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슈만이라는 거울, 두 개의 심연 Part 1. 같은 슈만 피아노 협주곡은 두 번 존재하지 않았다 –1악장 몇 년 전, 아들과 손을 잡고 곤지암 시내를 걷다가 낯익은 간판 하나를 발견했다. <RUSSIAN MART & bakery> 나는 망설이지 않고 문을 열었다. 문 위에 달린 작은 종이 ‘딸랑’ 소리를 내자, 단발머리의 러시아 중년 여성이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나는 반사적으로 러시아어로 답했다. “Здравствуйте.” 가게 안에는 러시아 홍차와 러시아 소시지, 치즈, 흑빵(Чёрный хлеб), 그리고 알록달록한 러시아 사탕(Конфеты)들이 빼곡히 놓여 있었다. 유학생활 동안 너무도 익숙하게 곁에 두고 살았던 음식들이었다. 러시아어를 듣자 반가웠는지 그녀는 빵과 차를 하나하나 더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홍차와 흑빵, 치즈, 사탕 몇 개를 사고 가게를 나오자 아들이 물었다. “엄마, 러시아 유학할 때 자주 먹던 거야? 나도 먹어보고 싶어.” 나는 웃으며 빨간 줄이 들어간 사탕 하나를 골라 포장을 벗겼다. 사탕을 입에 넣는 순간, 오래전 러시아의 겨울이 갑자기 되살아났다.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뜨거운 홍차에서는 하얀 김이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연습해야 할 악보와 끝나지 않는 과제들, 그리고 한국에 있는 가족 생각까지. 그 시간들은 차갑고 고단했지만, 신기하게도 사탕 하나가 입안에서 천천히 녹아내리듯 견뎌지곤 했다. 시간은 이상하다. 분명 오래전 지나간 순간인데, 어떤 냄새와 소리, 아주 작은 감각 하나만으로도 그 시간은 현재 안에서 다시 살아 움직인다. 나는 최근 임윤찬 피아니스트의 슈만 피아노 협주곡을 들으며, 문득 그 러시아 사탕을 떠올리고 있었다. 같은 슈만이었다. 2026년 1월 네덜란드, 그리고 두 달 뒤 보스턴. 같은 피아니스트, 같은 악보, 같은 1악장이었지만 음악은 같은 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 차이는 거대한 변화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피아니스트의 귀는 그 미세한 시간의 이동을 오래 붙잡게 된다. 슈만 피아노 협주곡 1악장은 처음부터 거대한 감정을 쏟아내는 음악이 아니다. 오히려 아주 짧은 순간 안에, 연주자가 어떤 시간의 밀도로 음악을 바라보고 있는지가 먼저 드러난다. 특히 1악장 제1주제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