안 나는데......
이런 게임 덕분이었을까?
남편은 일단 돈을 내긴 했지만, 셈이 안 맞았다 한다.
혹시나
해서 받은 レシート([reshito] 영수증)을 살펴보니,
역시나
먹지도 않은 요리가 청구되어 있었다고 한다.
조금 달랐다면 자기도 모르고 그냥 나왔을 텐데,
거의 두 배가 되는 액수가 나와서
점장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점장은 종업원의 실수였나 보다라고 얼버무리면서
사과와 함께 다시 정산을 했다고 한다.
남편은 아무래도 실수가 아니라 관광객으로 보고
고의적으로 바가지를 씌운 것 같다며 분개했다.
나는 처음엔 "설마......" 했다.
그런데 남편이 말하길,
가게 들어갈 때 대기자 이름을 적었기 때문에
외국인인 건 알았을 것이고,
남자 셋이서 퇴근 시간에 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한국어로 이야기하고 있으니
영락없는 관광객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한다.
고의였는지 정말 실수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남편이 그렇게까지 의심하게 된 상황이 조금 씁쓸했다.
언젠가 여기 뉴스에서 어떤 음식점이
지금 엔저와 물가 상승 등으로 모두가 힘든 상황이니
일본인들에게는 좀 더 저렴한 가격으로
요리를 제공하고 있다는 미담식 보도를 접한 적이 있다.
나도 처음에 뉴스를 볼 땐
마음씨 고운 주인장이네...... 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결국 '이중 가격제' 아닌가.
물론 이유는 있을 것이다.
관광객이 많아지면서 불편을 겪는 사람도 있고,
그로 인해 생기는 비용도 있을 테니까.
갑자기 조금 삐딱한 생각이 고개를 든다.
일본이 잘살던 시절에는
관광객이라고 더 싸게 해줬던가?
물론 그때와 지금의 사정은 다르겠지만,
잘살 때는 똑같이 받고
힘들어지니 관광객에게 조금 더 받겠다는 건가 싶어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다.
나야말로 너무 쫀쫀한 걸까.
한국과 일본을 떠나서 생각해 보고 싶어졌다.
만약 내 집에 온 ‘손님’이라면 어떨까?
내가 부르진 않았어도,
우리 집에 호감과 호기심을 가지고 찾아온 사람을
나는 과연 어떻게 대접할까.
'이중 가격제'를 접하면서 내 눈 앞에는
"우리 집에 손님이 너무 많이 찾아와
수도세도 오르고 청소도 힘들어졌거든요.
너무 죄송하지만, 이거..냉수 한 잔에 500엔인데......”
하고 공손히 물컵을 내미는 내 모습이 그림처럼 떠오른다.
그림이 이상하다.
내가 너무 나갔나.
나는 남편 말처럼 일본이 망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리고 일본이 망하지 않길 바란다.
비록 낡고 기울어져 가는 집이라도
더운 여름 찾아온 손님에게는 시원한 냉수 한 잔쯤
깨끗한 그릇에 담아 내놓을 수 있는 마음이 있었으면 참 좋겠다.
비록 내 집은 아니지만 나는 이 집에 살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