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가는 모든 것
태초에, 첫 입술이 말을 배우기도 전에
나는 이미 돌들의 조용한 피부 위에 세상의 역사를 적어 내려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주 오래된 방랑자일 뿐이고,
기억에 존재하지 않은
빙하의 깊은 침묵 속에서 잠들었다가
먹구름의 혼돈하는 심장 속에서 춤추던 자였으며,
잊힌 왕들의 입술에 닿았던 그 숨결로
이름 없는 들꽃의 뿌리를 보살피며
십만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흐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알 수 없는, 기억할 수도 없는, 변신의 변신을 거듭하면서.
나에게는 아무런 형태가 없으나 완고한 대지 위에 가장 거대한 골짜기를 깎아내고, 나에게는 아무런 목소리가 없으나 내가 떨어질 때 숲은 가장 부드러운 자장가를 얻는다. 나는 어둠 속에서 흘린 누군가의 눈물이자 숨 쉬는 모든 맥박을 연결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실이며, 목마른 땅 위에 또 한 번 자비로 내려앉기 위하여. 물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 있다.
지워진 것이 존재한다면, 아마도 그런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우주가 간직한 기억,
혈관을 흘러가는 액체를 견뎌내야만 하는 존재.
상태의 시간은 영원히 떠나가고,
기억이 지워짐으로 영원히 머무르며, 영원히 온전한 것. 그것이 사람이라는 생각이 물드는 오후. 제법 차가운 바람과 함께 거리를 스쳐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속도로 걷는다. 누군가는 휴대전화의 작은 빛 속에 얼굴을 묻고, 누군가는 쇼윈도에 비친 자신의 형상을 확인하며, 누군가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을 어떤 슬픔을 주머니 속에 넣어둔 채 횡단보도의 신호를 기다린다. 유리창 안쪽에서는 커피가 식어가고, 건물의 높은 층에서는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수도꼭지를 잠근다. 도시의 하루는 수많은 사소한 동작으로 이루어지지만, 그 모든 동작의 밑바닥에는 내가 있다. 입술을 적시는 한 모금, 씻겨 내려가는 먼지, 말라붙은 눈가에 뒤늦게 도착하는 눈물. 사람들은 그것을 저마다 다른 이름으로 부르지만, 나는 한 번도 이름을 요구한 적이 없다.
나는 그저 통과할 뿐이다.
돌에서 나무로, 나무에서 짐승으로, 짐승에서 인간으로. 내가 지나간 자리마다 생명은 자신의 모양을 얻었고, 그 모양을 잃은 뒤에도 나는 다른 곳에서 같은 일을 반복했다. 한때 바다였던 곳에 사막이 생기고, 한때 숲이었던 곳에 도시가 들어섰다. 인간은 땅을 나누고 경계를 긋고, 소유할 수 있는 것과 소유할 수 없는 것을 구별해 왔다. 그러나 비가 내리는 순간만큼은 그 모든 구별이 무력해진다. 빗방울은 국경을 모르고, 지붕의 높이를 차별하지 않으며, 누구의 슬픔이 더 깊은지 묻지 않는다. 나는 가장 가난한 지붕 위에도, 가장 화려한 궁전의 창턱에도 똑같은 무게로 내려앉는다.
어쩌면 인간이 끝내 이해하지 못하는 자비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대상을 선택하지 않는 마음. 돌이킬 수 없는 일들 앞에서도 완전히 등을 돌리지 않는 태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존재에게조차 다시 생명을 내어주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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