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맛을 잃어가는 마음에 대하여
모든 타락은 언제나 가장 달콤하고 부드러운 형태로 찾아온다.
사람은 독보다 설탕을 먼저 의심하지 않는다.
독은 냄새가 나고 색이 다르며 입에 넣는 순간 몸이 알아차린다. 그러나 설탕은 그렇지 않다. 하얗고 작고 달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면 아무런 위협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만지고 맛보고 그것에 만족하게 되는 마음도 마찬가지다.
날것의 생이 지닌 쌉싸름한 결을 견디지 못해 인류가 이룩한 가장 매혹적인 발명품, 그것은 아마도 설탕일 것이다. 사탕수수의 섬유질을 으깨고 끓여 마침내 순수한 결정체만을 남긴 그 하얗고 무해한 가루 앞에서, 인간의 영혼은 무장해제된 채 납작하게 엎드린다. 우리는 그것을 달콤함이라 부르고, 본능은 홀린 듯 그 허공의 신기루를 향해 손을 뻗는다.
마음 역시 그 결정을 닮아간다. 인간의 내면은 본래 스며드는 고통과 삭풍을 견디며 스스로의 결을 단단하게 벼려야 하는 생물학적 영토다. 그러나 날것의 진실과 마주하기엔 세상이 너무 시리고 무섭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음의 밭에 슬며시 설탕물을 붓기 시작한다. 쓴소리는 귀를 막고, 모순과 부조리는 가당찮은 위로의 시럽으로 덮어버린다. 갈등의 뼈대를 녹여내고 그 자리에 미끈거리는 환상과 값싼 긍정의 당도를 채워 넣을 때, 마음은 일시적으로 유연해지고 황홀경에 이른다.
그러나 당분에 절인 마음은 비극의 다른 이름이다. 설탕에 절인 과일이 원형을 잃고 끈적한 방부 상태로 박제되듯, 당분에 잠긴 마음은 외부의 자극을 스스로 소화하는 면역력을 잃어버린다. 그것은 부패하지 않는 대신 사유의 생명력을 상실한 채, 오직 더 강한 단맛만을 갈구하는 중독의 포로로 전락한다. 아픔을 겪지 않으려 발버둥 치다 끝내 아픔을 느낄 자격조차 박탈당하는 형벌, 그것이 바로 달콤함이 치르는 잔혹한 대가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경계해야 할 악은 거대한 폭력이 아니라, 이 연하고 부드러운 유혹이다. 독이 품은 쓰디쓴 맛은 경계라도 하게 만들지만, 설탕은 미소를 지으며 신경을 마비시키고 영혼을 당뇨병 말기의 환자처럼 서서히 썩어 들어가게 만든다.
이제 그 끈적한 당의(糖衣)를 씻어내야 할 때다. 달콤한 허무가 뼛속까지 스며들기 전에, 차가운 생의 우물물로 마음을 씻어내려야 한다. 비록 그 과정이 아리고 잇몸이 저릴지라도, 썩어 문드러진 환상의 당도를 토해낸 자리에서야 비로소 날것의 피가, 진짜 살아 있는 인간의 맥박이 뛰기 시작할 것이므로.
사람의 마음은 이상하게도 단것을 먼저 기억한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끌리는 것에 그 첫 번째도 달콤한 당분이 가득한 것들이다. 갖고 있지 않거나,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었던 것. 자신이 갖고 있지 않는 그것을 맛보고 싶은 것이다.
혀끝에 오래 남는 것은 대개 짠맛이나 쓴맛이 아니라, 한순간 입안을 환하게 적시는 단맛이다. 어린 날의 사탕 하나, 겨울밤 누군가가 건네던 따뜻한 말 한마디, 아무 이유 없이 받은 선물, 사랑한다는 말, 당신만은 다르다는 믿음. 우리는 그런 것들을 살아가며 오래 간직하게 된다. 그리고 오래 간직한 것일수록 진실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마음에도 설탕에 절이는 시간이 있다.
