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TI 검사했을 때 나는 J성향이 80% 정도였다. 몇 년 전이었으니 퍼센트는 좀 바뀌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계획형인 건 변함없는 듯하다. 인생이 계획대로 안된다는 건 너무나 잘 안다. 그래서 '이번엔 계획 안 짜고 즉흥적으로 해보자!'다짐해놓고 뒤돌아서면 또 열심히 계획을 짜고 있는 내 모습은 내가 봐도 웃기다. P성향의 사람들은 플랜 A, B에 휴식도 계획 짜서 하는 J들을 신기해하지만, 파워 J인 내가 봐도 나의 계획성이 가끔씩 놀랍다.
이번 발리 여행의 큰 목표는 '여유롭게 멍 때리면서 푹 쉬기'였으니, 계획도 최대한 여유롭게 잡기로 했다. 그래서 시간별로 계획을 짜던 예전 여행과 달리 큰 틀만 잡았다. 여행 루트를 정하고, 며칠엔 숙소에서 밥 시켜 먹고 멍 때리고 글쓰기, 이런 식으로 간단하게. 그런데 여행날짜가 다가올수록 계획이 자꾸 점점 더 구체화되어갔다. 새벽 6시 일어나서 1시간 러닝 하기,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카페 가서 글쓰기, 저녁 먹을 식당과 그 근처 마사지샵 찾아놓기, 등등. 그러다 보니 결국 여행계획표가 빼곡하게 찼는데, 근데 또 찬찬히 살펴보니 별거 없긴 하다. 할 거라곤 밥 먹고, 카페 가고, 요가하고 수영, 마사지, 스쿠터 타고 돌아다니기, 뭐 이 정도가 다다. 계획 다 짜고 나니 사실 별건 없는데 왜 계획 짜는데 또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건지 모르겠다. 예전엔 계획 짜는 것 자체를 즐겼던 것 같은데, 마흔이 코 앞이라 그런가 요샌 누가 대신 계획 좀 짜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가끔씩 든다.
20대 중반쯤엔가 이탈리아, 스위스 여행 갈 때 비행기값 아끼려 경유해서 거의 30시간 가까운 비행기를 타고 갔었다. 물론 20대였어서 가능했지, 지금은 30시간을 비행이동에 쓸 체력이 당연히 없다. 그래도 여전히 돈도 없는지라, 이번 여행경비 아끼려 직항 7시간 걸리는 발리를 베트남 호찌민을 경유해서 왔다. 경유하는 게 거의 직항의 반값보다도 더 쌌으니까 개이득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경유시간과 긴 비행시간보다 서서 계속 기다려야 하는 게 더 힘들었다. 입국심사 줄 서서 1시간 넘게 기다리고, 캐리어 나오는 거 기다리느라 또 1시간 기다리고, 그렇게 공항에서 나오는 시간이 예상보다 훨씬 늦어졌다. 공항에서 시간만 잡아먹었으면 다행이게, 그만큼 체력도 다 떨어져서 그날 하려고 하던 것들을 시간부족과 체력의 한계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지금은 여행 4일 차, 계획대로 된 거는 2~30프로밖에 안된 것 같다. 자꾸 생각지 못한 세세한 변수가 생겼다. 물론 여행을 통째로 망칠만한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리고 오기 전부터 계획대로 안돼도 괜찮다 생각했다. 이젠 여행은 여행지에서 뭘 한다는 것보다, 그냥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환경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여전히 파워 J이지만, 조금 달라진 것도 있다. 예전에는 계획대로 안 되는 게 조금 스트레스였다. 하지만 이제는 계획은 짜되, 계획대로 안되었을 때 스트레스가 거의 없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뭔가 계획대로 생각대로 안되더라도. 그냥 그럴 수도 있지, 그러려니 하게 된다. 가끔씩 계획대로 안 됐을 때, 계획보다 생각지도 못했던 더 좋은 일이 일어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P성향의 사람들이 즉흥적인걸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공감이 가기도 한다.
계획대로 되든 안되든 나는 아마 계획을 계속 짤 거 같다. 여행계획도, 내 미래 인생 계획도. 계획대로 하나도 안되더라도. 내 인생계획도. 계속 수정되더라도. 나는 스무 살 때부터 오랜 기간 다이어리를 써왔다. 즉, 수십 개의 다이어리가 쌓여있다. 내 다이어리는 일기보다는 계획 짜기용이다. 주로 1년 후, 2년 후, 몇 년 후 이루고 싶은 목표와 버킷리스트들이 적혀있다. 그걸 보고 있노라면 거의 5,6년 동안 매년 같은 목표가 적혀있을 때도 있고, 어쩔 땐 인생 계획이 완전 180도 수정되어 있을 때도 있다.
이렇게 대략 20년간의 과거 데이터들로 봤을 때, 내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나는 계속 계획을 짠다. 최근 들어 깨달은 건데, 나는 계획대로 하고 싶어서 계획을 짜는 것보다, 계속 나의 미래를 상상해 보는 걸 좋아했던 것 같다. 서른 살에는 이걸 해야지, 서른다섯에는 저걸 해야지, 하면서 이렇게 조금 몇 년 뒤 긴 미래를 상상해보곤 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당연히 과거의 내가 상상했던 내 서른아홉의 모습과 지금 현재 서른아홉의 내 모습은 정말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현재 서른아홉의 내 모습이 훨씬 더 좋다. 어렸을 때 상상했던 모습은 아닐지라도. 그때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흰머리와 주름이 늘고 체력이 확 떨어졌더라도. 너그러워지고 여유로워지고, 혼자의 시간을 즐길 줄 알고, 나 자신을 잘 돌봐주며 살아가는 내 서른아홉이 나에게는 더 멋있어 보인다. 남들이 어떻게 보든 말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