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진 자리에서 떠난 배

-2010~2023년, 발트해·알래스카·남태평양

by류정uk

슬리퍼 편에서 털어놓은 내 골절 인생에서, 두 번째 순서였던 등뼈에는 따로 할 이야기가 있다.


2016년 봄, 뉴욕이었다. 둘째 딸이 수영 갈 때 타라고 사 준 새 자전거가 달리던 중에 그대로 폭삭 주저앉았다. 내가 넘어진 게 아니라 자전거가 먼저 무너졌고, 나는 그 위에서 떨어졌다. 척추 두 개가 내려앉았다.

전생에 과자였던 뼈라고 했지만, 그날은 과자 중에서도 제일 바삭한 과자였다.

영어에 excruciating pain이라는 말이 있다. 사전에서는 극심한 고통이라고 풀지만, 나는 그 말을 몸으로 배웠다. 몇 달 동안 그 단어 속에서 살았다.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자전거 회사를 법 앞에 세웠다. 루턴에서처럼 이번에도 이 년이 걸렸다. 상대방은 영국에서 건너온 내 의료 기록까지 들춰가며, 내 뼈가 골다공증 때문에 부러진 것이지 자전거 때문이 아니라고 우겼다. 법정에 서기 직전, 합의가 났다. 오만 파운드쯤이었다. 골다공증 기록만 없었다면 십오만 파운드짜리라고 했다. 변호사가 사십 퍼센트를 떼 갔다.


부러진 건 내 등뼈였는데.


남은 돈은 삼만 파운드쯤. 루턴에서 남은 돈으로는 집 세 채를 샀지만, 등뼈와 바꾼 이 돈으로는 배를 타기로 했다. 배라면 이미 한 번 띄워 본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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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사업이 막 자리를 잡아가던 때였다. 나는 자매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다 같이 유럽 구경을 가자고. 형편이 되는 사람은 제 몫을 내고, 안 되는 사람 몫은 내가 내기로 했다.


누가 누구 몫이었는지는 그 배에 두고 내렸다.


딸만 여섯인 집에서 쌍둥이 하나는 일찍 떠나고 다섯이 남았다. 그 다섯이 한 배를 탄다는 건, 흙담 안에서 자라던 시절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사우샘프턴을 떠나 발트해를 한 바퀴 도는 아주라호였다. 승선하던 날, 우리는 알록달록한 바람막이에 등산 배낭까지 메고 WELCOME 구명튜브를 붙들고 사진을 찍었다. 크루즈가 아니라 지리산 종주라도 가는 차림이었다. 그래도 다섯 얼굴이 하나처럼 이를 다 드러내고 웃고 있었다.

정찬 날은 달랐다. 분홍 꽃무늬 원피스, 검은 시폰 드레스, 보라색 드레스, 파란 치파오, 물방울 원피스. 다섯 다 굽 있는 구두를 신었다. 지금은 슬리퍼 말고는 신지 못하는 이 발도, 그날은 구두 위에 서 있었다.

밤이 깊으면 다섯이 한 선실에 모였다. 어릴 때 우리 마을 샛터에는 마흔 집쯤 살았다. 우리는 아랫집부터 윗집까지 한 집도 빼놓지 않고 짚어 가며, 누가 잘 풀리고 누가 안 풀렸는지 동네를 통째로 훑었다. 이야기를 끌고 간 사람은 역시 모르는 게 없는 큰언니였다.


그날 밤 우리는 배가 아니라 고향 골목을 걷고 있었다. 내 이름 '깜불'은 아들을 바라는 소원이었다. 그 소원은 한참 뒤에야 늦둥이 아들 둘로 이루어졌다. 그래도 드레스를 입고 발트해를 건넌 건 그 집 딸 다섯이었다.


아버지가 보셨으면 아마 한숨부터 쉬셨을 것이다.

하지만 사진 속 다섯 중에 한숨 쉬는 얼굴은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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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뼈 값으로 간 곳은 알래스카와 캐나다였다. 2019년 봄, 우리 집 자매 넷, 그리고 사위가 함께했다. 방은 스위트로 잡았다. 등뼈 하나 값이니, 넓은 방에서 등 펴고 자 보자 싶었다.

배 안 쇼 무대 앞에서는 가수들 발치에 쪼그려 앉아 브이를 그렸다. 환갑 넘은 여자들이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법은 간단했다. 먼저 가서 앉으면 된다.

개 썰매는 다 함께 탔다. 썰매가 숲길로 미끄러져 들어가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써레 이야기가 나왔다. 옛날 우리 동네에서는 논밭을 고를 때 소가 써레를 끌었는데, 무게를 실으려고 그 위에 아이들을 앉혔다. 그게 우리 자매들의 첫 썰매였다. 그때는 소가 끌었고, 이번에는 개가 끌었다. 배가 바뀌고 바다가 바뀌어도 우리 규칙은 그대로였다. 정찬 날에는 드레스, 그리고 굽 있는 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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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여행에는 큰언니 한 사람만 모시고 갔다. 2023년, 언니는 여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와이와 타히티, 사모아와 피지를 지나 뉴질랜드까지 갔다. 어릴 적 내 웅변 원고를 써 주고, 나를 학교 대표 연단에 세워 준 사람이 큰언니였다. 이번에는 순서가 바뀌어, 넷째가 맏언니 손을 잡고 태평양을 건넜다. 언니는 저녁마다 그날 이야기를 써서 페이스북에 올렸다. 몇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언니를 따라 태평양을 건넜다. 뱃삯도 안 내고.


어느 날 언니는 원주민 마을 사람들 틈에 섞여 신나게 춤을 추고 돌아왔다. 잔치 아닌 잔치였다. 그날 저녁, 찍어 온 영상을 돌려 보며 언니가 말했다.

"내 인생 최고의 날이다. 깜불이 덕분이다."

부러진 등뼈는 끝내 제자리에 붙지 않았다. 지금도 날씨가 찌뿌둥하면 등뼈도 같이 찌뿌둥하다.


그래도 그 부러진 자리에서 배가 떠났다.

첫 배는 일해서 번 돈으로 띄웠고,

다음 배들은 부러진 뼈로 띄웠다.


그 돈, 다 썼다.

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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