과일을 설탕에 재워두면 과육은 천천히 자신의 수분을 내어준다. 단맛이 안으로 스며들수록 본래의 맛은 흐려지고, 오래 둘수록 썩지 않는 대신 생생함도 잃는다. 사람의 마음도 그렇다. 지나치게 달콤한 것에 오래 노출되면 스스로의 맛을 잃는다.
칭찬에 익숙해진 사람은 침묵을 견디지 못한다.
관심에 길들여진 사람은 무관심을 모욕으로 받아들인다.
사랑받는 일에 중독된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처음에는 그것이 행복인 줄 안다.
누군가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증거 같고, 사람들이 나를 찾아준다는 것은 내가 쓸모 있는 인간이라는 확인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타인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거울처럼 들여다보며 살아간다. 그 거울이 아름다운 말을 돌려줄 때마다 마음은 조금씩 안도한다.
문제는 그 안도감이 너무 달다는 데 있다.
단맛은 고통을 없애지 않는다. 다만 잠시 가려준다.
상처 위에 설탕을 뿌린다고 상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상처의 모양을 알아보지 못하게 만들 뿐이다. 그래서 사람은 때때로 자신이 행복해졌다고 착각하면서 더 깊은 불행 속으로 들어간다.
좋은 말만 듣고 싶어 하는 마음은 나쁘지 않다.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욕망 또한 인간에게 너무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욕망 자체가 아니라, 그 욕망이 나를 먹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처음에는 내가 단것을 먹는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단것이 나를 먹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사람은 진실보다 기분 좋은 말을 선택한다.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사람보다 자신을 추켜세우는 사람을 곁에 둔다. 잘못을 말해주는 관계보다 무조건 괜찮다고 말해주는 관계를 편안해한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기보다 자신이 듣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
그렇게 마음은 조금씩 설탕에 절인다.
절인 마음은 오래 견디는 것처럼 보인다. 쉽게 상처받지 않는 것 같고, 무엇이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견딤이 아니라 감각의 마비일지도 모른다.
쓴맛을 느끼지 못하는 혀가 건강한 것은 아니다.
아픈 것을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는 마음도 건강한 것이 아니다.
사람은 쓴맛을 통해 자신이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게 된다. 거절을 통해 자신의 경계를 배우고, 실패를 통해 자신의 한계를 알며, 이별을 통해 무엇을 사랑했는지를 뒤늦게 이해한다. 고통은 삶에서 제거해야 할 불순물이 아니라, 삶의 농도를 알려주는 감각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쉽게 고통을 없애려고 한다.
외로우면 누군가를 찾고, 불안하면 소비하고, 허전하면 화면을 켜고, 사랑받고 싶으면 아무 관계나 붙잡는다. 마음속에 구멍이 생길 때마다 우리는 그곳에 달콤한 것을 밀어 넣는다.
그러고는 구멍이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구멍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단지 설탕으로 막혀 있을 뿐이다.
달콤한 관계가 언제나 좋은 관계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달콤한 관계에는 때때로 값을 치러야 하는 순간이 온다. 상대가 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침묵해야 할 때 웃어야 하며, 싫은데도 좋다고 말해야 한다. 사랑받기 위해 자신을 조금씩 포기하다 보면 어느 날 문득 거울 속에 낯선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 사람은 사랑받고 있지만,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다.
나는 그것이 단맛의 가장 무서운 얼굴이라고 생각한다.
단맛은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계속 원하게 만든다.
한 번의 칭찬은 기분을 좋게 하지만, 칭찬에 익숙해진 마음은 칭찬이 없는 하루를 견디지 못한다. 한 번의 사랑은 사람을 살게 하지만, 사랑받는 감각에 중독된 마음은 혼자 있는 시간을 실패처럼 여긴다.
그래서 욕망은 점점 커진다.
더 많은 관심, 더 많은 박수, 더 많은 사랑, 더 많은 인정.
