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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디그리스 : Verdigris

사라진 것들이 남기는 색

by구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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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오래된 것에 녹이 슨다고 말한다. 나는 그 말이 늘 이상했다. 녹은 쇠가 썩는 방식이 아니라, 쇠가 더는 처음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갖게 되는 얼굴이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집에는 구리로 만든 작은 그릇이 하나 있었다. 부엌 창가에 놓인 그릇은 오래전부터 물을 담지 않았고, 누구도 그것을 식기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릇의 안쪽에는 빗물처럼 푸른 얼룩이 번져 있었다. 가장자리에서 시작된 녹청은 바닥으로 천천히 흘러내렸고, 그 흔적은 마치 누군가 오래전 그곳에 손을 담갔다가 미처 닦아내지 못한 기억처럼 보였다.


나는 그것을 처음 보았을 때 더러운 색이라고 생각했다.


할머니는 그릇을 닦지 않았다. 내가 수세미를 가져오면 손등으로 내 손을 밀어냈다. 그건 버리는 게 아니라고, 할머니는 말했다. 무엇을 버리는 게 아니냐고 물으면 할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릇을 창가에 도로 놓았다. 햇빛이 비치는 날이면 그릇의 푸른 표면에는 아주 얇은 빛이 떠올랐다. 바다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작고, 하늘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깊은 빛이었다.


할머니가 죽고 나서야 나는 그 그릇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항구에서 일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항구에는 전쟁이 남아 있었다. 부서진 배와 이름을 잃은 사람들, 도착하지 못한 편지와 누구에게도 돌아가지 못한 짐들이 오랫동안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어느 날 폐선에서 구리 그릇 하나를 가져왔다고 했다. 그 안에 무엇이 담겨 있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할아버지는 그릇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할머니는 한 번도 그 출처를 묻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릇을 가운데 두고 평생을 살았다.


나는 그 사실이 이상했다. 서로 사랑한 사람들이라면 서로의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누구를 잃었는지, 밤마다 무슨 생각으로 잠들지 못하는지. 나는 사랑이란 상대의 비밀을 하나씩 열어 마침내 아무것도 감추지 않는 상태에 도달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나는 할아버지가 끝내 말하지 않았던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사람에게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지키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반드시 부끄러운 비밀이거나 용서받지 못할 잘못인 것은 아니다. 때로는 너무 오래 아파서 말이 되지 못한 것,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다른 사람의 것이 되어버릴 것 같은 것, 자기 자신조차 온전히 소유하지 못하는 기억이 있다.


할아버지는 그릇을 닦지 않았다. 할머니는 그릇을 버리지 않았다.


나는 두 사람이 서로의 침묵을 사랑이라고 불렀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그릇은 두 사람보다 오래 남았다.


사람이 죽으면 몸은 흙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다른 사물의 표면에 남고, 어떤 것은 집 안의 빛을 바꾸며, 어떤 것은 살아남은 사람의 손버릇이 된다. 할머니는 늘 컵을 놓을 때 손잡이를 바깥쪽으로 돌려놓았다. 할아버지는 식탁에 앉으면 자신도 모르게 맞은편 의자를 조금씩 밀어 넣었다. 두 사람의 습관은 그들이 사라진 뒤에도 한동안 집 안에서 계속되었다.


나는 그것들이 죽은 사람의 흔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죽음은 한순간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배웠지만, 실제로 죽음은 남겨진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조금씩 완성되었다. 더는 돌아보지 않는 창문이 생기고, 더는 꺼내지 않는 그릇이 생기고, 한 사람을 위해 비워두었던 자리에 다른 물건이 놓이는 날이 왔다. 마침내 우리는 그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고도 하루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상실이 무엇인지 알았다.


상실은 누군가가 사라지는 일이 아니었다. 사라진 사람이 더는 우리의 행동을 바꾸지 않는 날이 오는 일이었다.


구리 그릇의 색은 그 무렵부터 다르게 보였다. 나는 그것을 녹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녹이라는 말에는 손상되었다는 판단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릇은 망가지지 않았다. 물을 담는 기능을 잃었다고 해서 그릇이라는 사실까지 잃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더는 물을 담지 않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살았던 시간은 담고 있었다. 물론 시간은 물처럼 고여 있지 않는다. 시간이 담긴다는 것은 시간이 빠져나간 자리에 어떤 색이 남는다는 뜻에 가까웠다.


나는 그 색의 이름을 찾아보았다.


베르디그리스.


구리가 공기와 습기를 만나면서 표면에 만들어내는 푸른빛의 녹청. 그것은 오래된 금속이 부식되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한때는 안료로 사용되었고, 그림 속 나뭇잎과 바다와 옷자락에 칠해졌다. 화가는 그 색을 얻기 위해 금속의 변화를 기다렸다. 시간이 만들어낸 흔적을 갈아서 가루로 만들고, 그것을 기름이나 물에 섞어 캔버스 위에 올렸다.


