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가을, 밀양
옛날에는 ‘머슴’이라는 게 있었다.
학이 오빠는 우리 집 머슴이었다. 일 년 내내 쉬는 날 없이 일하던 사람. 오빠네는 땅 한 뙈기 없이 방 한 칸에 온 식구가 살았고, 오빠의 아버지는 동네 입구에서 대장간을 했다. 쇠 두드리는 소리가 그치는 날, 그 집 부엌에서는 무엇이 끓었을까. 나는 지금도 모른다.
그래서 오빠와 그 동생은 우리 집에 와서 농사철엔 농사를 짓고, 겨울엔 산에서 나무를 했다. 그리고 늘 우리 집에서 밥을 먹었다.
오빠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억은 어느 겨울밤이다.
그때 일 년 세경이 쌀 몇 가마니와 단돈 만 원이었다. 아버지가 농협에서 받아 온 빳빳한 백 원짜리 백 장. 오빠는 희미한 불빛 아래서 그 돈을 열 장씩 추려 방바닥에 쌓았다. 나도 옆에 끼어 같이 쌓았다. 열 무더기가 다 서면 허물고 처음부터 다시. 몇 번을 쌓아도 무더기는 열한 개가 되지 않았는데, 우리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또 쌓았다. 한 사람의 일 년이 방바닥 위에 작은 탑 열 개로 서 있었다.
훗날 런던 금융가에서 남의 돈 수백만 파운드를 세게 되지만, 내 첫 회계 업무는 그날 밤이었다. 보수는 없었다.
봄이면 오빠는 나무 지게 위에 진달래꽃을 한가득 얹어 내려왔다. 산 아래서 그 분홍빛이 보이면 나는 마중을 달려가 지게에 슬쩍 얹혔다. 나무 한 짐에 진달래 한 아름, 거기에 깜불이라 불리던 계집아이 하나까지.
우리 동네에서 가장 과적된 운송수단이었다. 그래도 오빠는 비탈길에서 걸음을 늦추고 한 손을 뒤로 돌려 지게 끝을 받쳤다.
내가 떨어질까 봐.
누구의 품에도 안겨본 적 없던 아이가, 그 지게 위에서만은 떨어질 걱정을 하지 않았다. 집에서 나는 아들 대신 태어난 딸이었다. 집안의 한숨과 원망이 고스란히 쏟아지는 자리였다. 그런 나를 나무보다, 진달래보다 먼저 챙겨 모셔 나르는 사람은 머슴 오빠 하나뿐이었다.
대접이라고 해봐야 지게 꼭대기 한 자리였지만, 그 시절 내 인생에서 가장 높은 자리였다.
1970년대 산업화 바람에 오빠는 도시로 떠났고, 나도 열다섯에 집을 떠났다.
그 뒤로 오십 년.
그사이 들려온 건 소문뿐이었다. 오빠가 부산에서 깡패가 되어 감옥을 여러 번 들락거렸다는 이야기. 지난 추석, 오빠는 소주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그날 부두에 열두 놈이 있었다 아이가.”
“작년엔 다섯이라 캤다.”
“그새 더 생각나더라.”
세경 만 원을 같이 세어준 사이에, 그 정도 부풀림은 이자로 쳐줄 만하다. 오빠는 나중에 돈을 벌어 고향에 집을 짓고 어머니를 모셨다. 지금은 그 큰 집에 혼자 산다. 방 한 칸에 온 식구가 몸을 붙이고 살던 소년이, 이제는 방이 남아도는 집에서 혼자 늙어간다.
* * *
밀양에 집을 장만하고 낯선 이들에게 문을 연 지 일 년쯤 지난 때, 2023년 가을이었다.
캠핑카를 몰고 고향 마을로 들어서는데, 차 한 대가 바짝 따라붙더니 나를 추월해 앞을 비스듬히 막아섰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영국에서 수십 년을 운전하며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내가 뭘 잘못했나, 보험 서류는 어디 뒀더라. 앞차에서 백발의 남자가 내려 창문을 두드렸다. 그 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지게 끈을 쥐던 그 굵은 손.
학이 오빠였다.
부산 바닥 출신답게, 오빠는 반세기 만의 재회를 인사 대신 검문으로 시작했다.
“니 깜불이 맞제?”
오십 년 만의 첫마디였다. 영국에서 학위를 받고 금융가에서 십 년을 일했어도, 이 동네에서 나는 끝내 깜불이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버지 입에서 나올 때는 늘 한숨이 묻어 있던 그 이름이, 오빠 입에서는 반가움으로 나왔다. 같은 세 글자가 누구 입에 담기느냐에 따라 이렇게 다르게 들릴 수 있다는 걸, 나는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길바닥에서 배웠다.
“맞다. 오빠는 와 이리 늙었노.”
“니는 안 늙었나.”
틀린 말이 하나도 없어서 둘 다 반박을 못 했다. 그걸로 오십 년 치 안부가 끝났다. 오빠가 그다음에 한 말은 이것이었다.
“밥은 뭇나?”
영국 부엌에서 그토록 그리워하던 그 한마디를, 나는 우리 집 머슴이던 사람에게서 들었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목이 메어서였는지 배가 고파서였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오빠는 곧장 나를 식당으로 데려가 밥을 샀다. 지게를 지던 소년과 그 위에 얹혀 가던 아이가, 이제는 백발이 되어 한 밥상에 마주 앉았다. 예전엔 우리 집 밥상에서 밥을 먹던 사람이, 이번엔 내 밥값을 냈다. 밥상은 방향만 바꿔 다시 차려졌다. 그 뒤로 오빠는 내 일을 제 일처럼 챙겼다. 작년까지는 내가 영국에 가 있는 동안 캠핑카도 오빠 집 안마당에 세워두었다.
“니 차는 내가 지킨다. 걱정 말고 댕기온나.”
전직 조직원이 지키는 캠핑카라니, 밀양에서 그보다 안전한 주차장은 없었다. 지금은 딸네 식구가 돌보며 사용한다. 경비 수준은 조금 내려갔다.
세월이 그렇게 흘렀는데도 달라진 건 없었다. 오빠는 여전히 우리 식구를 자기가 돌봐야 할 사람들로 여긴다. 머슴과 주인집 딸 사이의 담은 어린 시절 동네의 흙담처럼 어느새 허물어지고, 그 자리엔 서로를 식구라 부르는 마음 하나만 남았다.
* * *
봄이 오면 나는 지금도 진달래부터 찾는다. 밀양 뒷산이 분홍으로 번지기 시작하면, 산 아래서 그 빛을 먼저 알아보고 달려가던 아이가 내 안에서 아직도 고개를 든다. 다만 이제는 그 아이도 무릎이 시리다.
오빠의 지게는 오래전에 사라졌다. 그래도 오빠는 평생 무언가를 지고 살았다. 나무를 지고, 가족을 지고, 어머니를 지고, 때로는 자기보다 더 큰 세월을 지고.
지금은 밥 한 끼와 “밥은 뭇나” 한마디를 지고 와서, 그 옛날 진달래처럼 내 앞에 내려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