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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의 고독

소멸로 완성되는 존재의 역설

by구시안
구시안 신촌거리.png


세계는 다디단 감각으로 시작되었다.

어머니의 젖샘에서 흘러나오는 숭고한 달콤함은 생명이 최초로 경험한 존재의 긍정이자, 번성하리라는 나지막한 약속이었다. 그리하여 탄생의 순간부터 본능적인 갈망이 시작된다. 그것은 허기를 달래는 단순한 영양의 섭취가 아니라, 사방이 어둡고 차가운 비존재의 깊은 바다 속에서 존재가 무사히 받아들여졌음을 확인하려는 눈물겨운 허우적거림이다.


그러나 결정(結晶)이 된 설탕을 유심히 들여다본 적이 있는가.

투명하고 정교하게 깎아지른 백색의 다면체. 설탕은 무결한 고체로 서 있을 때조차 언제나 부서질 듯 아슬아슬한 고독을 품고 있다. 그것은 본래 사탕수수의 검푸른 줄기 속에서, 사탕무의 묵직한 뿌리 깊은 곳에서 태양의 빛과 땅의 습기를 머금고 유유히 흐르던 액체였다. 생명의 활력으로 수액 속에 살아 숨 쉬던 영혼은 거친 증발과 불길의 정제를 거치며 비로소 단단한 육신. 즉, 결정이라는 형태를 얻는다.


형태를 얻는다는 것은 곧 개별자가 된다는 뜻이며, 개별자가 된다는 것은 세상의 나머지 전체로부터 단절되는 형벌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결정이 된 설탕의 고독은 바로 이 모순된 성질에서 비롯된다. 설탕의 존재 이유이자 본질은 ‘달콤함’이라는 감각을 타자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완전한 형태를 고수하고 단단하게 다물어진 입자로 존재하는 한, 설탕은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본질인 달콤함을 나누어줄 수 없다. 자기 형태를 지켜내는 동안 설탕은 그저 사각거리는 백색의 모래알에 불과하며, 스스로를 가둔 냉정한 감옥일 뿐이다.


설탕이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 본질을 드러내려면, 오직 단 하나의 길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찬란하게 스스로를 녹여 없애는 일이다.


뜨거운 물속으로, 혹은 누군가의 혀 위로 떨어진 설탕 결정은 경련하듯 바스러지기 시작한다. 선명하던 모서리가 무너지고, 빛을 반사하던 투명한 면들이 흐릿해지며, 마침내 형체도 없이 완전한 무(無)로 돌아간다. 설탕이 자기 자신이라는 고유한 형태를 완벽하게 상실하는 바로 그 멸절의 순간에, 세상에는 짙은 달콤함이 피어난다.


달콤함은 설탕의 존재가 소멸하면서 남긴 거룩한 유산이며, 자기 파괴를 통해 완성되는 가장 극진한 사랑의 형태다. 타인을 기쁘게 하기 위해, 타인에게 삶의 온기와 위안을 주기 위해 자신의 가장 단단한 뼈대를 기꺼이 물에 개어버리는 행위.


이 얼마나 아리고 슬픈 역설인가. 존재하고자 하면 본질을 잃고, 본질을 실현하고자 하면 존재를 잃어야 하는 이 비극.


어쩌면 인간의 삶도 이 백색의 결정과 그리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저마다 ‘나’라는 자아의 형태를 견고히 쌓아 올리며 세상이라는 물결 속에 섞이지 않으려 발버둥 친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마음의 모서리를 더욱 딱딱하게 벼르고, 자신의 개별성을 지키기 위해 고독이라는 투명한 감옥 안에 스스로를 둔다.


하지만 아무리 완벽하게 벼려진 자아라 할지라도, 타인이라는 물속으로 녹아들지 않는 한 인생은 그저 사막의 건조한 모래알처럼 아우성치다 사라질 뿐이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 타인의 고통에 깊이 공감한다는 것은 내 안의 딱딱한 자아를 조금씩 허물어 타인이라는 바다 속에 스스로를 녹여내는 과정이 아니겠는가.


설탕은 물속에서 사멸하지만, 그 물을 전과 전혀 다른 차원의 구원으로 바꾸어 놓는다. 형체는 사라졌으나, 맛으로 살아남아 타자의 피와 살이 되고 정신의 위로가 된다. 그것은 소멸을 통한 영원성, 죽음을 통한 승리다.

오늘 밤, 찻잔에 작은 설탕 한 조각이 떨어진다. 소리 없이 다스르르 무너져 내리는 백색의 모서리들을 가만히 지켜본다.


스스로를 버려 세상을 고요히 단맛으로 물들이는 저 조용한 응축과 해체의 극장. 그 아득한 침묵 속에서 한 생명이 이 세상에서 치러내는 가장 고결하고도 슬픈 고독의 성찰을 읽어낸다.


그 소멸은 종말이 아니다. 자신의 형태를 허물어 타자의 깊숙한 곳으로 스며드는 일, 그리하여 끝내 스스로를 타자화함으로써 완벽해지는 연금술이다. 단단함이라는 오만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타인의 삶 속에 스며들어 그 일부가 되는 성스러운 침투.


우리는 흔히 사라짐을 두려워하고 남아있음을 고집하지만, 정작 세상을 바꾸는 것은 형체를 고수한 채 굳어있는 것들이 아니라, 스스로를 녹여 형체 없이 흩어진 것들의 훈기다. 단단한 결정으로 남아있는 한 그것은 오직 자기 자신일 뿐이지만, 녹아 사라지는 순간 그것은 그를 머금은 모든 세계의 기쁨이 된다.


백색의 입자가 차가운 차(茶) 속으로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나면, 잔 속에는 단 하나의 흔적도 남지 않는다. 그러나 한 모금을 머금는 순간 알게 된다. 사라짐으로써 그곳에 가장 완벽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가장 눈부신 존재감은 형태를 쥐고 있을 때가 아니라, 자기라는 형태를 온전히 던져 타인의 결핍을 채워줄 때 비로소 피어난다. 설탕의 고독은 그렇게 제 몸을 부수어 세상을 달게 만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쓸쓸한 고백이다.


설탕은 억울해하지 않는다. 자신이 얼마나 많이 들어갔는지 알리기 위해 물의 표면에 떠오르지 않는다. 단맛이 충분하지 않다고 느껴지는 순간에도 자신을 증명할 방법은 없다. 다만 그것이 녹아 있었다는 사실은 남는다. 혀가 기억하고, 몸이 받아들이며, 한 잔의 음료는 이전과 다른 것이 된다.


나는 그 무심함이 부럽다가도 문득 두려워진다.

만약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면,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어디에서 확인해야 할까.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주었는지가 아니라, 아무것도 주지 않는 순간에도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어디에서 배워야 할까.


아무에게도 친절하지 않은 날. 누군가의 기분을 살피지 않고 자신의 기분을 먼저 들여다보는 날. 상대가 원하는 대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다른 대답을 선택하는 날. 그런 날에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얼마나 믿고 있을까.


어쩌면 고독은 혼자 남겨진 상태가 아닐 것이다. 누구에게도 녹아들지 않은 채 자신의 형태를 바라보는 시간, 그 형태가 타인에게 쓸모 있는지 묻지 않고도 한곳에 존재할 수 있는 시간. 고독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세상과 담을 쌓는 일이 아니라, 세상 속에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을 완전히 내어 주지는 않는 일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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