나는 그 사실을 읽고 한참 동안 화면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무언가를 망가뜨리고, 인간은 그 망가진 것에서 색을 얻는다.


우리는 대개 원래의 상태를 회복하는 것을 치유라고 생각한다. 상처가 나기 전의 피부, 이별하기 전의 관계, 아무것도 잃지 않았던 시절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을 바란다. 그러나 돌아갈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한 번 들은 말은 들리기 전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 번 떠난 사람은 떠나기 전의 사람이 되어 돌아오지 않는다. 기억은 아무리 정확하게 보존하려 해도 처음의 순간과 같아지지 않는다.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사건을 잊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기억하는 자신의 모양을 바꾼다.


어쩌면 성숙이라는 것은 상처가 사라지는 일이 아니라, 상처가 더는 우리를 설명하는 유일한 문장이 아니게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베르디그리스는 푸르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부터 푸르렀던 물질의 색이 아니다. 구리가 다른 것들과 접촉한 뒤에야 얻게 된 색이다. 그러므로 그 색에는 혼자서는 만들어낼 수 없는 시간이 들어 있다. 공기와 습기, 온도와 기다림. 누구도 그것들을 하나씩 떼어내어 색의 공로를 설명할 수 없다. 그 색은 만남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만남이 남긴 손상이다.


나는 사람도 그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타인과 부딪치며 자신이 아닌 것들을 받아들인다. 누군가의 말이 오래도록 우리 안에 남고, 누군가의 부재가 우리의 걸음걸이를 바꾸며, 한 번의 친절이 평생 믿지 못했던 세계를 조금 열어놓는다. 어떤 만남은 우리를 빛나게 하고, 어떤 만남은 우리를 변색시킨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우리는 만남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렇다고 모든 상처가 아름답다는 뜻은 아니다. 고통은 고통일 뿐이며, 견디지 않아도 되었을 고통을 견딘 사람에게 그 고통의 의미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녹이 슨 그릇을 아름답다고 부르는 일은 쉽다. 그 그릇이 녹슬기까지 얼마나 오래 비를 맞았는지 묻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나는 베르디그리스라는 색을 사랑하게 되었지만, 그 색이 생겨나기 위해 무엇이 필요했는지 잊지 않으려 한다. 모든 변화가 축복은 아니며, 모든 흔적이 기념할 만한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닦아내야 하고, 어떤 것은 고쳐야 하며, 어떤 것은 더는 누군가를 해치지 못하도록 멈추게 해야 한다. 시간이 지났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일이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어떤 흔적은 남겨두어야 한다.


할머니의 그릇을 물려받은 날, 나는 그것을 바카라상 위에 올려놓았다. 처음에는 장식품처럼 보였다. 햇빛이 드는 시간마다 조금씩 다른 색을 보여주었고, 비가 내리는 날이면 표면의 푸른빛이 한층 깊어졌다. 나는 그릇 안에 물을 채우지 않았다. 무언가를 담아야만 쓸모가 생긴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했다.


어느 날 방문한 아이가 그릇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건 무슨 색이에요?”


나는 잠시 망설였다. 청록색이라고 대답하면 정확할 것이고, 녹청이라고 대답하면 조금 더 오래된 이름을 알려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쪽도 그릇에 남은 시간을 설명하지는 못했다.


“베르디그리스란다.”


아이는 그 말을 따라 했다. 발음이 서툴렀다. 그 아이에게 그릇은 그저 낯선 색의 물건일 뿐이었다.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항구도, 전쟁도 없었다. 그릇은 아이의 세계에 처음 도착한 하나의 색이었다.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모든 기억이 다음 사람에게 전달될 필요는 없다. 우리가 겪은 고통을 그대로 물려주는 것이 사랑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살아온 시간 속에서 어떤 것이 변했고, 무엇이 남았으며, 무엇을 더는 반복하지 않으려 하는지 보여줄 수는 있다. 누군가에게 상처의 역사를 설명하는 대신, 그 상처가 남긴 색을 보여줄 수는 있다.


아이는 그릇을 만지지 않고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러다 창밖을 보며 말했다.


“바다 같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릇은 바다가 아니었다. 그 안에는 물고기도 없었고, 파도도 없었으며, 어디론가 떠나가는 배도 없었다. 그러나 아이가 그곳에서 바다를 보았다면, 그릇은 잠시 바다가 된 것이었다. 한 사람의 기억이 다른 사람의 상상으로 옮겨가는 순간, 사물은 자신의 과거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존재가 된다.


그날 이후 나는 색을 볼 때마다 그것이 무엇에서 왔는지만 묻지 않기로 했다. 그것이 무엇이 될 수 있는지도 함께 생각하기로 했다.


