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번의 밤의 여정을 시작하다
낮의 온기가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지평선 너머로 검푸른 어스름이 밀려들 때, 세상은 비로소 눈을 감고 또 다른 결의 호흡을 시작한다. 그것은 비움이 아니라 새로운 채움이며, 소멸이 아니라 고요하고도 묵직한 생명이 피어나는 거룩한 개화(開花)의 시간이다.
가장 먼저 거리의 모서리와 낡은 처마 끝에서부터 스며나온 어둠은, 부드러운 먹물처럼 스며들어 사물들의 날 선 경계들을 지워낸다. 낮 동안 바쁘게 엉켜 있던 분주한 소음들이 가라앉은 자리에, 이름 모를 풀벌레의 울음과 멀리서 들려오는 바람의 결이 촘촘한 밀도로 엉겨 붙는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손으로 만질 수 있을 것만 같은 중력, 혹은 깊은 숲속에서 갓 피어난 꽃잎의 윤기처럼 묵직한 무게감을 지닌 채 대기 속으로 번져간다.
하늘은 문득 푸른빛을 거두고 은밀한 벨벳의 자락을 펼쳐 보이며, 그 위로 하나둘 아스라이 빛나는 별들의 봉오리를 맺기 시작한다. 캄캄한 허공 속에서 가만히 눈을 깜빡이는 별빛들은, 낮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마음의 이면이자 어둠이라는 토양 위에서 피어난 가장 찬란한 꽃송이들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가지 사이로 밤의 향기가 아득하게 피어오르고, 세상은 거대한 밤의 정원 속에서 깊고 깊은 잠과 꿈의 서사를 싹틔운다.
하루의 허물을 벗어던진 세계가 가장 본연의 눈동자를 뜨는 순간, 장엄한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밤의 숨결이 가만히 어루만져진다.
모든 소음이 멎고, 오롯이 밤의 꽃이 피어나는 나만의 고요한 시간.
밤이 피어 오른다.
내 고삐에 묶인 나를 바라본다. 완벽한 절정에 닿는 순간까지. 어떤 집착이 따라오든 나는 내 집착이 내 것이 아니기를 원한다. 거울 속에 비춰진 사람이 타인이기를 원한다. 내 안에 갇힌게 무엇이든 나는 지금 그걸 원하는 밤을 다시 보내게 되었다.
내가 땀에 젖어 꿈을 꾸는 동안, 수 십명의 사자(使者)가 달려든다.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 수 없다. 오랜 훈련 뒤에 그 불변의 법칙을 믿게 된 나는 내 모든 숨결로 뒤덮인 채 잠들어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이 넓어지고 깊어지는 태양의 발치가 끝난 시간이 오면, 뒤편에서 진실을 말하며 반짝이는 것을 바라본다. 모든 시간을 거슬러 내달리는 높은 산과 더 크고 끝을 모를 바다가 펼쳐진다. 결국은 더욱 강해지는 것이 되어 자리한다.
모든 것의 극성(極性)이 모여 나의 진실이 된다.
그렇게 밤이 피어 오른다.
분연히 솟구치는 민물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 마리의 유리고기처럼 자리한다.
사 십 구년의 비극적 날들이 끝났다고 볼 수는 없다. 이 물 속에선 씨앗이 계속해서 태어난다. 하늘 그물에 걸린 별 하나가 가슴뼈를 지나 이글거린다.
공기의 꽃들은 소리없이 노래를 하고
빌딩을 덮은 공기들은 규정하는 벽을 지나고
시월의 길을 따라 전진한다.
몸의 틀 속에 공기를 채워 눈으로 말을 하는 모든 것들이 입속의 공기가 필요없다고 말한다.
통과하고 스며들고 물드는 모든 것들을 내버려 둔다.
이미 심장의 굶주림이 말했다.
달의 모습을 바꿀 수는 없다고. 은빛의 혼란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그러니 그렇게 밤에 물들라고.
부서진 흑요석속에 반짝이는 은빛을 쥐고 놓지 말라고 말한다.
그림자 지고 가파른 산들을 그려줄테니 그렇게 밤으로 물들어 가라고 말한다.
그렇게 물들어 또 한 번의 밤의 여정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