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낭과 귤 | 부쩍 추워진 출근날, 아내가 차린 아침밥
어젯밤, 아들과 나는 이불 대신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침낭을 사 달라고 한 건 나였다. 날씨가 차가워지면서 이불을 한 겹 더 덮을까 하다가, 아내에게 말했다.
"우리 침낭 사자. 내 거랑 하랑이 거."
아내에게는 침낭을 사느냐보다 얼마에 사느냐가 더 중요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아내는 핫딜을 찾아냈다.
"이거 싸게 잘 샀어."
아내는 가격을 보고 만족했고, 아들과 나는 침낭을 보고 만족했다. 같은 물건 두 개를 두고, 한 집 안에서 만족의 이유가 이렇게 갈린다. 침낭의 값은 아내만 알고, 침낭의 기분은 우리 둘만 안다.
침대 위에 침낭을 펼쳐 놓자 아들이 좋아했다.
"아빠, 이거 덮고 자면 야영하는 것 같겠다."
그렇게 마흔여덟 살 아빠와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의 실내 야영이 시작됐다. 텐트를 칠 필요도, 짐을 쌀 필요도 없었다. 침대에 누워 침낭만 뒤집어쓰면 거기가 캠핑장이었다. 침낭 안으로 몸을 밀어 넣으면서, 이 나이에 이런 걸 좋아해도 되나 싶었다. 그런데 옆에서 아들이 좋아하니 나도 괜히 신이 났다.
주말이면 아들과 하는 것들이 있다. 게임, 포켓볼, 수영, 복싱, 실뜨기, 공기놀이. 그 목록에 어젯밤 하나가 더 붙었다. 침낭 덮고 자기. 준비물은 침낭 하나, 값은 아내가 핫딜로 깎아 둔 덕분에 착한 놀이.
그렇게 잠들었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꿀잠을 잤다.
아침이 되자 공기가 달라져 있었다. 며칠 전과 같은 집인데, 창밖에서 들어오는 차가운 기운이 확실히 달랐다. 오늘부터 날씨가 부쩍 추워졌다.
그리고 오늘부터 다시 출근이었다. 개천절과 주말, 대체휴일까지 사흘을 쉬고 맞는 화요일.
쉬는 사흘 동안은 아침을 내가 차렸다. 토요일엔 아내가 전날 끓여 둔 수프에 기대어 부랴부랴, 일요일엔 아내가 꺼내 둔 재료로 모양을 내 가며, 월요일엔 계란만 삶으라는 아내의 주문을 받아서. 부엌에 서서 식재료를 꺼내고 접시에 담는 일이, 사흘 사이 조금 손에 익을 무렵이었다.
그런데 출근하는 날이 되자 아침 식탁은 다시 아내의 몫으로 돌아갔다. 내가 침낭 속에서 꿀잠을 자는 동안 아내는 먼저 일어나 하루를 준비하고 있었다. 내가 부엌에 들어섰을 때 아내는 이미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나갈 시간과 아들이 움직일 시간을 헤아리며, 우리 둘의 아침을 차리고 있었다.
사흘 부엌을 지키고 나흘째에 바로 은퇴한 요리사. 그게 오늘 아침의 나였다.
평일 아침에는 셋이 한 식탁에 앉지 못한다. 아내는 7시 5분에 갑상선 호르몬 약을 먹고, 한 시간이 지나야 밥을 먹을 수 있다. 그래서 평일의 아내는 약을 먼저 먹고, 우리 아침을 차리고, 자기 밥은 뒤로 미룬다. 주말에는 셋이 둘러앉던 식탁이, 오늘부터 다시 아들과 둘이 먹는 식탁이 되었다.
나는 식탁 앞에 앉아 접시를 바라봤다. 삶은 달걀, 브로콜리, 느타리버섯, 방울토마토, 아보카도, 배, 소고기, 그리고 식빵 한 장. 우리 집 식탁에서 자주 보던 얼굴들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낯선 얼굴 하나가 끼어 있었다. 주황색이었다.