베르디그리스는 구리의 부식에서 태어났지만, 반드시 쇠락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오래된 사물이 아직 빛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표면은 변했지만 물질은 남아 있고, 원래의 색은 사라졌지만 새로운 색이 생겨났다. 나는 그것을 회복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회복이라는 말은 잃어버린 것을 되찾았다는 뜻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릇은 처음의 색을 되찾지 못했다. 대신 처음에는 갖지 못했던 색을 얻었다.


사람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나는 아직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 다만 나이가 들수록 처음의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조금씩 옅어진다.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모두 되찾는다고 해도 지금의 내가 사라진다면, 그것을 회복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는 과거의 자신을 그리워하지만, 그 자신은 지금의 우리를 알지 못한다. 그때의 몸과 마음으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지금 사랑하는 사람들을 같은 방식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지금의 슬픔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도 여전히 같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그릇을 창가에 둔다.


햇빛은 매일 다른 각도로 들어온다. 어떤 날에는 푸른색이 선명하고, 어떤 날에는 녹색이 더 짙으며, 흐린 날에는 거의 회색처럼 보인다. 그릇은 변하지 않는 듯하면서도 매일 다른 색으로 나타난다. 내가 보는 빛이 달라졌기 때문인지, 그릇이 실제로 조금씩 변하고 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색은 사물 안에만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사물과 빛과 그것을 바라보는 눈 사이, 그 셋이 잠시 같은 자리에 머무는 순간에 색이 생겨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기억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과거는 지나간 곳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가 그것을 바라볼 때마다 조금씩 다른 색으로 돌아온다. 젊은 날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부모의 침묵을 나이가 들어 이해하고,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의 얼굴에서 어느 날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렇다고 과거가 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에 다른 빛이 들어온 것이다.


나는 이제 오래된 그릇을 더는 닦으려 하지 않는다.


그것이 처음의 색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릇에는 그릇이 지나온 시간이 있고, 나에게는 내가 지나온 시간이 있다. 두 시간은 서로 같지 않지만, 창가에 놓인 그릇을 바라보는 동안 나는 내 삶의 어떤 부분이 저 푸른 표면과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잃어버린 것들, 끝내 말하지 못한 것들, 잘못 이해한 채 오래도록 미워했던 것들. 그 모든 것이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들이 지나간 뒤에도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은 말할 수 있다.


그 사실에 아름다움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름다움이라는 말은 때로 너무 쉽게 모든 것을 구원한다. 견딘 사람에게 강인함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잃은 사람에게 깊이라는 이름을 붙이며, 돌이킬 수 없는 일에 의미라는 이름을 붙인다. 나는 더는 모든 것에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믿지 않는다. 다만 의미가 없다고 해서 존재했던 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그릇은 여전히 창가에 있다.


누군가에게는 낡은 금속이고, 누군가에게는 푸른 장식품이며, 나에게는 두 사람이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사물이다. 그러나 언젠가 내가 사라지고 다른 사람이 그 그릇을 발견한다면, 그 사람은 그것을 전혀 다른 것으로 볼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무 의미도 찾지 못한 채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 가능성을 받아들이려 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대상을 영원히 보존하는 일이 아니라, 언젠가 자신이 없는 세계에서도 그것이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허락하는 일일 테니까.


오늘도 창밖에는 비가 내린다.


빗방울이 유리창을 타고 내려온다. 그릇의 표면에 맺힌 빛이 흔들린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한다. 우리는 사라지는 것들을 붙잡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름을 만들어왔을까. 사랑, 기억, 역사, 예술. 이름을 붙이면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기록하면 잃어버리지 않을 것처럼.


그러나 이름은 사물을 붙잡는 손이 아니라, 사물에 다가가는 문인지도 모른다.


베르디그리스.


나는 그 이름을 다시 한번 천천히 읽는다. 그 안에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없고, 항구도 전쟁도 없다. 그저 구리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변화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 이름을 통해 오래전의 집으로 돌아간다. 돌아간 집에서 나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할머니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고, 할아버지는 여전히 맞은편 의자를 밀어 넣는다. 나는 그릇을 닦으려다가 손을 거둔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침묵 속에서 무엇을 나누었는지 알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어떤 것은 끝내 설명되지 않은 채 우리에게 남는다. 설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설명할 수 없으므로 다른 방식으로 살아남는 것이다.


나는 창문을 닫는다.


그릇은 그 자리에 있다. 푸른색과 녹색 사이, 낡음과 아름다움 사이, 사라진 것과 아직 남아 있는 것 사이에.


나는 그 색을 더는 녹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간 자리에 생긴 색이다.


그리고 시간은, 지나간 뒤에도 때때로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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