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민 수준, 바이링구얼, 모국어, 아니 0개 국어
지역 맘카페나 유튜브 교육 채널에 달리는 댓글들을 보면 심심치 않게 이런 댓글을 보게 된다.
"우리 애도 이러이러하게 저러저러하게 키웠는데 지금 원어민 수준으로 영어하고 XX대학교 영재원 들어갔어요."
대충 이런 댓글이다.
변형으로 이런 말도 있다. "저는 바이링구얼(bilingual)이에요."
이 말을 하마터면 '망령되이' 쓸 뻔했던 나는 통대 입시학원에서 원장 선생님이 목이 터져라 오해하지 말라고 일갈하시는 말을 듣고 쭈글해졌다.
"바이링구얼은 모국어가 2개인 사람을 말합니다. 영어를 할 줄 안다고 completely bilingual이라고 하면 안 돼요!"
나 또한 유학생이 되고 나서 "어우, 너는 영어가 원어민 수준이겠구나~!"라는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다.
처음에는 자신 없이 갔다가도, 영어에 슬슬 자신감이 붙는 유학 2-3년 차쯤 되면 스스로도 저 말을 수긍하기도 한다. 미국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언어와 문화를 스폰지처럼 흡수하는 10대 때는 정말 내가 원어민과 별 차이 없다는 착각마저 든다.
'원어민 수준'이라는 표현은 꽤 재미있는 표현이다. 정확한 발음, 자연스러운 억양, 막힘없이 술술 말하는 유창성 등을 모두 포괄하면서 가장 쉽게 실력을 설명하는 사실상 유일무이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표현이 해로운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에게 대단한 환상과 허상을 심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영어 발음이 좋고 막힘없이 말하면 '원어민 수준'이라고 칭송하곤 했다. 사실 이 현상은 오늘날도 어느 정도 유효하다. 여기서 인지해야 할 점이 있다. 우리는 원어민의 영어 수준에 대해 피상적이고도 정형화된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바로 프렌즈 등에서 거실 소파에 앉아 우스갯소리와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하는 장면이다. 알아듣기 어려운 말들은 없다. 하지만 프렌즈의 조이의 시그니처 대사와도 같은 How are you doing? 처럼 간단한 질문도 정확한 발음과 자연스러운 억양으로 말하는 사람을 보면 귀가 쫑긋 선다. '저 사람 발음 좋다! 영어를 원어민만큼 하나보다!"
나의 영어실력이 일상 생활에서 회화가 가능한 수준인지, 인지 및 학술적 언어 구사가 가능한지부터 먼저 진단해야 한다. 예를 들어, 마트에서 장을 보고 계산대에서 농담을 던지는 '원어민 수준'은 2-3년이면 가능할지 몰라도, 논리적인 리포트를 쓰거나, 계약서에서 허점을 찾아내는 '원어민 수준'은 별개의 문제다.
2-3년쯤 미국에 있어 보니, 일상생활에 전혀 불편함이 없긴 했다. 그렇지만 학교에 숙제를 낼 때, 내가 쓴 페이퍼가 아무런 문법이나 뉘앙스 면에서 문제 없을 거라는 확신을 가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항상 페이퍼를 쓸 때마다 찜찜했고, 문법 실수로 인해 감점되는 것이 가장 불안하고 창피했다. 한국적인 표현을 그대로 영어로 직역해서 쓰기도 해서, 선생님이 이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신 적도 많았다. 체면을 지키려면 당연히 원어민 흉내를 내는 내가 아닌 진짜 원어민이 내 글을 첨삭해주어야만 했다. 한 번은 호스트 아줌마에게 가져가서 부탁을 했는데, 아줌마가 몹시 멋쩍어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하하... 나도 문법은 자신이 없어서 말이야(I'm not good with grammar either.)."
실로 나에겐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아줌마는 내가 두어 번 더 간곡하게 부탁하고 나서야 정말 마지못해 숙제를 봐주었다. 그때 깨달았다. 원어민이 모두 전지전능한 영어의 신이 아니라는 걸. 발음 좋고 유창하게 영어를 내뱉기 시작하던 나는 스스로 약간 원어민 같다는 착각을 하며 살았다. 사실은 원어민보단 앵무새에 가까웠다. 발음 흉내, 강세 흉내를 잘 내서 외운 문장들을 잘 '암송'하는 거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이른바 '완벽한 모국어'의 실체는 무엇일까?
