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휴양지 여행은 처음이라

by하르딘

내 주변 또래들에 비해 나는 해외여행을 많이 다녀본 편에 속하는 것 같다. 여행을 많이 다녀본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 혼자 하는 여행에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서른아홉에 혼자 사는 싱글여자에게 여행을 같이 갈 사람이 없다는 표면적인 이유도 있고, 혼자 하는 여행이 더 익숙하고 편하다는 이유도 있다. 그런데 나는 왜 하필 이번에 발리에 가기로 했을까? 생각해 보니 유럽, 남미, 인도 여행은 다 혼자 갔었는데 신기하게도 바닷가 휴양지는 한 번도 혼자 가본 적이 없었다. 휴양지는 대부분 전 연인들과 함께 갔었다는 사실이 갑자기 신기하게 느껴졌다.


예전에 내가 인도에 혼자 간다고 했을 때는 다들 나에게 왜 인도 가냐고 하더니, 발리는 워낙 유명한 휴양지라 아무도 나에게 왜 가냐고 묻지 았았다. 여행계획을 짜면서 발리 여행후기 블로그들을 많이 봤는데, 정말 엄청 많은 후기들이 있었고 여자 혼자 다녀온 후기도 정말 많았다. 단지 발리에서 혼자 8박이나 한다는 것에만 다들 좀 의아해했다. 비행시간이 긴 유럽이나 남미도 아닌데 꽤 길게 있는 편이긴 하니까.


내 그간 여행들은 뒤돌아보니 늘 너무 바쁘게 다녔던 거 같아 이번에는 좀 여유롭게 다니고 싶었다. 아니 여유로운 걸 넘어서 그냥 먹고, 자고, 싸는 것 말고는 거의 아무것도 안 하고 싶었다. 발리는 예쁜 바닷가로 유명한 휴양지라, 다들 해양스포츠와 술이나 춤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비치클럽을 대부분 간다. 처음에는 한국인 특유의 '비교문화' 덕분에 발리 가면 비치클럽은 꼭 가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유명한 비치클럽들을 한번 찾아보긴 했다. 한국인들은 남들이 다 한다고 하면, 나도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드니까. 물론 유명한 비치클럽들은 사진으로 봤을 땐 너무 예쁘고 분위기 좋아 보였다. 저기서 사진 찍으면 인생샷건질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여행 날짜가 다가올수록, 굳이 저길 꼭 가야 할까?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게다가 술도 못 마시고, 춤도 못 추는 내가 비치클럽에서 흥이 넘치는 서양인들과 외향인들 사이에서 멀뚱멀뚱 있을 내 모습이 머릿속에 상상이 되면서, '비치클럽은 안 가도 되겠다'는 명쾌한 결론이 나왔다.


작년 추석 때 스페인과 포르투갈여행을 갔을 때, 너무 많이 걷느라 힘들었고,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다. 박물관, 미술관, 도시, 쇼핑은 별로 내 취향이 아니었다. 게다가 음식은 다 비싼데 그다지 맛있지도 않았다. 이미 그때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거다. 내년에는 도시 말고 아무것도 안 하고 혼자 평화롭게 있을 수 있는 휴양지로 가자고.


한국과 가까운 동남아에 휴양지는 넘쳐나지만, 베트남과 필리핀보다 그동안 한 번도 안 가본 발리가 눈에 띄었다. 발리 하면 떠올리는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를 재밌게 봤던 기억을 떠올리며. 물론 영화에서 처럼 정말 영화 같은 상대를 만날 기대는 1도 없었다. 영화에서도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의 관계보다 나는 그 뒷배경, 발리의 풍경에 더 관심이 쏠렸었으니까. 그리고 이제는 여행지에서 영화 같은 사랑이야기가 내게 일어날 거라는 기대를 가질 시기는 한참 지난 것 같다. 현실은 그냥 현실이라는 걸 알 수 있을 만큼 산전수전공중전까지 다 겪은 걸까.


다들 연인, 친구, 가족들과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 혼자 있는 것도 이젠 정말 익숙해졌다. 20대 때는 혼자 여행 가면, 누군가 나에게 말 걸어주길 기대했던 것 같다. 내향적인 나는 먼저 말걸 용기는 없고, 한국인이든 외국인이든 먼저 말 걸어주면 좋겠다고 기대하고 있었고, 물론 그런 일은 거의 없었다. 지금은 그런 기대도 없다. 그냥 간간히 현지인들이 호기심 있게 짧은 영어로 인사하고 간단하게 말 걸어 주는 게 다다. 그리고 오히려 그게 더 편하다. 서른아홉이나 되어 지나온 여행의 추억들을 돌아보니 뭔가 여행에 대한 기대가 다 사라졌다는 게, 뭔가 동심을 잃어버린 무심한 어른이 된 것 마냥 조금 서글프게 느껴지기도 한다.


발리는 한국인들에게도 너무 유명한 곳이라, 베트남이나 필리핀처럼 발리 가면 완전 한국인들 천국일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한국인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놀라운 건 관광객 중에 거의 80% 이상이 서양인들이었고, 10~20%만 동양인이었다. 그래서 현지인들도 서양인보다 동양인을 좀 더 신기하게 보는 느낌이었다. 서양인들에게도 휴양지로 유명한 곳이라 다들 커플, 가족, 친구들끼리 놀러 온 것 같아 보였다. 혼자 온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한두 명뿐이었다. 그도 그럴게 유럽관광처럼 박물관, 미술관, 쇼핑, 야경 등 돌아다닐게 아니라면 휴양지에서는 혼자 할 게 정말 없다. 그래서 식당이나 카페 등 내가 가는 곳마다 나 혼자 왔다고 하면 조금씩 다들 나를 신기하게 보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심심한 걸 즐기는 경지까지 와버린 나에겐 여긴 안성맞춤이다.


휴양지 여행 가서 바다수영이랑 해양스포츠 안 할 거라고 너무 단단히 못 박아둔 탓일까. 발리 오는 비행기 안에서 생리가 시작됐다. 아, 그래도 호텔 내 수영장에서 수영은 하고 싶었는데.. 대신 이렇게 글을 쓸 수 있어서 좋은 점도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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