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매산 가을나들이
오랜만에 남편이 나들이 가자고 했다.
매주 일요일이면 등산 가기 바쁜 남편이 먼저 나들이를 제안하니 조금 의외였다.
“어디로 갈 건데?”
“황매산에 억새 보러 가자. 의령 리치꽃 축제도 가보고.”
가을이 깊어가는 계절, 황매산 억새를 보러 가자는 말에 마음이 설렜다. 평소 같으면 혼자 카메라를 들고 출사를 떠났을 텐데, 이번에는 남편과 함께하는 가을 나들이였다.
아침이 되자 남편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간단히 먹을 과일과 떡, 음료를 챙겼다. 나도 따뜻한 커피와 물을 준비하고 카메라를 가방에 넣었다. 어디를 가든 카메라는 이제 내게 빠질 수 없는 동반자가 되었다.
차를 타고 한 시간 반쯤 달려 황매산에 도착했다. 가을을 만나러 온 사람들로 산은 활기가 넘쳤다.
산을 오르기 전 남편이 내게 등산 스틱을 건넸다. 평소 산을 자주 오르는 남편과 달리 나는 오르막길이 쉽지 않았다. 스틱에 의지해 한 걸음씩 올라가니 훨씬 수월했다.
황매산은 어느새 가을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능선을 따라 펼쳐진 억새들이 바람에 일렁였다. 파란 하늘 아래 은빛 억새가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억새는 한쪽으로 몸을 기울였다가 다시 일어섰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힘들었던 발걸음도 잠시 잊혔다.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 강아지를 데리고 산바카라하는 사람들, 배낭을 멘 산악회 회원들까지 저마다의 방식으로 가을을 즐기고 있었다.
억새 사이 그늘과 작은 바위 위에는 김밥과 도시락을 펼쳐놓고 옹기종기 앉은 사람들이 보였다. 서로 음식을 나누고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이 정겨워 보였다.
우리도 걷다가 납작한 바위에 자리를 잡았다.
남편이 챙겨온 샤인머스켓과 사과를 꺼냈다. 시원한 음료를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파란 하늘에는 하얀 구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마치 누군가 붓으로 길게 그어놓은 듯했다. 그 모습이 예뻐 얼른 카메라를 꺼냈다.
하늘과 억새를 사진에 담고 있는데 외국인 여성이 다가왔다. 함께 온 남자친구와 사진을 찍고 싶다며 부탁했다.
나는 흔쾌히 카메라를 받아 들었다.
두 사람을 나란히 세우고 사진을 찍었다. 조금 더 가까이 서보라고 손짓도 하고, 다른 포즈도 취해보라고 했다. 여러 장을 찍는 동안 두 사람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사진을 확인한 두 사람이 환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는 나도 덩달아 웃음이 났다.
사진 한 장이 누군가에게는 오래 간직할 여행의 추억이 된다는 사실이 새삼 기분 좋았다. 내가 좋아하는 사진으로 다른 사람을 웃게 할 수 있다는 것도 작은 기쁨이었다.
별빛 언덕까지 올라가 사진을 찍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아이스크림을 파는 사람이 보였다. 어깨에 커다란 아이스박스를 메고 산 위까지 올라온 모습이 신기했다.
“아이스크림 하나 먹을까?"
나는 바닐라맛, 남편은 딸기맛을 골랐다.
산에서 먹는 아이스크림은 유난히 달고 시원했다. 어린 시절 소풍 가서 사 먹던 아이스크림이 떠올랐다. 잠시 학창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남편과 나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황매산 이곳저곳을 걸었다. 억새가 흔들리는 소리, 산을 오가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얼굴을 스치는 선선한 가을바람까지 모두 좋았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커다란 나무 아래 평상이 있어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남편이 아침에 챙겨온 음식들을 꺼냈다. 그중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라면인가? 누룽지인가?’
겉봉지에 적힌 문구였다.
이름부터 재미있었다. 라면이면 라면이고 누룽지면 누룽지지, 도대체 무슨 음식일까 싶었다.
뜨거운 물을 붓고 4분을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남편과 황매산에서 본 풍경을 이야기했다. 억새가 참 예뻤다는 말도 하고,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았다는 이야기도 나누었다.
드디어 4분이 지났다.
뚜껑을 열어보니 라면과 누룽지가 먹음직스럽게 익어 있었다. 따뜻한 국물과 함께 한 숟가락 떠먹었다. 산을 걷고 내려와서인지 그 맛이 더욱 좋았다.
그런데 몇 숟가락 먹다 보니 문득 김치 생각이 났다.
“김치가 있었으면 더 맛있겠다.”
남편도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김치를 못 챙겼네.”
평소 같았으면 김치가 없는 것이 못내 아쉬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김치가 없어도 괜찮았다. 남편이 준비한 따뜻한 음식이 있었고, 함께 걸었던 가을 산의 풍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무 아래 평상에 마주 앉아 라면인지 누룽지인지 모를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화려한 식당도 아니었고 특별한 음식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어떤 진수성찬보다 맛있게 느껴졌다.
생각해 보니 오늘 나를 웃게 만든 순간은 참 많았다.
뜻밖에 나들이를 제안한 남편의 한마디, 산을 오를 때 건네준 등산 스틱, 바람에 흔들리던 억새, 사진을 찍어주며 함께 웃었던 외국인 연인, 산 위에서 먹은 아이스크림, 그리고 김치없이 먹었던 따뜻한 라면과 누룽지까지.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 마음에 남는 것은 남편과 나란히 앉아 음식을 나누어 먹던 시간이다.
오랜 세월을 함께 살다 보면 서로의 존재가 너무 익숙해진다.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아도 하루가 지나가고, 각자의 일에 바빠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도 자연스럽게 줄어든다.
그런데 가끔은 이렇게 평범한 나들이 한 번이 잊고 지냈던 마음을 일깨워준다.
누군가 나를 위해 음식을 챙기고, 걷기 편하라고 스틱을 건네고,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함께 웃는다는 것.
그 소소한 배려가 얼마나 따뜻한 일인지 새삼 느꼈다.
오늘 내가 웃었던 이유는 거창하지 않았다.
가을이 좋았고, 함께 걷는 사람이 있었고, 소박한 음식 한 그릇이 맛있었기 때문이다.
라면인가, 누룽지인가.
아직도 그 재미있는 이름을 떠올리면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오늘 내가 먹은 음식의 이름보다 더 오래 기억될 것은, 남편과 함께 나누었던 따뜻한 가을 한 끼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와 함께한 평범한 하루를 소중하게 바라보는 마음, 그 안에 나를 웃게 하는 시간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