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Ⅵ. 사람들은 음을 듣지만

by조윤미


한국에 5월 중하순.

이 맘 때가 되면 나는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들뜨곤 한다.

러시아의 길고 칙칙한 겨울이 물러가고, 도시 전체가 천천히 여름을 준비하기 시작하는 계절이었기 때문이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도 많았지만, 공기 속에는 이미 여름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관광객을 맞을 준비를 하는 오래된 건물들과, 조금씩 밝아지는 사람들의 표정.

쌍트빼쩨르부르그의 거리들도 오랜만에 활기를 되찾는다.


그리고 국립음악원 역시 1년 중 가장 팽팽한 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5학년 졸업을 앞둔 학생들의 "국가 졸업 종합시험."한국 학생들은 짧게 ‘고쓰(ГОС)’라고 불렀다.

그 단어만 들어도 손끝에 땀이 맺힐 만큼, 학생들에게는 거대한 압박으로 다가오는 시험이었다.

1시간에 걸친 전공 실기와 각종 이론 시험들... 1시간 연주 전공실기 시험은 누구나 참관할 수 있다.


그날도 나는 상트빼쩨르부르그 국립음악원 글라주노프 홀 뒤편, 심사위원석 바로 뒷자리에 앉아 시험을 지켜보고 있었다.

홀 대기실에는 여러 종류의 긴장이 떠다녔다.

악보만 내려다보는 학생. 괜히 더 밝게 웃으며 인사하는 학생. 아무 말 없이 손가락만 움직여보는 학생.

깔끔한 드레스를 입은 학생들이 무대 위로 올라갈 때마다, 홀의 공기는 조금씩 더 차갑고 무거워졌다.

나조차 목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학생들은 태연한 얼굴로 걸어 나왔지만, 몸은 이미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어떤 학생은 호흡이 급격히 짧아지며 연주를 이어가지 못했고,

어떤 학생은 지나친 연습 때문인지 머리와 손가락의 시간이 서로 어긋나 있었다.

실수가 있었음에도 끝까지 자신의 음악을 놓지 않아, 오히려 심사위원들의 공감을 얻은 학생도 있었다.

그리고 또 어떤 학생은, 자신의 현재보다 조금 더 큰 음악을 붙잡으려 애쓰다가 결국 템포와 호흡이 무너져 내리기도 했다.


그 무렵, 나는 한 한국인 여자 후배의 ‘고쓰’ 시험 반주를 맡게 되었다.

솔로 프로그램이 끝난 뒤, 마지막 피날레처럼 등장하는 피아노 협주곡 한 악장.

졸업을 앞둔 학생에게는 거의 마지막 문처럼 느껴지는 무대였다.

그런데 리허설 전부터 후배의 상태는 심상치 않았다.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져 있었고, 악보를 넘기는 손끝이 계속 떨렸다.

“언니... 너무 떨려요.”


그 짧은 한마디 안에는 몇 년의 유학생활과 압박감, 그리고 절대 무너지면 안 된다는 절박함이 전부 들어 있었다.

후배는 이미 건반 위에 손을 올리기도 전에 몸의 균형이 무너져 있었다.


짧아지는 호흡. 굳어가는 어깨. 떨리는 손끝.

건반 위의 손가락은 제대로 눌러지기조차 힘겨워 보였다.

마치 비를 맞은 어린 새 한 마리가 차가운 바람 속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때까지, 연주는 무대 위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사람은 첫 음을 누르기 훨씬 전부터, 이미 몸으로 연주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연주자는, 소리가 나오기 전에 먼저 몸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나는 아마 그 순간 처음으로, 연주자의 ‘심연’을 목격했던 것 같다.

시험이 끝난 뒤, 후배는 음악원 벽에 기대어 담당 교수와 이야기를 나눈 뒤 조용히 울고 있었다.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뒤에도, 나는 그날의 공기를 자주 떠올린다.

‘왜 어떤 연주는 깊이 무너지는가. 왜 어떤 템포는 흔들리지 않는가. 왜 어떤 소리는 오래 남는가.’


그 질문들은 어쩌면, 러시아 음악원 유학 시절부터 이미 내 안에서 시작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조금씩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음을 듣지만, 피아니스트는 그 이전의 긴장을 듣는다는 것을.

어쩌면 나는 오래전부터, 음악의 심연을 듣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제, 앞으로 펼쳐질 내 글에서는 그 이야기를 조금 더 깊은 자리에서 기록해보려 한다.



《당신의 크레셴도는 지금 시작됩니다》를 읽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합니다.

온라인카지노에 기록해 온 시간들은 제 음악 인생의 서막이었습니다.

임윤찬 피아니스트가 연주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중심으로,

제 유학 시절의 기억과 무대 위의 긴장, 라디오와 생방송, 그리고 음악 안에서 살아가는 삶을 천천히 기록해 왔습니다.

그러나 글을 쓰면 쓸수록, 음악 안에 아직 다 꺼내지 못한 시간들이 남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악보의 뒷면. 연주자의 몸에서 먼저 시작되는 긴장.

객석은 지나치지만, 피아니스트는 듣고 있는 순간들.

왜 어떤 연주는 폭발하지 않는데 더 깊이 무너지는가.

왜 어떤 음악은 오래도록 사람 안에 남아 있는가.


그래서 이제, ‘온라인카지노 멤버십’을 통해 새로운 기록을 시작하려 합니다.


《시즌 2 : 심연의 소리를 읽다》


시즌 2의 첫 번째 기록은, 임윤찬 피아니스트의 슈만 피아노 협주곡 a단조입니다.


같은 악보. 같은 피아니스트.

그러나 네덜란드와 보스턴에서 들려온 음악은 전혀 다른 두 개의 심연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두 개의 시간을 따라가며, 한 피아니스트가 슈만이라는 거울 안에서 어떻게 서로 다른지 기록해보려 합니다.

그 안에는 건반 끝에 실리는 무게, 숨겨진 호흡의 방향, 페달의 깊이,

그리고 오케스트라와 끊임없이 긴장을 주고받는 연주자의 시간이 존재합니다.

이번 시즌 2에서는 일반적인 감상만으로는 지나치기 쉬운 그 미세한 흐름들을

오직 피아니스트의 시선으로 조금 더 깊이 따라가 보려 합니다.


앞으로 연재될 시즌 2 멤버십 글의 마지막에는 멤버십 전용 코너 〈조윤미 피아니스트의 귀〉를 통해,

초 단위 리스닝 포인트와 함께 음악의 가장 깊은 층위로 들어가는 청취의 순간들을 함께 나눌 예정입니다.

무료 연재가 ‘삶과 음악의 크레셴도’를 따라가는 여정이었다면,


멤버십 시즌 2는 그 음악의 심연 속으로 들어가는 기록이 될 것입니다.

가장 작은 소리가 가장 큰 울림이 되는 순간.

그리고 이제, 그 두 번째 크레셴도의 문 앞에 다시 서게 되었습니다.

시즌 2의 기록은 다음 주 목요일(5.28), 온라인카지노 멤버십을 통해 시작됩니다.

함께 이 여정을 걸어가요.


-조윤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