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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렉트릭 옐로우 : Electric Yellow

어둠보다 눈부신 것들

by구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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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어둠보다 먼저 사람을 지치게 하는 빛이 있다. 너무 밝아서 사물의 윤곽을 지워버리고, 너무 선명해서 그 아래 놓인 것들의 슬픔을 감추는 빛. 그것은 모든 것을 드러내는 듯하면서 정작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나는 한때 그런 빛을 사랑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이 내 안의 어둠을 대신 밝혀줄 수 있으리라 믿었다.


일렉트릭 옐로우 : Electric Yellow


그 이름에는 전기가 흐른다. 사과의 껍질을 찢고 나올 것 같은 노란색, 눈동자에 닿는 순간 반사적으로 눈꺼풀을 닫게 만드는 색. 그것은 자연이 오랜 시간에 걸쳐 익힌 빛이 아니라, 자연이 미처 허락하지 않은 속도로 만들어진 빛에 가까웠다. 꽃이 피기 전에 꽃의 색을 완성하고, 해가 뜨기 전에 한낮의 밝기를 도착시키는 색. 기다림이라는 과정이 불필요하다는 듯, 존재하는 것만으로 이미 충분히 눈부신 색이었다.


그러나 나는 밝음이 언제나 생명의 편에 서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병원의 복도는 밤에도 밝았고, 아무도 없는 사무실의 형광등은 새벽까지 꺼지지 않았으며, 떠난 사람의 방에 남겨진 스탠드는 그가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사실과 무관하게 바카라상 위를 환히 비추었다. 빛은 부재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사물이 있는 곳을 밝힐 뿐, 사물이 왜 없어졌는지는 묻지 않는다.


어린 시절, 나는 노란색을 행복의 색이라고 배웠다. 해바라기와 병아리, 햇볕에 말린 빨래와 잘 익은 과일이 모두 같은 계열의 빛 속에 놓여 있었다. 노란색을 그리면 그림은 밝아졌고, 밝아진 그림은 잘 그린 그림으로 여겨졌다. 누구도 내게 물어보지 않았다. 한낮의 태양 아래에서도 왜 어떤 사람은 추위를 느끼는지, 환한 방에서 혼자 울 때 눈물은 왜 어둠 속에서보다 더 선명해지는지.


우리는 색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것을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붉음은 열정이고, 파랑은 고독이며, 검정은 상실이라고 배운다. 그러나 실제의 감정은 그렇게 간단한 분류표 안에 머물지 않는다. 사랑은 때때로 회색에 가깝고, 죽음은 오래된 흰색처럼 보이며, 희망은 너무 밝아서 차마 바라볼 수 없는 노란색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름은 색을 설명하지만 색이 우리에게 가하는 일까지 설명하지는 못한다.


일렉트릭 옐로우는 그런 색이었다. 바라보는 사람에게 아무런 준비도 요구하지 않고, 눈앞에 나타나는 순간 자신을 받아들이라고 명령하는 색. 그것은 질문보다 대답에 가까웠고, 침묵보다 소음에 가까웠다. 세상이 점점 더 많은 빛을 생산하는 동안 우리는 빛을 견디는 법을 배웠다. 화면은 밤을 지우고, 간판은 골목의 어둠을 밀어내며, 잠들지 않는 도시의 창문들은 저마다 깨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애쓴다. 누구도 불을 끄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불을 끄는 순간 자신이 감추어온 것이 드러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 날 잘 익은 사과 하나를 오래 바라보았다. 껍질은 비현실적으로 노랬고, 표면에 맺힌 물방울들은 작은 전구처럼 빛났다. 사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색이 아름다운지, 지나치게 밝은지, 누군가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한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저 사과로 놓여 있었다. 빛을 반사하면서도 빛이 되려고 하지 않았고, 익어가면서도 익음의 의미를 설명하지 않았다.


그 앞에서 나는 인간이 사물보다 얼마나 많은 것을 요구하며 살아가는지 생각했다. 우리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아름다워야 하고, 쓸모 있어야 하며, 누군가의 기억에 남을 만큼 선명해야 한다. 우리의 얼굴은 타인의 눈에 비치기 위해 다듬어지고, 우리의 말은 침묵보다 나은 말이 되기 위해 수정되며, 우리의 삶은 지나간 시간보다 더 가치 있는 시간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빛을 요구하면서 그 빛에 타들어 가는 자신을 실패라고 부른다.


어쩌면 불행은 어둠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밝아져야 한다는 강박 속에 있는지도 모른다.


모든 상처가 극복되어야 하고, 모든 이별이 성장의 계기가 되어야 하며, 지나간 고통에는 반드시 의미가 부여되어야 한다는 믿음. 우리는 슬픔조차 쓸모 있는 것으로 만들려 한다.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채 끝나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돌이킬 수 없는 상실 앞에서도 그것이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었는지 확인하려 한다. 마치 삶이 우리에게 손익계산서를 요구하는 것처럼.


하지만 어떤 상실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어떤 이별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들지 않으며, 어떤 기다림은 끝내 도착으로 바뀌지 않는다. 떠난 사람은 돌아오지 않고, 부서진 것은 이전과 같은 모양으로 복원되지 않는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위로도 교훈도 필요하지 않을 때가 있다. 다만 일어난 일이 일어났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무거운 진실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때 빛은 조금 다른 의미를 갖는다.


나는 일렉트릭 옐로우를 다시 생각한다. 그것은 여전히 눈부시고, 여전히 공격적이며, 어쩌면 여전히 아름답다. 다만 이제는 그 색이 어둠의 반대편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너무 밝은 빛도 사람을 고립시킬 수 있고, 가장 선명한 색도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을 품을 수 있다. 빛과 어둠은 서로를 밀어내는 두 개의 세계가 아니라, 한 사물 안에서도 동시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깊이일 것이다.


사과의 표면에서 물방울 하나가 흘러내렸다. 그것은 빛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었다. 다만 빛을 붙들고 있던 자리를 떠났을 뿐이었다. 물방울이 지나간 자리에는 아주 희미한 흔적이 남았다가 곧 사라졌다. 나는 그 짧은 변화를 바라보며 사라지는 것들이 반드시 패배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어떤 것들은 제자리에 머무르지 않음으로써만 자신의 시간을 완성한다.


창밖에서는 저녁이 시작되고 있었다. 건물의 유리창들이 하나둘 노을을 받아냈고, 멀리서 켜진 신호등의 노란 불빛이 젖은 도로 위에 길게 늘어졌다. 낮의 빛은 사라지고 있었지만 세상은 그것을 붙잡으려고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나무들은 그림자를 늘어뜨렸고, 사람들은 각자의 방향으로 걸어갔다. 누구도 저녁에게 더 밝아지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노란색의 다른 이름을 떠올렸다. 그것은 기쁨도, 희망도, 경고도 아니었다. 아직 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더 이상 밝아질 필요가 없는 빛. 어둠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잠시 제 색을 유지하는 빛.


일렉트릭 옐로우.


그 색은 여전히 눈을 찌를 만큼 밝았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 눈부심 속에서 무엇을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빛이 우리에게 의미를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모든 어둠이 밝혀져야만 사라지는 것도 아니므로.


때로는 눈을 감는 일이 빛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빛이 닿지 못하는 곳에도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끝내 견뎌야 하는 것은 어둠 그 자체가 아니라, 어둠 속에서도 반드시 빛나야 한다고 믿어온 오랜 습관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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