그러나 이상하게도 많이 가질수록 마음은 가난해진다.
왜일까.
타인의 손에 쥐어진 설탕으로 자신의 허기를 채우려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타인의 표정을 살핀다. 내가 괜찮은지, 사랑받고 있는지, 필요한 사람인지 확인한다. 그리고 확인이 끝나면 잠시 편안해진다. 하지만 그 편안함은 오래가지 않는다. 다시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갈증이다.
사랑은 나를 충만하게 하지만, 갈증은 무엇을 마셔도 다시 목마르다.
어쩌면 인간이 가장 어려워하는 일은 단것을 거부하는 일이 아니라, 단것 없이도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는 일인지 모른다.
아무도 손뼉 치지 않는 방에서 자신이 한 일을 사랑하는 것.
아무도 연락하지 않는 밤에 자신의 고독을 견디는 것.
누군가 나를 떠났다는 이유만으로 내 가치까지 떠난 것은 아니라고 믿는 것.
칭찬받지 못한 날에도 스스로를 함부로 버리지 않는 것.
그런 마음에는 설탕이 필요하지 않다.
자기 안에서 천천히 익어가는 단단함이 필요하다.
나는 가끔 마음도 음식과 같다고 생각한다.
너무 오래 절여진 것은 본래의 맛을 잃는다. 지나치게 단 것은 혀를 마비시키고, 마비된 혀는 좋은 음식과 나쁜 음식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때로 마음을 씻어낼 필요가 있다.
칭찬을 씻어내고, 기대를 씻어내고, 타인의 시선을 씻어내고, 사랑받아야 한다는 강박까지 씻어내야 한다.
그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마음으로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사랑받고 싶은 것인가.
무엇을 갖고 싶은가.
인정받고 싶은 것인가.
아니면 내가 옳다고 믿는 삶을 살아내고 싶은 것인가.
행복해 보이고 싶은 것인가.
아니면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아도 행복한 순간을 갖고 싶은 것인가.
질문은 때때로 달지 않다.
그래서 어렵다.
그러나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들은 대개 달지 않다. 오래 견디는 사랑도, 자신을 지키는 용기도, 관계를 끝내야 할 때의 결심도, 다시 일어서는 일도 처음에는 혀끝에 쓴맛으로 남는다.
그 쓴맛을 삼킬 줄 아는 사람이 결국 자신의 맛을 지킨다.
나는 이제 마음을 너무 달게 만들고 싶지 않다.
조금은 쓰고, 조금은 시고, 때로는 아무 맛도 나지 않는 날까지 받아들이고 싶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마음보다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날에도 제자리에 앉아 있는 마음을 갖고 싶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언제나 더 많은 단맛이 아닐 것이다.
때로는 단것을 내려놓고 자신의 혀로 삶을 맛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야 알 수 있다.
내가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이 사실은 인정에 대한 굶주림이었는지,
행복이라고 부르던 것이 사실은 외로움을 잊기 위한 설탕이었는지,
그리고 그렇게 달콤한 것들에 절여진 마음 밑바닥에 아직도 남아 있는,
아무에게도 팔지 않은 나 자신의 맛이 무엇이었는지를.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단맛을 많이 아는 일이 아니라, 단맛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마음을 갖는 일인지 모른다.
당분에 절인 마음은 오래 보존될 수 있다.
하지만 오래 살아남는 것과 제대로 살아 있는 것은 다른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마음에서 설탕을 조금 덜어낸다.
달콤한 말 하나를 의심하고,
과도한 기대 하나를 내려놓고,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조급함 하나를 가만히 바라본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아직 아무것으로도 절이지 않은 마음의 본래 맛을 찾는다.
조금 쓰더라도.
조금 시고, 때로는 견디기 어려울 만큼 떫더라도.
살아 있는 것은 원래
쉽게,
달게 변하지 않는다.
그것이 지금의 나일 것이고, 살아 있다는 외면하지 말아야 할 현실의 맛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