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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색(着色)

수면 아래 가라앉은 빛의 궤적에 대하여

by구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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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물에 섞이는 데에는 하나의 수면(水面)이면 충분하다.


스쳐 간 붉은 비늘의 흔적이 투명한 물살의 뼈대를 물들이고 검은 꼬리의 번짐이 빛의 잔잔한 피부를 기워 나간다. 색은 스스로를 칠하기 위해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흘리고 간 궤적을 차갑게 굳히기 위해 머무는 것. 지느러미가 훑고 간 파문 끝마다 물은 오래된 기억의 색조를 얻고 아무도 머물지 않은 빈 공간에는 이미 스며든 붉은 묵직함만이 가득하다.


헤엄칠수록 물결은 더욱 짙어지고 바닥은 점점 가벼워져 결국 태어난 곳을 잊은 색채들만 물속을 깊게 영원히 떠다닌다.


닿은 적 없는 저 밑바닥까지 물빛은 이미 돌아갈 수 없는 침묵으로 번져 있다.

물 밑으로 내려가는 돌계단마다 어제 낙하한 햇살의 묵직한 물감이 쌓여 있다. 바깥의 숲이 황금빛 어둠으로 무거워질 때 청록의 물은 나무의 기둥과 잎사귀를 하나씩 받아 적으며 제 안쪽부터 물들인다.


계단은 어디로 향하기 위해 잠긴 것이 아니다 물속에 발을 담근 것은 지상의 빛을 수면 아래의 정적 속으로 천천히 침전시키기 위함일 뿐. 스스로 물들지 못하는 그늘은 물밑에 가라앉은 나뭇가지의 형상을 빌려 가장 투명한 뼈대로 살아나고, 수면을 흔드는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물속의 숲은 흔들리며 더 깊은 색으로 침묵을 덧칠한다.


착색은 지워지지 않는 계절이 투명함의 깊이를 빌려 스스로를 가두는 일.

물에 잠긴 계단 끝에서 빛과 그늘은 이미 하나의 물빛이 되어 다시는 뭍으로 올라가지 않는다.

가라앉은 돌계단 위에 투명하게 드리운 황금빛 잔영은 흘러가는 물을 멈춰 세우는 기화(奇花)의 뿌리다.

물밑에 누워 있는 나뭇가지들은 제 몸을 통과한 빛의 궤적을 차곡차곡 모아 스스로 한 자루의 묵필(墨筆)이 된다.


나무가 땅 위에서 푸르름을 버릴 때 물은 그 버려진 색채를 받아 안아 더욱 깊고 차가운 청록의 심연을 만든다

물드는 것은 더 이상 아무것도 변하지 않겠다는 약속. 지상의 계절이 모두 마르고 난 뒤에도 이 물 밑에 정착한 색들은 시간보다 오래 빛나며 결코 썩지도, 떠오르지도 않는다.


마침내 수면 위에 마지막 낙엽 한 장이 내려앉을 때,

그늘과 빛의 경계는 비로소 완전히 스며들어 이곳은 물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물듦 그 자체가 된다.


마침내 색이 물을 다 읽었을 때 물은 더 이상 물이기를 고집하지 않는다

바깥의 시간은 계속 흘러가겠지만 이 가라앉은 계단 위, 물밑에 정지된 황금빛과 청록의 침묵은 다시 오지 않을 어떤 날의 완벽한 초상이다.


더 이상 덧칠할 빛도, 지워낼 그늘도 남아 있지 않은 자리.

그곳엔 손끝에 묻어나지 않는 가장 깊은 물듦만이 아주 오래도록 가라앉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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