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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한 것들의 이유

적응이 끝난 세계

by구시안
구시안 그린.png


자신의 감정을 귀찮게 포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나는 간단하고 가벼운 것들에 익숙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적응이라는 것이 그리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었다면 나는 무엇이든 해내는 사람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적응에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만을 각인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메일을 주고받던 시절이 지나고 핸드폰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가꾸어 가는 동안, 어쩌면 소통이라는 관점보다 혼자가 되는 법을 배워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새로운 것에 소화하는 법을 알게 될 때까지는 늘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이 놀랍지는 않다.


좋든

싫든 세상은 변하고 있고,

여전히 나는 그 무리에 껴서 살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닭가슴살을 먹기보다 생라면 하나를 부셔먹는 재미를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나이라는 것이 그렇듯, 아직도 끊지 못하는 담배도 그러하듯, 익숙하고 적응을 끝낸 것들이 편하다는 말이 맞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새로운 곳에 시선이 가는 눈을 애써 감지도 않지만, 그저 적응이 끝난 모든 것들이 익숙하고 편해진 것이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일에는 언제나 작은 피로가 따른다. 사용법을 익혀야 하고, 어색함을 견뎌야 하며, 익숙해질 때까지 몇 번이고 같은 실수를 반복해야 한다. 그 과정이 지나고 나면 별것 아닌 일이 되어 있지만, 이상하게도 사람은 그 별것 아닌 일이 되기까지의 시간을 자주 잊는다. 편리함은 대개 그것을 얻기 위해 들였던 수고를 감춘다.


어쩌면 편하다는 것은 편리하다는 말과 조금 다른 의미인지도 모른다. 편리함이 시간을 줄여주는 것이라면, 편안함은 더 이상 자신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에 가깝다. 오래 입어 목이 늘어난 티셔츠를 버리지 못하는 이유나, 이미 여러 번 본 영화를 다시 재생하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 안에서는 무엇을 새롭게 이해하거나 증명할 필요가 없다. 알고 있는 장면에서 웃고, 예상한 대사에 고개를 끄덕이면 된다. 낯선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잠시 멈춰야 했던 마음이 그제야 제 속도로 돌아온다.


사람도 비슷하다. 오래 알고 지낸 사람 앞에서는 말이 조금 줄어도 괜찮다. 대답이 늦어도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기분이 좋지 않은 날에는 굳이 괜찮은 척하지 않아도 된다. 관계가 깊어진다는 것은 서로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가는 일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서로에게 설명해야 할 것들이 줄어드는 일이기도 하다. 모든 감정을 정확한 문장으로 바꾸지 않아도 되는 관계. 침묵이 곧 무관심으로 해석되지 않는 사이. 그런 것들이 편하다는 말속에 들어 있다.


그렇다고 익숙한 것들이 모두 좋은 것은 아니다. 오래 피운 담배가 몸에 좋지 않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고, 반복하는 습관이 언제나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편안함은 때로 변화를 미루기 위한 그럴듯한 핑계가 된다. 이미 알고 있는 불편함은 견딜 수 있지만, 아직 경험하지 못한 불편함은 어디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고통의 크기보다 그것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모른다는 사실을 더 두려워하기도 한다.


그래서 새로운 것을 앞에 두고 망설이는 마음을 무조건 게으름이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 어떤 망설임에는 충분히 살아본 사람만이 갖게 되는 신중함이 있다. 한 번쯤 바꾸어 보았고, 한 번쯤 후회해 보았으며, 생각만큼 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배운 뒤에야 생기는 태도다. 세상이 제시하는 더 나은 방법을 모두 따라야 할 이유는 없다. 누군가에게는 비효율적인 방식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하루를 무사히 통과하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일 수 있다.


물론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가보지 않은 길이 보이면 한 번쯤 걸어보고 싶고, 처음 보는 물건 앞에서는 잠시 발걸음이 늦어진다. 다만 관심이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반드시 그것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며, 마음에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지금까지의 것을 버려야 하는 것도 아니다. 바라보는 일과 선택하는 일 사이에는 생각보다 넓은 간격이 있다. 그 간격을 그대로 두는 것도 살아가는 방법 중 하나일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지보다 무엇을 오래 견딜 수 있는지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좋아하는 것은 자주 바뀌지만, 견딜 수 있는 것에는 저마다의 조건이 있다. 어떤 음식은 맛있어도 자주 먹기 어렵고, 어떤 사람은 좋아해도 오래 함께하기 어렵다. 반대로 특별히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오랫동안 곁에 두어도 피곤하지 않은 것들이 있다. 그것들은 대단한 만족을 주지는 않지만, 하루의 일부를 불필요하게 소모하지 않는다.


아마 편한 것들의 이유는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것들이 언제나 옳아서가 아니라, 그것들 앞에서 나 자신을 끊임없이 수정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조금 부족한 모습으로 있어도 괜찮고, 남들보다 늦게 이해해도 괜찮으며, 어떤 변화에는 끝내 적응하지 못하더라도 삶 전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앞으로도 계속 새로운 것을 내놓을 것이다. 더 빠르고, 더 간단하고,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방법들이 나타날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익히고, 익숙해지고, 어느새 이전의 방식을 불편하다고 부르게 될 것이다. 나 역시 그 흐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필요하다면 배우고, 바꿔야 한다면 바꾸며 살아갈 것이다. 다만 모든 변화에 같은 속도로 응답하지는 않으려 한다.


생라면을 부숴 먹는 일이 대단한 취향일 리 없고, 오래된 습관을 유지하는 일이 특별한 철학일 리도 없다. 그래도 어떤 날에는 그런 사소한 것들이 하루를 조금 덜 낯설게 만든다. 특별한 이유를 붙이지 않아도 손이 먼저 움직이고, 생각하지 않아도 다음 순서를 알 수 있는 일들. 그런 순간에는 내가 세상에 적응하고 있는 것인지, 세상이 내 안에 자리를 잡은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어쩌면 나이가 든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싫어하게 되는 일이 아니라,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조금씩 알아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가능성보다 이미 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일이 더 중요해지는 시기. 그 모습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당장 고쳐야 할 결함으로 여기지는 않는 태도.


편하다는 말에는 가끔 체념의 냄새가 묻어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충분히 경험한 뒤에야 편해지고, 어떤 것은 오래 곁에 둔 뒤에야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다. 그 시간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새로운 것을 향해 열려 있는 마음과 익숙한 것에 머무르고 싶은 마음은 서로 반대편에 서 있지 않다. 한쪽은 아직 살아보지 않은 날들을 향하고, 다른 한쪽은 이미 살아온 날들을 함부로 버리지 않으려 한다. 둘 사이에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일. 지금의 나에게는 그것이 세상의 변화에 대응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식처럼 느껴진다.


그러니 오늘도 꼭 바꿔야 할 것이 아니라면 조금 더 두고 보려 한다. 오래 사용한 물건을 손에 쥐고, 자주 먹던 음식을 먹고, 이미 알고 있는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일. 그 안에서 특별한 의미를 찾아내려고 애쓰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것들은 그저 편하다는 이유만으로 곁에 남아도 된다.

이것도 선택적인 감각이라면 인정한다.


그 이유를 끝내 설명하지 못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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