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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랭크 화이트 : Blank White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by구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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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흰색을 이해한다.

젊었을 때 나는 흰색이 아무것도 없는 색이라고 생각했다. 흰 종이는 아직 쓰이지 않은 이야기였고, 흰 벽은 아직 걸리지 않은 그림을 기다렸으며, 흰 눈은 세상이 잠시 자신의 잘못을 덮어 두는 방식이었다. 나는 비어 있는 것들을 사랑했다. 비어 있다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뜻이었으므로.


그러나 나이가 들자 빈자리에는 저마다의 무게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죽은 뒤, 그의 방은 흰색이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방의 색은 전과 다르지 않았다. 창틀은 여전히 낡은 아이보리색이었고, 벽지에는 오래된 습기가 만든 희미한 얼룩이 있었다. 다만 그 방에서 아버지가 사라졌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모든 것이 지나치게 희게 보인다고 느꼈다. 침대 위의 이불도, 창가의 커튼도, 그가 평생 쓰던 머그잔의 안쪽도.


그때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흰색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무언가가 있었던 자리를 가장 잔인하게 드러내는 색이라는 것을.


아버지는 생전에 말이 적었다. 그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지나치게 큰 그릇이었고, 미안하다는 말은 이미 늦은 열차와 같았다. 그는 대신 과일을 깎았다. 사과의 껍질을 끊어지지 않게 벗기는 데 유난히 능숙했는데, 길게 이어진 붉은 껍질이 식탁 위에 내려앉으면 그는 그것을 작은 뱀처럼 말아 접시 가장자리에 놓았다. 그리고 가장 좋은 조각을 내 앞으로 밀어 주었다.


나는 그 행동을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사랑에는 더 큰 목소리와 더 분명한 약속이 필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내게 무엇을 말하지 않았는지 오래 기억했고, 그가 말없이 해 준 일들은 너무 쉽게 잊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다음 날, 냉장고에서 사과 하나를 발견했다.


껍질은 군데군데 갈색으로 변해 있었고, 꼭지 주변에는 작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나는 그것을 버리려고 들었다가 한참 동안 손에 쥐고 있었다. 사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구도 죽음에 관해 설명하지 않았고, 누구도 나에게 용서할 시간을 따로 마련해 주지 않았다. 부엌 창으로 들어온 겨울빛만이 사과의 표면을 희게 만들었다.


나는 사과를 씻었다.

물방울이 껍질 위에 맺혔다. 작은 물방울들은 빛을 받아 투명하게 빛났다. 그 순간 사과는 이상하리만치 희어 보였다. 오래된 얼룩도, 상처도, 그 아래에서 천천히 진행되는 부패도 모두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물은 사과를 깨끗하게 만들 수 있어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는 것을.


그렇다면 깨끗함이란 무엇일까.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은 상태일까. 아니면 흔적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더는 부끄러워하지 않는 상태일까.

나는 사과를 도마 위에 놓고 칼을 들었다. 아버지가 하던 것처럼 껍질을 벗겨 보려 했지만, 껍질은 중간에서 끊어졌다. 나는 다시 시작했고, 이번에도 실패했다. 세 번째에는 사과의 살점까지 함께 떨어져 나왔다. 도마 위에 잘린 껍질과 흰 과육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나는 웃었다.

아버지가 살아 있었다면 아무 말 없이 칼을 가져갔을 것이다. 그는 내 손에서 사과를 받아 들고, 마치 세상에는 서두를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듯 천천히 껍질을 벗겼을 것이다. 그리고 완성된 사과를 내밀며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먹어라. 갈변하기 전에.


나는 그 말이 과일에 관한 것인지, 삶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한 남자의 마지막 부탁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날 이후 나는 흰색을 쉽게 믿지 않는다.

병원의 흰 복도는 누구의 죽음도 기억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눈 내린 아침의 거리는 전날의 비명까지 지워 버린 것처럼 보인다. 새하얀 종이는 어떤 고백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만, 그 위에 적힌 문장을 대신 바카라임져 주지는 않는다. 흰색은 우리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이전의 삶이 없었던 일이 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안고 다시 시작한다.

잃어버린 사람의 목소리, 끝내 하지 못한 말, 돌이킬 수 없는 저녁, 용서받지 못한 실수.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어느 날부터 그것들을 바라보는 빛이 달라진다.


나는 요즘 아침마다 사과를 하나씩 깎는다. 껍질이 끊어져도 다시 이어 붙이려 하지 않는다. 매끄럽지 않은 단면을 그대로 두고, 갈색으로 변하기 전에 먹는다. 때로는 사과를 깎다가 문득 아버지의 손을 생각한다. 그의 손등에 솟아 있던 푸른 혈관과 손톱 밑에 남아 있던 작은 상처들. 그 손은 세상을 구하지 못했고, 나의 슬픔을 막아 주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 손은 내가 배고플 때마다 사과를 깎았다.


사랑은 언제나 자신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랑은 너무 오래 반복되어 마침내 배경이 된다. 우리는 그 배경을 풍경이라고 부르고, 풍경이 사라진 뒤에야 그것이 자신을 지탱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얼마 전, 나는 아버지의 방을 정리했다. 서랍 가장 안쪽에서 오래된 수첩을 발견했다. 수첩에는 날짜와 숫자, 병원 예약 시간, 장을 볼 때 필요한 물건들이 적혀 있었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삐뚤삐뚤한 글씨로 한 줄이 쓰여 있었다.


사과. 아이가 좋아함.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나는 그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고 싶어 평생을 보냈다. 그런데 그가 남긴 마지막 문장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저 사과 하나를 적어 두었을 뿐이었다.


나는 수첩을 덮었다.

창밖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세상은 다시 흰색으로 덮이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아무것도 지워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눈 아래에는 여전히 길이 있었고, 나무가 있었고, 사람들이 살아온 집들이 있었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서로 다른 일이었다.


나는 부엌으로 가서 사과를 하나 꺼냈다.

물에 씻은 사과의 표면에 물방울이 맺혔다. 빛이 그 위에 머물렀다. 사과는 희게 빛났지만 완전히 희지는 않았다. 작은 흠집과 희미한 얼룩, 꼭지 주변의 어두운 주름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그것이 좋았다.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흰 종이보다,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문장이 남아 있는 종이가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 것 같았다.


흰색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모든 것들이 더는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남아 있는 자리였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그 자리를 비워 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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