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직 미로의 깊이 속에서 비상구를 찾다
계단은 내려가는가, 아니면 스스로를 말아 쥐며 아래로 잦아드는가.
차가운 철제 난간을 짚을 때 손끝으로 전해져 오는 것은 건물의 온도라기보다는 시간의 각도다. 한 계단, 다시 한 계단. 발걸음이 아래를 향할수록 내 안의 무언가는 위로 솟구치고, 위를 쳐다볼수록 눈동자는 까마득한 바닥의 정적으로 떨어진다.
삶은 일직선으로 흐른다는 착각 속에 놓이지만, 실상 모든 궤적은 나선에 가깝다. 어제 스쳐 지났던 절망을 오늘 또다시 마주하는 까닭은 제자리를 맴돌아서가 아니다. 조금 더 깊어진 깊이에서, 한 뼘 더 아득해진 높이에서 같은 궤적을 그리며 내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돌고 돈다는 것은 제자리걸음이 아니라, 제 안으로 깊어지는 축복이자 형벌이다.
모서리를 돌 때마다 난간이 꺾이고, 사각형의 미로는 끊임없이 중심부로 유인한다. 저 깊은 바닥에 도달하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빈 허공, 혹은 먼저 내려가 자신을 웅크리고 있을 오래된 우울.
그러나 계단의 진짜 비밀은 아래에 있지 않다. 내려가는 모든 순간은 중심을 향한 고요한 집착이며, 가장 깊은 바닥에 발이 닿는 그 찰나, 나선은 비로소 올라가는 길의 시작점이 된다.
어둠은 깊어질수록 둥글어진다. 오늘 밤도 나만의 나선을 밟으며 가장 나다운 깊이로 침전한다.
그 깊이의 바닥에 가만히 턱을 괴고 엎드린다.
수직으로 내려앉은 차가운 침묵이 등 위에 번진다. 수많은 발자국이 스쳐 지나간 시멘트의 피부는 서늘하고 피로하다. 위를 올려다보면 아득하게 잘려 나간 프레임 속으로 어둠의 사각형들이 겹겹이 겹쳐 있을 뿐, 어디가 처음이었는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다.
원형으로 회전하며 떨어지는 줄 알았던 시간은 실상 나선형의 직각을 그리며 가파르게 마모되고 있었다. 매 순간 꺾어지는 모서리마다 버리지 못한 미련이 부딪혀 깨져 나갔고, 그 파편들이 바닥에 차곡차곡 쌓여 이토록 어두운 기하학을 완성했다.
이제 발밑을 받치는 것은 시멘트의 딱딱함이 아닌, 그간 내려오며 흘려보낸 유령 같은 시간들이다. 올라갈 길을 찾으려 애쓰지 않는다. 계단이 스스로를 말아쥐며 깊어지듯, 사각형의 미로 속에서 온전히 자신만의 궤적을 완성하는 일. 어둠의 정점에 다다랐을 때, 비어 있던 바닥은 스스로를 집어삼키며 새로운 방향을 내어준다.
계단이 끝나는 자리에서 비어 있는 손바닥을 펼쳐 본다.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아서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 마디 사이로 어둠이 수차례 지나갔기에 가벼워진 손이다. 꺾이고 굽어지며 내려오는 동안 피부에 밴 정적의 냄새가 스며있다.
누군가는 이 계단을 고통의 하향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서리를 하나씩 지나칠 때마다 떨어져 나간 것은 무거운 과욕이었고, 얻은 것은 아래를 똑바로 건너다보는 눈동자뿐이다. 내려가는 행위 자체가 스스로를 가다듬는 거친 정질이었다.
가장 낮고 서늘한 지점에 도달해서야 사각의 프레임은 비틀림을 멈춘다. 사방을 둘러싼 시멘트 벽면이 하나의 완성된 방처럼 몸을 감싸 안는다. 멈춰 선 발끝에서부터 거꾸로 솟구쳐 오르는 소슬한 바람. 위를 향해 다시 난간을 잡는 손길에는 처음 내려올 때의 망설임이 없다.
어둠의 축을 따라 회전하던 세계가 가만히 숨을 고른다. 올라가는 길은 다른 길이 아니다. 방금 지나쳐 온 바로 그 궤적을, 조금 더 단단해진 등갗으로 다시 밟아 나가는 일이다.
난간을 다시 움켜쥔다. 손에 닿는 철의 감촉이 아까보다 미세하게 따스하다.
올라가는 발걸음마다 서늘한 어둠이 켜켜이 스쳐 지나간다. 한 칸씩 올라설 때마다 사각형의 아득한 프레임은 조금씩 넓어지고, 아래로 흘려보냈던 시간의 모서리들이 하나둘 제자리를 되찾는다. 수직의 미로 속에 갇혀 있던 것은 길을 잃어서가 아니라, 자신을 이루는 가장 깊은 뼈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마침내 마지막 계단을 밟고 서서 지나온 굴곡을 내려다본다. 아득하게 수놓인 수직의 궤적은 더 이상 나를 가두는 감옥이 아니다.
문밖의 빛이 손끝에 닿을 때, 그건 어둠이 끝난 자리가 아니라 둥글게 말려 있던 나선이 마침내 바깥으로 걸어 나가는 순간이다. 그 위에는 비상구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