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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너 : Corner

색을 잃고 얻은 가장 단단한 정적

by구시안
코너 구시안.jpg


각도의 서슬이 서늘하게 꺾이는 곳, 벽과 벽이 서로의 어깨를 들이받으며 더는 달아날 곳을 내주지 않는 지점.

그곳에 서면 세상은 붉음과 푸름의 허영을 벗어던지고 오직 빛과 그림자의 아득한 계급만을 드러낸다.


누군가 피를 흘렸다고 말하는 자리에 단지 묵직한 검은 물감이 괴어 있고, 단풍이 타오른다던 숲의 입구는 오래된 놋쇠처럼 차분히 녹슬어 갈 뿐.


세상이 다채로운 거짓으로 번잡할 때 그늘의 각도를 읽는 눈은 가장 순수한 뼈대의 서사로 들어간다.

코너는 모서리이자 기둥, 모든 색채가 분해되어 도착하는 질감의 최후 기지.


붉은 장미와 푸른 바다가 동일한 명도의 잿빛으로 누워 서로를 훔쳐보지 않는 평등의 공간.

접혀진 길 끝에서 손가락 끝으로 벽면의 요철을 짚는다. 눈이 빼앗긴 무지개 대신 피부가 먼저 느끼는 서늘한 진실.


돌아설 것인가,

아니면 이 단단한 각도에 이마를 대고 빛이 낳은 모든 착란이 사그라들 때까지 침묵의 그늘을 견뎌낼 것인가.

세상의 모든 색이 마침내 소멸하여 하나의 음영으로 모여드는 곳, 거기가 나의 코너이다.


꺾어진 길 너머로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공기는 다른 각도로 피부에 감긴다.

색을 빼앗긴 눈이 비워둔 자리마다 바람의 결이 결곡하게 채워지고, 보이지 않던 입체들이 손끝에서 기다란 그늘을 늘어뜨린다.


사라진 것은 빛의 착란일 뿐, 바닥을 짓눌러 온 지면의 무게는 여전히 단단한 흑백의 문장으로 남아 있다.

이 모서리를 돈다고 해서 낙원이 피어오르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또 다른 벽이, 더 굳건한 음영의 기둥이 어둠의 명도를 바꾸며 서 있을 뿐.


그러나 다가오는 잿빛의 파도를 향해 지팡이 대신 밤의 감각을 세운다.

모든 빛깔이 분해된 이 정적의 통로에서, 스스로 하나의 그늘이 되어 막다른 길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일.

색을 잃은 눈이 완성하는 세계의 가장 깊고 서늘한 외곽선.


벽을 뒤로하고 다시 눈을 감으면, 세상은 더 이상 아무것도 은폐하지 않는다.

모서리를 돌아 나온 발자국 소리가 공기 중에 나이테처럼 겹겹이 쌓이고, 비워진 명암의 틈새로 가장 오래된 정적이 스며든다.


보이는 것들의 소란이 끝나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뼈대가 드러나는 시간.

붉지도 푸르지도 않은 이 덤덤한 그늘 밑에서 마침내 숨을 고른다.

어둠은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안쪽에서 펴지는 옷자락.

지나온 코너는 빛의 착각을 도려낸 자국으로 남아 있고, 펼쳐진 직선의 길 위로 하나의 음영이 된 몸이 침묵처럼 차분히 번져 나간다.


그리하여 눈을 감아도 길은 끝나지 않는다.

빛이 약속했던 어떤 화려함도 없이, 그저 차갑고 단단하게 서 있는 이 흑백의 세계를 향해 마지막 한 발을 고요히 내어놓는다.


색을 잃었기에 비로소 세상을 통째로 안을 수 있었고, 모서리에 매몰되었기에 비로소 깊어질 수 있었던 시간.

이제 돌아돌아 도달한 막다른 곳은 더 이상 벽이 아니라, 영원으로 통하는 가장 얇은 문.


그 문을 열고 음영의 깊은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빛이 남긴 모든 착란을 뒤로한 채, 완벽한 정적의 외곽선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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