귤이었다.
세어 보니 아홉 가지였다. 어제 내가 차린 아침은 계란, 아보카도, 방울토마토, 배, 그리고 밤. 다섯 가지였다. 물론 어제는 팝콘 자리를 남겨 두라는 아내의 주문이 있었다. 그래도 숫자는 숫자다. 사흘 부엌을 지킨 요리사의 자존심은, 아홉이라는 숫자 앞에서 슬그머니 접어 두기로 했다.
나는 귤을 한참 바라봤다. 여름에는 수박이나 복숭아 같은 과일이 눈에 들어왔는데, 날씨가 차가워지니 귤이 식탁으로 들어왔다. 올해 나에게는 일기예보보다 과일 접시가 먼저 계절을 알려 줬다.
돌아보면 이번 추위는 우리 집에 차례로 들어왔다.
10월 첫날 아침 식탁에서는 기온이 많이 떨어졌으니 감기 조심하자는 말이 나왔다. 이튿날 새벽엔 수영장 가는 옷이 긴팔로 바뀌었다. 어젯밤엔 이불이 침낭으로 바뀌었고, 오늘 아침엔 식탁에 귤이 올라왔다.
말에서 소매로, 소매에서 잠자리로, 잠자리에서 식탁으로. 추위는 그렇게 한 칸씩 집 안쪽으로 들어왔다. 추워졌다는 걸 밤에는 몸으로 알았고, 아침에는 식탁으로 알았다.
침낭과 귤. 이번 가을 우리 집에 새로 등장한 것들이다. 하나는 밤을 맡았고, 하나는 아침을 맡았다.
물론 침낭은 내가 졸랐지만 핫딜을 찾아 산 건 아내였고, 귤을 식탁에 올린 것도 아내였다. 날이 추워지면 무엇을 덮고 자야 할지, 아침에는 무엇을 올려야 할지. 나는 그저 "추워졌네" 하고 느끼는데, 아내는 그다음에 필요한 것을 찾고 있었다.
사흘을 쉬고 다시 출근하는 아침. 솔직히 말하면 출근하기 싫었다. 휴일은 왜 그렇게 빨리 끝나는지 모르겠다. 토요일 아침에는 아직 시간이 많았고, 일요일에는 내일도 쉰다는 믿는 구석이 있었고, 월요일에는 대체휴일이라는 핑계가 있었다. 화요일 아침이 되니 더는 댈 핑계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은 몸이 무겁지 않았다. 어젯밤 침낭 속에서 푹 잔 덕분인지, 아내가 차려 둔 아침 덕분인지. 둘 중 하나만 고르라면, 나는 고르지 못하겠다.
나는 삶은 달걀을 먹고 소고기를 먹었다. 브로콜리와 버섯을 집어 먹고, 배도 한 조각 먹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귤을 집었다. 껍질을 까자 손가락 사이에서 껍질이 갈라지고, 식탁에 귤 냄새가 퍼졌다. 올해 처음 맡는 귤 냄새였다.
아들은 옆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사흘 동안 같은 집에서 느긋하게 지냈지만, 화요일 아침이 되니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나는 회사로, 아들은 아들의 하루로.
현관으로 향하기 전에 방을 한번 돌아봤다. 어젯밤 아들이 들어가 있던 침낭이 침대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밤에는 그 안에서 야영을 했고, 아침에는 귤을 깠다.
특별한 여행을 다녀온 것도 아니고, 대단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추워져서 침낭을 덮었고, 추워져서 귤이 올라왔다. 그런데 겨울이 더 깊어진 어느 날, 나는 오늘 아침을 떠올릴 것 같다. 침낭을 처음 덮고 일어난 날. 식탁에 올해 첫 귤이 올라온 날.
현관문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추워졌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집을 나섰다.
밤에는 침낭이 우리를 덮어 주었고, 아침에는 귤이 계절을 알려 주었다. 그 사이에, 아내가 차린 아침이 있었다.