"우리 아이가 열심히 했는데 결과가 이렇게 되어서 기분이 안 좋아."
"우리 아이가 열심히 했는데 결과가 이렇게 되어서 안타까워."
어떤 문장이 더 와닿는가? 나는 두 번째 문장이 좀더 의미를 명확하게 전달한다고 생각한다. 모국어이지만 나는 상황을 적절한 단어로 표현하지 못하고 항상 조금 더 어감이 강한 단어를 선택해서 부모님께 주의를 듣곤 했다. "문제가 잘 안 풀려서 짜증났어요" 라는 말보다는 "문제가 잘 안 풀려서 답답했어요."라고 말하는 것이 더 올바른 표현이었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던 흑역사가 있다. 아무래도 중학교 때 유학을 가버린 탓에, 국어가 약했던 것이 저렇게 티가 났다.
모국어니까 잘 생각해보지 않는 부분이지만, 우리나라에는 '모국어라면 당연히 완벽하게 한다'라는 일종의 대전제가 있는 것 같다. 4가지 영역을 체크해볼 수 있다.
1. 상황에 따라 자유자재로 언어의 톤 조절이 가능한가
미취학 아동들과 블록 놀이를 할 때, "여기 단차가 있어서 안 돼."라는 표현 대신, "서로 높이가 달라서 안 되는거야" 라고 쉽게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
회의실에서 브리핑을 하는 공식적인 자리거나, 나보다 높은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자리에서 "저는 아무개구요, 발표 시작할게요." 라는 말 대신 "저는 ___를 담당하는 아무개입니다. 자료를 브리핑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영어에도 특정 상황에 마땅히 써야 하는 존댓말이 있다!
2. 정서 상태를 정밀하게 표현할 수 있는가
'기쁘다'라는 단어 대신 '벅차오르다', '흐뭇하다', '대견하다,' '뿌듯하다' 중 내 마음 상태와 가장 닮은 단어를 골라낼 수 있어야 한다.
내 마음을 오해 없이 전달하는 것, 상대방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할 말을 정확히 전달하는 '세련된 거절'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3. 문화적 의미의 표현을 할 수 있는가
"밥 한번 먹자"가 진짜 식사 제안인지, 아니면 정중한 작별 인사인지 구분하는 것.
"생각해 볼게요."는 사실 거절의 의미인 것을 인지하는 것.
4. 내가 한 말에 대한 메타인지가 있는가
내가 한 말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들렸을지 생각해보는 것.
영어를 쓰면서 위의 4개 질문에 모두 자신있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면, 당신은 원어민에 준하는 영어실력을 가진 것이 맞다.
언어는 결국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모국어의 수준보다 내가 습득한 외국어가 더 뛰어나지지는 않는다. 모국어의 실력만큼 영어가 늘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영어로 말할 때는 완벽한 문장을 구사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하지만 평상시 우리말로 말하면서도 횡설수설하는 사람이 영어를 쓸 때는 갑자기 오바마처럼 초 고급어휘를 써 가며, 복잡하게 말할 수 있을까? 외국어 실력은 결코 모국어의 지적 수준을 뛰어넘을 수 없다. 윤 전 대통령을 보라. 항상 우리말로 말할 때마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 "아니, 근데, 정말" 등의 필러를 많이 사용하곤 했다. 그러던 그가 방미 때는 달달 외워간 영어 대본으로 유창하게 연설을 마쳤다. 재밌는 건, 외워간 말을 하니까 모국어를 사용할 때의 나쁜 습관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생각없이 외운 말은 유창하게는 말할 수 있겠지만, 생각하면서 하는 말은 전혀 두서 없이 나올 것이다. 특정 개인의 역량 문제라기보다는 우리 모두가 언어에 대해 각자 가지고 있는 문제와 한계점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원어민의 수준이 5세의 원어민인지, 길거리의 어느 Hood 원어민인지, 아니면 담화의 품격을 갖춘 지식인 원어민인지 정의조차 하지 않은 채 그저 '원어민 수준'이라는 말로 영어실력을 비유하거나 미화하곤 한다. 내가 모국어로 구사하는 한국어는 얼마나 섬세하고 정교하게 구사하는지 돌아보라. 영어의 완성도를 높이는 가장 확실한 길은, 어쩌면 내 생각의 그릇을 먼저 깊게 파는 일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